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 :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자 (2)

성경이 말씀하시는 ‘의’는
언약과 율법(계명)과 밀접하게 연결되며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경제적 관계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공평과 정의이다.

우리가 잘 아는 샬롬은 그러한 공평과 정의,
하나님의 의를 기반으로 세워지는 관계를 말한다.
이 개념이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면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자비와 긍휼로 연결된다.

그래서 팔복의 네 번째가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며,
다섯 번째가 ‘긍휼히 여기는 자’이고,
일곱 번째가 ‘화평(샬롬)케 하는 자’이다.
이것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고, 분리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자신의 삶속에서 긍휼을 베푸는 자이며,
동시에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리의 문제는
그 ‘의’를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했고,
내면화 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덧입는 의를
그저 의롭다는 (일방적인) 선언과
죽어서 천국 가게 만드는 것으로만 가르쳤다.

아니다. 팔복과 산상수훈에서 강조되는 의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과 연결된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한 개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임하시고, 그 삶을 변화 시키지만.

그것으로 절대 끝나지 않는다.
삶의 모든 관계 안에서, 삶의 모든 현장 속에서
공의와 거룩에 기반한 긍휼로 흘러가게 되고,
공평과 온전함을 향한 샬롬(화평)으로 드러난다.

그것이 팔복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이다.

그 의는 자신의 가난함을 인정하고, 애통해 하며,
자신의 깨어지고 망가진 삶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께 반응(온유함과 겸손)할 때,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통해 알게 되는
하나님 통치의 온전한 모습과 상태이다.

그러므로 가난과 애통과 온유함으로 반응할 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될 수 있다.
인간의 노력, 선택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인정하고,
깨어진 상태를 아파하며,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온유함으로 나아가는 자만이
느끼게 되는 갈망이며 목마름이자 배고픔이다.

사람을 키우는 사람

가정교회로 개척을 하고
힘든 시간을 보낼 때의 일이다.

하는 일마다 안 되고, 교인들도 재정도 없고,
번듯한 예배당도 없어 기존 교회처럼
주중에 이런 저런 예배나 모임 조차 할 수 없고,
겨우 주일예배 딱 한 번만 드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내 자신이 무척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목사로서 하고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일에 가정을 오픈해서
(가족들을 제외하고) 다섯 손가락도 안 되는 교인들과
예배를 드리고 점심식사를 나누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러 채널을 통해서 가정의 필요들을 채워주셨다.
그런데 나는 그런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너무 불편했고 싫었다.
왜냐하면 그런 채우심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신실하게 공급하셨다.
그러면서 나를 계속 설득하셨다.
“그것이 은혜다. 나는 너의 아버지다. “,
“나는 사역보다 너와 너희 가정이 더 소중하다.”,
“너가 무엇인가 받을만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너가 내 아들이기 때문에
너의 필요를 채워준다.”

하나님은 사역보다, 결과보다
사람을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이시다.
사람들은 일의 결과로 판단하고 가치를 따지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더 소중하게 여기신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키우는 것에 있다.
그것을 위해 비효율적으로 재정을 쏟아부으시고,
환경과 사람들을 사용하시며,
계속해서 시간을 허비하시며 참고 기다리신다.

오늘 어느 분이 로이 카페에 대해서 물으셨다.
카페를 운영하는 목적이 무엇이고
왜 그런 식으로 운영하냐고.
(카페 운영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할 수 없다)

나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것이라고!
만약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카페를 이런 식으로 운영하면 안 된다.
하지만 카페를 열어주실 때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돈도, 사역도 아닌 사람이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렇게 하다가 카페가 문을 닫고 망해도
나는 괜찮다. 후회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했고,
돈보다 건물보다 여러 가지 물건들보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기회를 주고,
새로운 도전들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 한 사람이 꿈을 실행해 보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을 시도함으로서
한 발자국 성장할 수 있었다면,
하늘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했기에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늘 아버지는 사람을 세우시는 분이시다.
더불어 우리들을 동일하게
사람을 세우는 사람으로 부르신다.

팔복 :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자 (1)

산상수훈과 팔복을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단어가 두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이고,
둘째는 ‘의'(Righteousness)이다.
 
특히 ‘의’가 중요한 핵심 단어이자 개념이다.
문제는 전통적으로 ‘의’라는 단어를 ‘칭의’라는 개념과
연결해서 이해하고 해석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질문해야 한다.
산상수훈에, 팔복에 나타난 ‘의’가
칭의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정당한가?
 
칭의[稱義]란 말 그대로 의롭지 못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공로)로,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산상수훈과 팔복에
그런 칭의적 개념이 들어가 있는가?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가장 먼저 답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예민하고 민감한 문제이다.
잘못하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문제 제기는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강조하였던 칭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질문의 본질은 “산상수훈(주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바울의 가르침으로 소급해서 해석하는 것이 정당하고,
산상수훈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인가”이다.
 
산상수훈에서는 ‘의’를 부여/제공 받는 것으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는 외부에서 유입된다는 개념은 전무하다.
대신 산상수훈에서 강조하는 의는 행해야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마태복음 5: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옛관점이냐 새관점이냐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런 논쟁을 떠나 정직하게 산상수훈을 읽어나갈 때
우리는 예수님이 그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도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의가 무엇인지 듣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구현되고 임할 때 나타나는 특징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통해 행해져야 하고
이 땅에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부여 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행해져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저 예수님의 공로와 믿음으로 부여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으로 보여져야 하고, 행해져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는 개념과 연결된다.
다시 마태복음 6:33을 보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따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나타나고 보여지는 모습이다.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통치하고 다스리실 때,
그 통치를 받은 백성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고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산상수훈과 팔복에서 강조하는 ‘의’이다.

팔복 : 긍휼히 여기는 자

팔복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이다. 
물론 그 복 하나 하나가 귀하고 소중하다. 
하지만 팔복의 복들은 독립적으로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덟 개의 복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보완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삶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말씀하신다.
 
그 중에 다섯 번째 복이 ‘긍휼’이다.
긍휼은 가난, 애통, 온유, 주리고 목마름의 복
다음에 위치되어 있다.
 
앞에서 나누었듯이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다룬다.
 
긍휼은 그 네 가지를 다룬 다음이다.
그렇다면 왜 긍휼이 다섯 번째일까?
긍휼은 마치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긍휼은 ‘방향성’의 문제를 다룬다.
 
다시 풀어서 설명한다면,
가난, 애통, 온유, 주리고 목마름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진다.
 
자신의 가난을 인정하고 애통할 때,
사람과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 분에게 반응할 때,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반응할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채우시고
성장 시키시는 아버지의 손길을 경험케 된다.
 
그리고 그 채움과 성장이 바르게 가고 있는지,
올바른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긍휼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아가고, 닮아 간다면!
그 사람에게 긍휼의 열매가 맺혀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 분을 깊이 경험하고 있다고 말은 하면서
다른 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긍휼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안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가?
내 안에 하나님 아버지/어머니의 마음이 있는가?
내안에 그 분의 눈물이 있고, 깨어짐이 있는가?
있다면 바르게 가고 있는 것이고,
없다면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긍휼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나침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