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독재? 나쁜 독재?

시간이 지나면,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좋은 독재? 나쁜 독재? 그런거 없다. 경재만 잘 살게 해주면 독재도 좋은 것이 되냐? 그것이 구 시대의 사고이다. 이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구 시대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놀랍게 변화하는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가 되어 온갖 부와 명예, 권력을 독자치하고, 적지 않은 국민들은 그저 경제적으로만 잘 살게 해주면 된다는 식의 사고에 빠져 그런 논리와 독재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이 나라가 불쌍하고 불쌍하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교계까지 이런 사고와 논리가 가득하다. 구 시대적 패러다임으로 전도를 하려고 하고, 구 시대적 사고로 교회 개척을 외치고, 구 시대적 사고로 신앙생활을 설명하려고 하니 성경도 왜곡되고,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다. 진리에 대한 탐색도 문제이고, 그 진리를 적용하는 방법에도 오류가 너무 많다.

오피니언 리더들이 너무 구닥다리다. 그들은 정말 ‘오피니언 리더’가 되지 말아야 하는데, 옛날에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여전히 기득권을 가지고 여전히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참 대한민국 불쌍하다. 사람이 이렇게 없냐? 리더가 이토록 없냐? 불쌍하다 대한민국, 불쌍하다 한국 교회!

세월호 5주기를 맞이하며

심리학이나 상담학에서는 죽음/슬픔/애도를 수용하고 그 과정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에 대해서 5단계로 설명하였다.

1단계 : 충격과 부정 Shock and Denial
2단계 : 분노 Anger
3단계 : 우울 Depression and Detachment
4단계 : 대화와 타협 Dialogue & Bargaining
5단계 : 인정(수용) Acceptance

최종적으론 ‘의미 있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Return to Meaningful Life).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최종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선 앞의 다섯 단계를 충분히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가 가르치거나 주입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정과 분노, 우울과 대화 그리고 인정/수용의 과정을 충분히 거칠 때, 그 시간과 과정을 통해서 각자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찾게 된다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한국 교회는 이런 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뿐 아니라, 너무나 성급하게 최종적인 대답을 억지로 가르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감정은 충분히 다루어져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함께 울어주고, 아파하고, 그 자리에 그들과 함께 해 주는 것이다.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말고, 종교적인 해답을 주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며 그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목회자와 교인들은 슬픔이나 분노 등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항상) 기뻐해야 한다는 잘못된 신화에 빠져 그런 감정 자체를 거부한다. 그만큼 인간에 대한 그리고 마음과 감정에 대한 이해가 깊이 깊지 못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감정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고, 그런 감정을 느끼도록 창조하셨다. 그리고 감정은 손바닥 뒤집듯이 손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지 벌써 5년이 지났다. 하지만 바뀐 것은 거의 없는듯 하다. 고통과 슬픔을 다루는 교회 또한 달라진 것이 거의 없는듯 하다. 인간과 삶에 대한 대한 신학적인 성찰이나 반성보다는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가기에 급급하다. 여전히 눈에 보이는 속도와 성장만을 부르짖는 소리들이 들릴 뿐이다.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 그리고 그것을 품어줄 수 없는 교회. 그것이 오늘도 발을 내딛고 살아가야 하는 조국의 현실이다. 답답하다. 하지만 가슴만 치며 살아갈 순 없다. 그 깨어지고 멍든 가슴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오늘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또 하루의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즐거이 사역하다가 기꺼이 잊혀지게 하소서

지역교회의 일반적이고 평범한 목회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와 제주도 교회를 섬기고 싶다는 거창한 소망으로 북 카페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속도가 너무 더디다. 뭘하든 다 돈이기 때문이다. 두둑한 잔고를 통장에 쌓아 놓고 시작하는 것이라면 마음이라도 편할텐데 없는 돈을 짜내어 진행하다보니 속도가 너무 너무 더디고 힘들다. 거기에 걱정하시는 부모님과 지인들 –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걱정 하시는지 나도 잘 안다. 돌다리도 두드리는 성격인데 나인들 수 백번 계산해 보고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제주도에 넘쳐나는 것이 카페이고 펜션이고 망해 나가는 것이 카페이고 펜션인데, 또 하나의 카페를 시작한다고 하니 다들 걱정을 하시는 것이 당연하다. 나도 내가 걱정스럽다.

또 다른 반응은 과거에 다 해 보았다는 것이다. 뭐 제주도에서 이런 저런 사역들 다 시도해 보았는데 거의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것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부분이다. 기독교인 숫자도 작고, 교회들도 미자립 교회가 수두룩하고, 어떤 강사를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와도 사람들이 안 모인다. 아카데미 사역을 고민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잘 배우려고 하지 않는데 뭐가 되겠는가? 이렇게 저렇게 막막할 뿐이다. 요 며칠 동안 머리가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하나님 왕국, 선교적 교회, 북카페, 아카데미 사역, 네트워크, 공동체… 참 멋있는 단어들이지만 현실에서는 너무도 형이상학적 단어들이다. 진행하면 할수록 참 현실과는 동떨어진 개념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가야 한다. 망해도 실패해도 가야 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이 되고, 실패자라는 주홍글씨가 붙여져도 어쩔 수 없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가는 것이 맞다. 불확실한 것이 가득하고,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 주님이 가자고 하면 따라가야 한다. 그것이 제자의 본분이다. 환경이 불안함을 증폭 시키지만 주님의 샬롬을 구하며 계속 주님께 발걸음을 맞추어야 한다. 은행의 잔고도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묵묵히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길에 서 있느냐는 것이다. 사역의 열매, 성공의 유무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 오늘도 주님을 따라 하나님 왕국을 위한 모험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가?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

Overlap : 성전, 율법학자들을 통해 한국 교회를 본다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2:35~44

  1. 예수님은 성전을 척결하신 후에 계속 성전에 머무르시며 사람들을 가르치신다. 오늘 내용은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35~37절은 메시아(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주’(Lord)이시다. 38~40절은 사람들 앞에서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41~44절은 과부의 작은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이 모든 이야기가 성전 안에(정확히 말하면 성전 바깥뜰)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2. 예수님은 먼저 율법학자들이 메시아(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반박하신다. 그 근거로 제시하시는 것이 다윗의 시편인 110:1이다. 다윗의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네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여기서 전자의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하고, 후자의 ‘내 주’(히브리어로 ‘아도니’)는 하나님의 왕국을 완성할 메시아를 의미한다. 율법학자들은 그 분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그 분을 ‘내 주’(아도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기 보다는 다윗의 자손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박하신다.
  3. 이어서 그들의 잘못된 삶의 태도와 교만, 종교적인 권력을 쥐고선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모습에 대해서 지적하신다. 율법학자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며, 시장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 또한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잔치에 윗 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당시 옷이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다. 긴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옷을 입고 시장(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을 걸어다니면 사람들은 그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그들은 그런 것을 매우 즐겼다. 더 나아가 회당과 잔치에서 가장 높은 자리,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다. 그 자리에는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 종교적으로나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 앉는 자리이다.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고 존경을 받으며, 높임 받기를 좋아했다. 여기서 좋아했다는 것을 그것을 추구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4. 더 큰 문제는 그런 권력과 명예를 가지고 사회적인 약자들을 착취하고 탈취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과부(구약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회적인 약자)의 집을 삼킨다. 당시 집이란 전재산을 의미한다. 그것도 과부의 집이니 그렇게 좋은 집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과부의 유일한 재산인 집을 빼앗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또한 자신들이 얼마나 종교적으로 괜찮은 사람인지를 드러내기 위해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길게 기도한다. 그것을 통해서 종교적인 인기와 영향력을 얻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율법학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더 클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사람들은 속일 수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종교적인 권력을 확보하고 그것을 가지고 남이 모르게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 아신다. 하나님은 그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게 심판하신다.
  5. 그 다음 이야기는 그런 율법학자들이 무시하고 착취했던 과부의 헌금 이야기이다. 마가복음은 의도적으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집어넣음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며,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악행이 어느 정도인지를 더 확실하게 드러낸다. 예수님은 성전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 사람들이 그곳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와 신앙과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큰돈을 넣었다(큰돈 넣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아주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렙돈 동전 두 개 곧 1고드란트(가장 작은 단위의 로마 동전으로 그 가치는 1데나리온의 64분의 1에 해당, 1데나리온은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이다)를 넣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헌금을 드렸다. 그들은 모두 풍족한 가운데서 드렸지만 이 여인은 가난한 가운데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
  6.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돈의 액수가 아니다. 누가 진정한 헌금을 하나님께 드렸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돈의 액수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드리는 사람의 마음과 태도를 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예수님 당시의 성전과 그것을 배후로 종교적이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힘을 가진 세력들 – 오늘은 대표적으로 율법학자들이 등장한다 – 의 모습이 어떠했으며, 그들이 어떻게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했는지를 고발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더불어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한 가지 오늘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본문의 모습과 현재 한국 교회의 모습이 오버랩이 된다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의 모습 속에서 한국 교회 종교 지도자들(대표적으로 목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화려한 예배당과 엄청난 사역들과 헌금들, 그 가운데 종교 지도자들이 큰 권력을 소유하면서 교인들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모습들이 자꾸 오버랩 된다. 우리는 그런 것에 금방 속아 넘어가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기준과 마음은 우리와 전혀 다르다.
  7. 한국 교회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그래서 우리가 세워놓은 그 멋진 예배당에서 예수님이 거닐고 계신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그때의 그들과 지금 우리들과 다를까? 비난을 받을까 칭찬을 받을까? 더 큰 심판이 있을 것라고 말씀하실까? 과부의 헌금과 같이 격려하시고 칭찬하실까? 마음에 큰 두려움이 밀려온다. 나름 그런 시스템과 구조 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여전히 내 안에 그런 사고와 가치와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실패를 통해 낮아지고 비운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 그 자리에 앉고 싶고, 그런 대우를 받고 싶고, 그런 풍족함을 누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한 자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을 찾으시는 주님의 시선이 나를 계속 붙들어 주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