전도자의 기도, 전도자의 삶, 전도자의 메시지

묵상한 말씀 : 누가복음 10:1~16
나에게 주시는 말씀 : “그후 주께서 70명도 세우시고 예수께서 친히 가려고 하신 각 마을과 장소에 둘씩 짝지어 먼저 보내셨습니다.” (1)

1. 이번에는 70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장면이다(1).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9장과 연결된다. 9장에서 12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고 병든 사람을 고쳐 주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환영해 주는 집에 들어가 그곳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다. 만약 환영하는 집이 없으면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하신다(9:1~5). 오늘 말씀은 70명을 임명하여 세우시고 둘씩 짝지어 친히 가려고 하시는 각 마을과 장소로 보내신다. 주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결심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9:51). 예수님이 이제 본인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복음을 전하지 못한 많은 마을과 영혼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친히 가고자 하셨지만 육체를 입고 계셨기에 그렇게 하실 수 없으셨다. 이때 예수님은 선택하신 방법은 70명의 제자들을 따로 선발해서 둘씩 친히 가려고 하셨던 마을과 영혼들에게로 보내는 것이다.

2. 이십대 때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을 때, 어느 날 이 말씀을 묵상하였다. 그때 성령님이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가는 자도 필요하고 보내는 자도 필요하다. 너가 가는 것도 귀하지만, 너가 만약 보내는 자가 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복음이 필요한 곳에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왕국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런데 그 일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제자들이 필요하다. 복음을 들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필요하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 우리가 제자훈련을 해야하는 목적이 거기에 있다.

3. 예수님은 그들을 파송하시며 간절한 기도 요청을 하신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구나.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게 추수할 밭으로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라.”(2)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시각을 알 수 있다. 이미 추수할 것은 많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때나 2,000년이 지난 지금이나 세상은 언제나 악하고 타락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필요한 것은 때(time)가 아니라 추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필요하다. 주님의 마음을 시각을 가지고 추수할 밭으로 나아가 추수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때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 밭의 주인에게 청하는 것이다. 어쩌면 택함 받은 70명은 예수님의 기도(밭 주인에게 일꾼들을 보내 달라는 청함)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 기도를 해야 한다.

4. 예수님은 그들을 파송하시면서 9장에서 말씀하신 내용과 동일한 이야기를 하신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 (나) 지갑도 가방도 신발도 가져가지 말라. (다) 가는 길에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 (라) 그곳에서 평화의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 머물면서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라고 축복하라. 그 평화가 그 사람에게 합당하면 그 사람에게 머물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너희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마) 그 집에 머물면서 그 사람이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말라. (바)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라(3~9).

5. 이상한 것은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어떤 동네에 들어가서 평화의 사람을 만나서 그 집에 머물게 되면 평화를 빌고, 그들이 주는대로 먹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상반되는 말이다. 정말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더 강력하고 힘센 무엇인가를 쥐어주면서 보내야 한다. 그래야지 이리 떼 가운데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누굴 만날지 모르지만 그 사람을 통해 공급되어질 것으로 먹으라고 하신다.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 분의 공급과 인도하심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양으로서 이리 떼 가운데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6. 그러면서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신다. 특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강조하신다(11). 이것이 보냄을 받은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한 가지 일이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임무는 이리 떼 가운데로 들어가서 거지처럼 살면서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고 알리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병든 자들이 있다면 고쳐주는 것이다. 이것이 파송을 받은 자의 삶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선포하는 자의 소유와 능력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7. 10절부터는 환영하지 않는 마을(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만약 그들이 환영하지 않는다면 신발을 붙은 먼리를 떨어 버리며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음을 말하라고 하신다(10~11). 그러면서 많은 권능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던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만약 똑같은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 행했다면, 그들은 벌써 회개했을 것이라고 하신다(13~15). 그러면서 전도자가 가져야할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신다. 전도자의 말을 듣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반대로 전도자를 배척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배척한 것이다(16). 그러므로 그들은 그에 상응하는 심판과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8. 정리하자. 전도자에겐 두 가지 필요하다. 먼저는 주님의 보내심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전도자가 전할 메시지이다. 전도자가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면, 전도자가 전할 메시지는 딱 하나이다. “하나님의 왕국이 까까이 왔다”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문제는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다. 다만 전도자는 가는 마을마다 ‘평화의 사람’이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그 집에 머물면서 그 집에 평화를 빌고, 그들이 주는 것을 먹으면 된다. 반대로 전도자를 환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도자 자신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내신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며, 그들을 통해 전해질 복음을 거부한 것이다. 그들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한 것이므로, 그것에 합당한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질 것이다.

길 위에서

묵상한 말씀 : 누가복음 9:46~62
나에게 주시는 말씀 : “누구든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왕국(나라)에 적합하지 못하다.”(62)

1. 예수님의 자신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뜻을 정하셨다(51). 그러나 여전히 제자들은 미숙하고 어리석은 반응만을 보인다. 오늘 본문의 첫 번째 이야기는,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다툼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서로 누가 제일 큰 사람인가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다(46).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시고 한 어린아이를 데려와 곁에 세우며 말씀하신다(47).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48)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할 것을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그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왕국을 전하며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 세상 왕국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이 세상은 누가 더 많은 힘과 돈과 권력과 지식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측정해서, 그것에 따라 서열을 정리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뒤집어진 왕국이다. 예수님은 한 아이를 통해 그것을 강조하신다. 내세울 것 없는 작은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그런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것이다.

3. 그러나 요한이 말한다. “선생님, 저희가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사람을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서 못하게 막았습니다.”(49)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다. 어떤 사람이든지 제자들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들을 위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50). 이것을 통해서 제자들 안에 있는 특권 의식과 경쟁 의식이 볼 수 있다. 이것도 이 세상의 가치관이다. 이 세상은 서로 경쟁하기를 원한다. 또한 어떤 특별한 사람과 연결되어 있거나, 어떤 특별한 모임에 소속되어 있음으로, 그리고 그런 특별한 모임을 통해 특별한 경험을 함으로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하나님의 왕국은 그렇지 않다. 반대하지만 않는다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평등하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엔 서열도 특권의식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4. 세 번째 사건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어느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대한 이야기이다(521~56).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한 여행을 출발하신다. 지금 계신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여러 마음을 거쳐야 하는데, 제자들을 앞선 마을로 미리 보내 예수님과 제자들이 숙박할 수 있는 장소를 알아보도록 하셨다. 그런데 사마리아의 어느 마을이 예수님을 거절하였다. 이 사실을 안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그 마음을 저주하자고 제안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꾸짖으시며 자신을 환영하는 다른 마을로 가셨다.

5. 우리는 이것을 통해 제자들 안에 있는 잘못된 사고 방식을 또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하나님의 왕국은 강한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억압하며 조정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경험했던 로마 제국이 그러했고, 세상 왕국의 통치 방식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왕국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지만 세상의 왕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은 너무도 많이 오해하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하나님의 왕국은 뒤집어진 왕국이다.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존재한다.

6. 성경은 그것을 ‘제자도’(discipleship)라고 부르신다. 제자도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간다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의 왕국과 연결하면, 이 세상의 방식과 이 세상의 길을 걷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의 방식과 하나님의 왕국의 길을 걸어간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57절 이하가 그것을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럼 57절에서 62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자.

7. 재미 있게도 57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들이 길을 가고 있는데”(as they were walking along the road) 이 이야기의 배경은 ‘길 위’이다. 그 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기도 하지만(51),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걸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그 길을 걸어가고 계신다. 그때 세 명의 사람이 차례로 등장한다.

8.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 먼저 자신의 결단을 고백한다.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57) 보통은 예수님이 먼저 제자를 택하시고 그를 부르신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이 먼저 어디든지 따르겠다고 말한다. 그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구나.”(58)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자신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예수님은 그 사람의 동기와 목적을 알고 계셨다. 지금 그 사람이 예수님 앞으로 나와서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영광과 성공, 부와 명예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히신다.

9.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과 정반대의 경우이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먼저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라.”(59) 그러자 그 사람은 대답한다. “주여, 제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59)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죽은 사람들에게 죽은 자를 묻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 왕국(나라)을 전파하여라.”(60) 이 말씀의 의미는 우선순위에 대한 것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선택을 받아 주님을 따르라는 명령을 받는다. 앞선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확인했듯이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을 좇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님보다 앞선 무엇인가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심지어 아버지의 장례까지도 주님을 좇는 것에 방해가 되어선 안 된다.

10. 세 번째는 첫 번째 사람과 비슷한 경우이다. 그는 먼저 이렇게 고백한다. “주여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제가 먼저 가서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 주십시오.”(61) 이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단호하시다. “누구든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왕국(나라)에 적합하지 못하다.”(62) 한번 주님을 따르기로 선택했다면, 그것만 바라보고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왕국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지금 예수님의 삶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나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로 결정했고,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나아가고 계신다.

11. 정리하면 뒤집어진 하나님 왕국의 가치와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바로 제자라는 것이다. 감사한 것은 예수님이 그 삶을 모델로 먼저 보여주고 계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걸어가고 계시고, 우리들을 그 길로 초청하고 계신다. 우리는 동기와 우선순위와 목표를 명확하게 정리하고 주님이 가시는 그 길을 따라 가야 한다. 그것이 제자도이고 하나님 왕국의 삶이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

묵상한 말씀 : 누가복음 9:28~45
나에게 주시는 말씀 :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참아야 하겠느냐?” (41)

1. 8일이 지난 후에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신다(28). 예수님은 그곳에서 기도하는데 얼굴 모습이 변하셨고 옷이 하얗게 빛났다(29). 그때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였다(30). 그들은 영광 가운데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주님의 떠나가심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31).

2. 우리가 이것을 통해 추측(상상)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이런 일들이 예수님이 따로 기도하실 때마다 일어났을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 하나님의 임재는 매일 경험되는 실제였다. 주님은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분의 음성을 들으며, 하늘 아버지가 이 땅에 보내신 목적과 계획을 듣고 확인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특별히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한 것은, 이 둘이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선지자들을 대표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곧 이루어질 일들 –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일들 – 에 대해서 나누었다.

3. 그렇다면 왜 그들과 이런 일들에 대해서 상의를 하시고 대화를 나누셨을까? 십자가의 죽음가 부활, 승천이 구약과 연결되는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구약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시하셨고, 예수님은 그런 약속들과 예언들을 성취하시기 위해 친히 몸을 입고 오셨다. 그런데 왜 그들과 대화를 하실까? 하나님의 아들이 모세와 엘리야와 곧 이루실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은 공동체를 기뻐하신다. 함께 나누고, 당신의 계획과 뜻을 밝히시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함께 상의하고 논의하는 것을 즐겨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다. 다른 말로 하면 관계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단지 구약을 대표한다는 상징적인 존재로 나타난 것만이 아니다. 구약을 대표하긴 하지만 예수님과 실제적으로 대화하고 관계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고 관계하시기를 원하신다.

4. 이때 옆에서 잠을 이기지 못해 졸다가 깨어난 제자들이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32). 아마 매우 놀라고 신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떠나려고 하자 베드로가 막아 서며 한 가지 제안을 말한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 있으니 참 좋습니다. 우리가 초막 세 개를 만들되 하나는 선생님을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짓겠습니다.”(33) 그러자 구름이 나와서 그들을 덮었고(34), 구름 속에서 하늘 아버지의 소리가 들렸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그의 말을 들어라!”(35) 그 소리가 사라지고 둘러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예수님만 홀로 서 계셨다(36).

5. 결국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아 계신 분은 예수님이셨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어떤 기적과 어떤 환상도, 어떤 영적인 체험도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으며, 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하늘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 변화산에서의 모든 일들은 결국 산에서 내려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변화산 사건은 그 시작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도 그것을 말씀하신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기도와 삶이 분리되지 않았다. 또한 어떤 경험을 위해 기도의 시간을 가지신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더 깊이 들어가고, 그 분의 깊은 계시를 듣고 그 분과 관계를 맺어가는 목적은 삶으로 살아내는데 있었다.

6. 이튿날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 앞으로 나왔다(37). 그때 한 사람이 소리쳤다. “선생님, 부탁입니다. 제 아들 좀 봐 주십시오. 제게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입니다. 그런데 귀신이 이 아이를 사로잡아 갑자기를 소리를 지르게 하고 아이에게 발작을 일으켜 입에 거품을 물게도 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상하게 하면서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 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들은 해내지 못했습니다.”(38~40)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면서 참아야 하겠느냐? 네 아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41) 예수님은 더러운 영을 꾸짖으시며 그 아이를 고쳐 아버지께 돌려보내셨다(42). 이것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모두 놀라고 감탄하였다(43).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유의해 들으라. 인자가 배반을 당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 하지만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45). 제자들은 그저 두려워서 예수님께 물어볼 수도 없었다(45, 36과 비교).

7. 변화산 위에서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산 밑에서는 참담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병자들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던 제자들이 어느 아들의 몸속에 들어간 귀신을 전혀 쫓아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아들에게 있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라고 책망을 하신다. 예수님이 답답함은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아니었다. 곧 하나님의 맡기신 임무를 수행하시고 떠나가셔야 하는데 여전히 믿음 없이 반응하는 제자들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끼셨다(31, 41).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곧 닥칠 일들에 대해서 말씀하신다(44). 하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 말씀에 압도되어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9. 변화산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하신다. 오랫동안 준비되어진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제자들은 믿음이 없다는 책망까지 듣는다. 그들은 그저 나타난 현상에만 반응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계속 두려워하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늘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그 길을 걸아가신다. 누가복음은 의도적으로 이것을 대비한다.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선 누가복음을 더 살펴봐야할 것이다.

제자도 : 하나님 왕국의 통로로 살아가기

묵상한 말씀 : 누가복음 9:10~27
나에게 주시는 말씀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서 잇는 사람들 가운데 죽기 전에 하나님 왕국(나라)을 볼 사람이 있을 것이다.”(27)

1. 오늘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0절부터 17절까지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소개하고 있고, 18절부터 27절까지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제자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오병이어의 기적을 살펴보자.

2. 보냄을 받은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에게 전도여행 가운데 일어난 놀라운 일들을 보고한다(10). 여기서 제자들을 ‘사도들’(apostles)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도(들)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제자들을 사도로 부르는 이유는 말 그대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보냄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들을 고쳤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지금 제자들은 그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고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러한 보고를 들으신 후에 그들을 데리고 벳세다라는 마을로 가신다. 아마 전도여행을 통해 수고한 제자들과 리트릿(retreat)의 시간을 가지려고 하신 것 같다.

3.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아채고 벳세다까지 좇아온다(11). 그들이 이곳까지 좇아온 이유는 하나이다.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해서 엄청난 기적과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런 극성스러운 무리들을 쫓아내거나 피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환영하신다. 그리곤 그들에게 하나님의 왕국(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그들을 고쳐주신다. 우리는 여기서도 말씀 사역과 성령 사역이 병행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더불어 예수님의 핵심 사역은 하나님의 왕국(나라)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4. 그런 가운데 날이 저물어 버렸다. 외딴 곳에서 날도 저물고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방법도 없다는 것을 인식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사람들을 주변 마을과 농가로 가서 잠잘 곳을 찾고 먹을 것을 얻게 하자고 제안한다(12). 이것이 당시 제자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엉뚱한 말씀을 하신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이것은 정말 비현실적인 대답이다. 지금 모여있는 사람들 중에 남자만 5,000명이나 되는데 무슨 수로 그들을 먹이라는 말인가? 그때 어느 제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리며 그것이 현실적이지 않음을 다시 지적한다(13).

5. 그러자 예수님은 남자만 5,000명이 넘는 무리들을 50명씩 둘러앉으라고 말씀하신다(14).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을 모두 앉힌다(15). 그때 예수님은 자기 앞에 가져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사람들 앞에 갖다 놓게 하신다(16). 이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남자 5,000명이 넘는 무리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이 거두어 보니 12바구니에 가득 찼다(17).

6.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항상 강조하는 것이지만, 문맥이 중요하다. 이 사건과 연결된 앞의 사건은 무엇인가? 1절부터 6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 두 사건의 연결점은 ‘하나님의 왕국(나라)’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하나님의 왕국(나라)을 전파하고 아픔 자들을 고쳐주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후에 예수님은 직접 몰려온 무리들에게 하나님 왕국(나라)을 말씀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신다.

6. 그렇다면 오병이어 사건은 어떤 연결점을 갖는가? 제자들의 전도여행과 병행된다. 이 두 가선의 공통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적과 능력은 예수님(하나님)이 행하신다. 순종은 제자들이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무리들을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놀라운 결과가 일어난다.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가지고 그 많은 무리들이 먹고도 남을 정도로 채워주시는 분은 예수님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세 순종하여 사람들을 50명씩 앉도록 한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받아서 그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풍성하게 채우시고 먹이신다.

7. 이것이 하나님의 왕국(나라)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왕국(나라)은 언제나 환영이 있고, 풍성함이 있고, 넉넉하다. 왜냐하면 주님이 왕으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가진 지혜와 경험과 이성으로 판단하고 계산하고 제한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뛰어넘어 일하시고 역사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연결 통로 역할만 하면 된다. 능력과 기적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제자는 하늘에 있는 것을 땅으로 가져오는 통로 역할만 하면 된느 것이다.

8. 18절부터는 이야기가 전환된다. 어느 날 예수님은 혼자 기도하고 계셨다. 그 자리에는 열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갑자기 질문을 던지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었던 소문들을 예수님께 전달한다.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합니다. 옛 예언자 중 한 사람이 되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19, 9:7~8 비교)

9. 그러자 예수님은 두 번째 질문을 다시 던지신다(20).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옆에 있던 베드로가 놀라운 대답을 한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God’s Messiah) 이것은 정말 놀라운 고백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약속된 메시아, 다윗의 왕국을 회복하고 구원하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고대하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시며 엄중하게 경고하신다. “이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21)

10. 예수님은 이어서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하신다(22).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받아 끝내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나라)을 완성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광이 아니다. 오히려 메시아는 많은 고난을 당할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 이것이 메시아가 가야할 길이다.

11. 예수님은 이어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제자도’(discipleship)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그 길을 따라 가아야 한다. 그 길에는 영광이 기다리지 않는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23). 또한 자기 생명을 버려야한다(24). 제자의 길에 항상 역설이 존재한다(25). 자기 생명을 구하는 자는 잃어버리게 되고, 자기 생명을 잃어버린 자는 구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제자가 그렇게 메시아가 가신 길을 따라 갔다면 최후 심판의 날에 하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인정과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메시아를 부끄러워 했다면 그 날에 메시아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다(26).

12. 마지막 27절은 우리를 곤혼스럽게 만든다.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들 중에 어떤 제자는 하나님의 왕국(나라)을 경험하게 될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두 가지 사건과 연결해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제자들은 곧 이어질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왕국(나라)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9:28~36). 또한 오순절 때 교회 공동체 위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눈으로 하나님의 왕국(나라)를 보게 될 것이다(행 2:14~39).

13.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한 가지 소망을 가지게 된다. 메시아의 길을 좇는 제자들에게 자기 부인과 십자가, 생명을 잃어버리는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동시에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게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왕국(나라)을 누리고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허락된 축복이다. 그들은 이 땅에선 고난을 당하고 멸시를 받지만, 그런 삶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나라)을 임하게 하는 통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마치 메시아가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제자들도 그러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