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에 정답은 없다

개척을 하고 만난 목회 환경은
머리로만 생각했던거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웠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도 많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도 다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생기니
거의 모든 개척교회들이 어려웠다.
겉으로 보이는 문제들은 대충 비슷했지만
심층으로 들어가면 다 달랐다.
사람이 다르고, 대상이 달랐고,
그 안에서 생기는 역동이 달랐다.

누구는 하드웨어 때문에
누구는 소프트웨어 때문에
누구는 휴먼웨어 때문에
힘들고 어렵고, 실패와 도전을 반복했다.

하지만 정해진 정답은 없다.
목회에 성공한 분들이 무슨 세미나를 열고
자신의 경험들을 책으로 출판해서
마치 지니의 요술 램프처럼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될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 성공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이나 스킬이 아니다.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목회 신학과
성경이 말씀하시는 본질(핵심)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사역 가운데
풀어내는 순종과 성품과 관계가 중요하다.

그 다음 결과는 절대 사람의 몫이 아니다.
우리가 뭐라고 사람을 바꿀 수 있으며,
우리가 뭐라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다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이상의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가 부르신 곳에서, 맡기신 영혼들을
최선을 다해, 겸손히 섬기는 것이다.
보내신 곳에서 복음을 포기하지 않고 나누며,
제자 삼는 사역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사역들을
감당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당장 없어 낙심할 순 있지만
그냥 묵묵히 한 방향으로 오랜 순종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

즐거이 사역하다가 기꺼이 잊혀지게 하소서

지역교회의 일반적이고 평범한 목회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와 제주도 교회를 섬기고 싶다는 거창한 소망으로 북 카페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속도가 너무 더디다. 뭘하든 다 돈이기 때문이다. 두둑한 잔고를 통장에 쌓아 놓고 시작하는 것이라면 마음이라도 편할텐데 없는 돈을 짜내어 진행하다보니 속도가 너무 너무 더디고 힘들다. 거기에 걱정하시는 부모님과 지인들 –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걱정 하시는지 나도 잘 안다. 돌다리도 두드리는 성격인데 나인들 수 백번 계산해 보고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제주도에 넘쳐나는 것이 카페이고 펜션이고 망해 나가는 것이 카페이고 펜션인데, 또 하나의 카페를 시작한다고 하니 다들 걱정을 하시는 것이 당연하다. 나도 내가 걱정스럽다.

또 다른 반응은 과거에 다 해 보았다는 것이다. 뭐 제주도에서 이런 저런 사역들 다 시도해 보았는데 거의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것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부분이다. 기독교인 숫자도 작고, 교회들도 미자립 교회가 수두룩하고, 어떤 강사를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와도 사람들이 안 모인다. 아카데미 사역을 고민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잘 배우려고 하지 않는데 뭐가 되겠는가? 이렇게 저렇게 막막할 뿐이다. 요 며칠 동안 머리가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하나님 왕국, 선교적 교회, 북카페, 아카데미 사역, 네트워크, 공동체… 참 멋있는 단어들이지만 현실에서는 너무도 형이상학적 단어들이다. 진행하면 할수록 참 현실과는 동떨어진 개념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가야 한다. 망해도 실패해도 가야 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이 되고, 실패자라는 주홍글씨가 붙여져도 어쩔 수 없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가는 것이 맞다. 불확실한 것이 가득하고,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 주님이 가자고 하면 따라가야 한다. 그것이 제자의 본분이다. 환경이 불안함을 증폭 시키지만 주님의 샬롬을 구하며 계속 주님께 발걸음을 맞추어야 한다. 은행의 잔고도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묵묵히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길에 서 있느냐는 것이다. 사역의 열매, 성공의 유무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 오늘도 주님을 따라 하나님 왕국을 위한 모험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가?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과 제자도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8:27~9:1

  1.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으로 가신다. 그리고 그 지역 여러 마음을 돌아다니신 후에 길에 앉으셔서 질문을 던지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동안의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 안에 퍼진 소문들과 평가들에 대해서 물으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사람들이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한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혹은 여러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신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제자들의 생각을 물으신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란 메시아 곧 그들이 그도록 기다리던 구원자를 의미한다.
  2.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런 대답을 들으신 후에 지금까지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으신 이야기(비밀)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바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받아 죽임당했다가 3일 만에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정체에 대해선 계속해서 함구할 것을 요구하셨지만 자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하고 다시 부활할 것인지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하시는 것이다. 아마 이런 예수님은 당황스러운 가르침이 제자들에게 굉장한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자 다시 베드로가 나선다. 원어적으로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박도 만만치 않다. 방금까지 신앙 고백을 하면 따뜻했던 상황은 사라지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갑분싸!’가 되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3.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어쩌면 마가복음을 통해서 소개되고 있는 이상한 예수님의 언행에 대해서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빛과 어둠이 명확하게 갈리게 된다. 누가 빛 가운데 있는지, 누가 어둠 가운데 있는지가 명확해진다. 예수님은 진리로 오셨다. 그래서 누가 진리를 따르는지, 누가 진리를 따르지 않는지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정확하게 구분된다. 지금 하나님이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시는지,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며 성취하시는지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는 자이다. 반대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는 사람의 일을 추구하는 자이다. 그가 아무리 종교적인 행위를 많이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거나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4.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신다. 그것을 우리는 제자도(discipleship)라고 부른다. 그럼 제자도의 핵심은 무엇인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어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자기 생명을 무엇과 맞바꾸겠느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일, 사람의 생각, 사람의 계획과 판단을 부인하고 버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일을 따를 수 없다. 거기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 존재한다. 이 역설은 뒤에 나오는 하나님의 왕국(나라)와 연결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이 땅에 역설로 임하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5. 마가복음은 제자도를 하나님의 왕국(나라)와 연결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제자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바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 가운데 죽기 전에 하나님 왕국(나라)가 능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이 있다.” 이것에 대한 해석은 여러 의견이 있다. 바로 뒤에 이어질 변화산 사건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는 사건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오순절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확산되는 사건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것이 맞고 틀리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사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이다. 이후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을 것과 아버지께 돌아갈 것을 계속해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후의 모든 사건을 말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6.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 왕국이 능력으로 임할 것이라는 것이다. 근데 그 왕국은 뒤집어진, 역설로 존재하는 왕국이다. 하나님의 왕국 자체가 역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 왕국의 원리와 존재 방식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을 입고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 왕국과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왕국의 백성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자는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왕국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이다. 그렇게 버릴 때 다시 얻을 수 있다. 버리지 않고 움켜쥐는 사람은 이 세상에선 부와 성공과 명예를 얻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 왕국에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삶은 부인하고 버리는 삶이다. 어리석게 보이고 미련하게 보이지만 영원한 것,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다.
  7.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제자의 삶은 이 세대의 가치와 정신, 유행을 따르지 않는 삶이다.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세대 사람들은 하나님 왕국의 가치와 진리, 삶의 방식들에 대해서 어리석다고 말하며 부끄러워할 것이다. 특히 절대자 신이란 존재가 가장 연약하고 무능력하게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정말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가 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는 방식이고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는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그런 삶의 선택들 때문에 조롱과 멸시와 핍박을 받는다해도 제자는 그런 삶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반전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하나님 왕국의 가치를 부끄럽게 여긴 사람은 하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이 말은 반대의 상황도 일어난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복음 때무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사람들은 하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명예와 칭찬과 인정, 격려와 지지를 받을 것이다.
  8. 정리하자. 예수님은 두 가지 십자가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제자들의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과 구속의 십자가이다. 하나님이 창세 때부터 세우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한 십자가이다. 제자들의 십자가를 전혀 다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their cross)라고 부르신다. 이 십자가는 대속과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우리들의(제자들의) 십자가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져야 하는 삶의 방식(하나님 왕국의 가치와 원리, 라이프 스타일)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제자도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제자도는 자신을 부인함으로 시작된다.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사람의 일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지만 여전히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죄송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사탄이라고 부른다. 진짜 제자는 자신을 온전히 부인하고 예수님 안에 이루신 그리고 이루어 가시는 구원의 역사를 위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자이다.

진짜 목자가 나타났다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6:30~44

  1. 예수님의 파송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사도들의 보고를 들은 예수님은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며 쉼을 가지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아 다님으로 인해 도저히 조용히 앉아 식사 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사람이 없는 외딴 곳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 그런데 그렇게 제자들을 데리고 떠나는 것을 보고 여러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이 달려나와 예수님이 가서 쉬려고 했던 곳에 이미 와 있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미 도착해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들 같이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시 시작하셨다.
  2. 그러다가 날이 저물어 가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한 가지를 제안한다. “이곳은 빈 들인 데가 시간도 벌써 많이 늦었습니다. 사람들을 보내 가까운 마을이나 동네에 가서 각자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시지요.”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에게 대답하신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에상치 못한 예수님의 대답에 제자들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들은 빨리 머리를 굴려 계산을 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200데나리온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이런 제자들의 계산이 틀렸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들에게 기대하신 반응은 아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으신다. 그들은 지금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었다.
  3.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들을 풀밭에 무리를 지어 앉도록 명령하신 하시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하신 후에 빵을 떼시며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물고리 두 마리도 그렇게 하셨다. 그때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성인 두 명이 먹기도 부족한 음식을 가지고 남자 어른만 5,000명을 먹이고도 남은 음식이 12바구니에 가득 찼다. 이것은 흡사 성만찬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은 모습을 연상케 한다. 더 나아가 푸른 풀밭에서 자신에게 나온 양떼를 풍족하게 먹이는 목자와 같다(시편 23편을 연상케 한다). 한 가지 조심해야할 것은 너무 영적으로만 해석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언제나 균형을 잘 잡으신다. 자신에게 몰려온 사람들에게 말씀도 가르치셨지만 그들이 육체적인 필요도 채워주셨다.
  4. 그 앞의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의 균형을 발견할 수 있다. 전도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사도들을 격려하고 피드백을 나눌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음식을 먹으며 쉼을 가지기 원하셨다. 예수님은 일에만 몰두하시는 분이 아니셨다. 육체의 한계를 잘 아셨고, 안식과 쉼의 필요성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계셨다. 더 나아가 육체적인 쉼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나눔도 생각하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자신에게 몰려오는 많은 사람들을 피해 외딴 곳으로 피정하셨다. 물론 그것마저도 좇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시간을 가질 수 없었지만 예수님에게는 분명 균형잡힌 영성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도 정치적인 왕국도 아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 정서적 육체적인 왕국이다.
  5. 한 가지 더 생각해야할 부분은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이다. 당시 갈릴리 지역의 경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예수님께 몰려온 사람들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제자들도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안 되었고, 몰려온 사람들에게도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심지어 그 사람들이 가까운 동네에 간다고 그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먹일 수 있는 시설이나 음식이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다. 제자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머리를 굴려 계산하는 것이다. 그들을 먹이려면 적어도 200데나리온이 필요했다.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으니 200데나리온은 절대로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럴만한 돈도 없었고, 있었다고 해도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몰려온 사람들 대부분이 하루에 한끼를 먹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니 스스로 해결할 수도 없었다.
  6. 그때 하나님이 일하신다. 인간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하신다. 인간의 계획과 계산, 판단을 뛰어넘어 일하신다. 대신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다. 그냥 하시지 않고 인간의 헌신과 수고를 통해서 일하신다.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의 재료가 된다. 다시 말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신 것이 아니라 아주 적은 유에서 많은 유를 만들어 내신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그많은 사람들의 먹을 것을 직접 해결해 주라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도 그정도는 아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인간의 작은 헌신을 통해서 일하시겠다는 것이다. 하찮고 작은 것이지만 누군가의 헌신을 통해서 그것을 재료로 삼아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시겠다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 내놓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주님의 몫이다.
  7. 예수님의 이렇게 행하신 동기는 긍휼이다. 긍휼이란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한다. 즉 자신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애정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자신 앞에 몰려온 사람들의 상태와 필요를 하셨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고, 그들을 지금 돌려보낸다고 어디서 음식을 해결할 수 없음도 아셨다. 그렇다! 주님은 다 아신다.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그들이 필요가 무엇인지 아신다. 그리고 누구보다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움직이시고 일하신다. 그 일하심의 결과는 항상 풍성함이다. 모자람이 없다. 부족함이 없이 채우시고 남기신다. 이 원리는 지금도 동일하다. 주님은 제자들의 작은 헌신과 순종을 통해서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영적인 육체적인 필요를 채우기를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