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살아내는 삶

진리는 치열한 교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을 변화 시키고 건강하게 세워주는 역할/기능도 해야한다. 그렇게 보면 교리란 형이상학적이고 고차원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살아가는 삶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작금의 개신교는 저급한 고등종교가 되어 삶은 사라지고 종교적인 시스템만 남아 있는 것 같다. 삶을 변화 시키지 못하는 진리는 진리로서의 힘을 상실한 것이며, 그런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종교적인 시스템으로 그것을 대체하게 된다.

건강한 삶, 건강한 관계가 없는 신앙이 판을 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건강하지 않고, 내 자신, 내 이웃과의 관계도 건강하지 않다. 여기 저기 성벽들은 무너져 있고, 많은 원수들이 마음대로 들어와 우리의 삶을 짓밟고 있다. 우리는 다시 진리로 무너진 성벽을 세우고, 성문을 달아야 한다. 이것은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고, 가치와 세계관, 경계선의 문제이기도 하다. 진리는 (건강한) 성벽을 쌓게 만든다. 그것은 (건강한) 정체성을 고양 시키고, 삶(관계)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내보내야 하는지(거절해야 하는지) 알게 해 준다. 그것은 외부의 여러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준다. 최종적으론 성문을 열어 환영과 사랑과 돌봄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을 진심으로 내어준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는 진리로 혐오와 배타와 정죄를 생산해 낸다.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어느 누구도 못 들어오고, 어느 누구도 못 나가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진리를 알고 살아내는 자의 모습이 아니다. 진리는 죄를 죄 되게 하고 그 죄를 미워하게 한다. 동시에 그 타락한 세상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내어주며 섬기고 사랑하게 만든다.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놀라운 사랑을 누리고 있기에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줌으로 진리를 보여주고 나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우리의 몸에 있는 피부이다(헨리 클라우드, 노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피부의 기능은 구분과 분리이다. 더불어 무엇을 내어보내야 하는지,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 진리도 우리 안에 동일한 역할을 한다. 진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 준다. 진리는 우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항상 닫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무엇을 수용해야할지, 무엇을 거부해야할지를 알려 준다. 다시 말하면 성벽, 성문과 같은 것이다.

요즘 한국 교회는 양극단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한쪽 진영은 성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누구도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게 만든다. 성 안쪽에 있지만 않으면 무조건 적을 간주하고 공격한다. 그렇게 해야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성 밖은 너무도 위험하고 타락한 곳이라만 가르친다. 다른쪽 진영은 성문이나 성벽 자체가 아예 없다.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환영하고 받아들인다. 적군인지 아군이지 피아식별 조차 하지 않는다. 정체성도 없고 기준도 없다. 구원 받았다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진리는 건강한 경계선과 관계를 만든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무엇보다 그런 진리가 진정으로 필요하다. 혐오와 배타를 넘어, 절대적 진리라는 것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세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 진리를 제대로 알고 경험해야 한다. 삶이 없는 고차원적인 지식만을 습득하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삶의 자리로 내려와야 하고, 삶의 문제를 진솔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런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작업이 목회 현장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즐거이 사역하다가 기꺼이 잊혀지게 하소서

지역교회의 일반적이고 평범한 목회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와 제주도 교회를 섬기고 싶다는 거창한 소망으로 북 카페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속도가 너무 더디다. 뭘하든 다 돈이기 때문이다. 두둑한 잔고를 통장에 쌓아 놓고 시작하는 것이라면 마음이라도 편할텐데 없는 돈을 짜내어 진행하다보니 속도가 너무 너무 더디고 힘들다. 거기에 걱정하시는 부모님과 지인들 –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걱정 하시는지 나도 잘 안다. 돌다리도 두드리는 성격인데 나인들 수 백번 계산해 보고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제주도에 넘쳐나는 것이 카페이고 펜션이고 망해 나가는 것이 카페이고 펜션인데, 또 하나의 카페를 시작한다고 하니 다들 걱정을 하시는 것이 당연하다. 나도 내가 걱정스럽다.

또 다른 반응은 과거에 다 해 보았다는 것이다. 뭐 제주도에서 이런 저런 사역들 다 시도해 보았는데 거의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것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부분이다. 기독교인 숫자도 작고, 교회들도 미자립 교회가 수두룩하고, 어떤 강사를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와도 사람들이 안 모인다. 아카데미 사역을 고민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잘 배우려고 하지 않는데 뭐가 되겠는가? 이렇게 저렇게 막막할 뿐이다. 요 며칠 동안 머리가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하나님 왕국, 선교적 교회, 북카페, 아카데미 사역, 네트워크, 공동체… 참 멋있는 단어들이지만 현실에서는 너무도 형이상학적 단어들이다. 진행하면 할수록 참 현실과는 동떨어진 개념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가야 한다. 망해도 실패해도 가야 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이 되고, 실패자라는 주홍글씨가 붙여져도 어쩔 수 없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가는 것이 맞다. 불확실한 것이 가득하고,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 주님이 가자고 하면 따라가야 한다. 그것이 제자의 본분이다. 환경이 불안함을 증폭 시키지만 주님의 샬롬을 구하며 계속 주님께 발걸음을 맞추어야 한다. 은행의 잔고도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묵묵히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길에 서 있느냐는 것이다. 사역의 열매, 성공의 유무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 오늘도 주님을 따라 하나님 왕국을 위한 모험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가?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

기독교와 근대 역사

A 교수님의 수업을 참 많이 들었다. 학부 신학과 때는 세계교회사로부터 시작해서 성결교회사 그리고 M.Div와 Th.M 과정에서는 복음주의와 관련된 강의를 여럿 들었다. 그때는 많이 배우고 여러 가지 동의가 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10여년 전부터는 그 분의 강의나 이야기에 잘 동의가 되지 않는다. 이번에 교단 신문을 보니 어떤 모임에서 건국에 대한 강의를 하셨다는 기사가 실렸다.

건국에 대한 논의와 논쟁은 뒤로 하고, 조선이 망하고 독립운동과 임시 정부, 그리고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것은 ‘왜 그것을 그토록 강조하는가’이다. 제헌 국회를 시작할 때 기도로 시작했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들의 공로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의 실패와 한계도 명확하다. 그들의 공로를 아무리 강조해도 대한민국은 기독교 국가가 절대 될 수 없으며, 민주주의나 자본주의가 하나님의 왕국(나라)를 대체할 수 있는 그 어떤 정치 제도나 사회 제도가 될 수 없다(성경이나 하나님은 어떤 특정 정치 제도를 지지하지 않으신다). 더 나아가 역사라는 것이 해석의 주체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런 식의 역사 해석에 대한 동기가 무엇인지 궁금해질 때가 많다.

좌파냐? 우파냐? 이젠 더 이상 그런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수님이 당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 제국의 지배에서부터 구출과 해방을 기대하며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지만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당신의 왕국을 역사 속에 드러내시고 완성해 가시는 것처럼, 인간이 만들어 놓은 어떤 정치 제도가 하나님의 왕국이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의 일시적인 대행자는 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왕국은 아니라는 점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역사는 그냥 역사일 뿐이다.

2018년 새 해의 다짐과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