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요즘 가장 큰 부담감과 기도의 제목은 성경과 하나님을 바르게 전하고 살아내는 것이다.

지난 주에 교회 공동체에 새롭게 오신 두 분의 새가족 자매님들과 식사 후에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중에 한 분은 이미 교회생활을 경험해 보신 분이셨다. 그런데 그 분 안에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신앙생활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대화 중에 느꼈다. 참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한국 사회 그리고 한국 교회는 조정과 통제가 심한 집단이다.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정죄감을 심어줌으로 그들을 쉽게 조정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것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편하고 빠른 방법이다. 그러나 성경적이고 건강한 신앙(인격적이고 건강한 삶도 마찬가지)은 절대 조정과 통제, 두려움과 정죄감으로 주입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를 심어줄 뿐이다.

종교성과 신앙은 다르다. 종교성을 심어줄 순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자발적이고 건강한 신앙은 그런 환경과 토양 안에서 만들어 낼 수 없다. 우리는 다시 왜곡된 하나님을 바르게 가르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잘못된 성경 해석과 그 가르침을 걷어내고 풍성한 성경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성경을 다시 바르게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요즘 한국교회의 사명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학도, 목사로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기존 성도들이건 비신자들이건 하나님과 성경을 너무 많이 오해하고 있고 오용하고 있으며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오랜 시간동안 쌓여온 것이기에 한 순간에 해결될 순 없지만 지금이라도 건강한 것을 심어야 한다. 그래야 1년, 5년, 10년 후에는 건강한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과 제자도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8:27~9:1

  1.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으로 가신다. 그리고 그 지역 여러 마음을 돌아다니신 후에 길에 앉으셔서 질문을 던지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동안의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 안에 퍼진 소문들과 평가들에 대해서 물으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사람들이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한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혹은 여러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신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제자들의 생각을 물으신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란 메시아 곧 그들이 그도록 기다리던 구원자를 의미한다.
  2.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런 대답을 들으신 후에 지금까지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으신 이야기(비밀)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바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받아 죽임당했다가 3일 만에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정체에 대해선 계속해서 함구할 것을 요구하셨지만 자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하고 다시 부활할 것인지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하시는 것이다. 아마 이런 예수님은 당황스러운 가르침이 제자들에게 굉장한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자 다시 베드로가 나선다. 원어적으로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박도 만만치 않다. 방금까지 신앙 고백을 하면 따뜻했던 상황은 사라지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갑분싸!’가 되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3.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어쩌면 마가복음을 통해서 소개되고 있는 이상한 예수님의 언행에 대해서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빛과 어둠이 명확하게 갈리게 된다. 누가 빛 가운데 있는지, 누가 어둠 가운데 있는지가 명확해진다. 예수님은 진리로 오셨다. 그래서 누가 진리를 따르는지, 누가 진리를 따르지 않는지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정확하게 구분된다. 지금 하나님이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시는지,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며 성취하시는지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는 자이다. 반대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는 사람의 일을 추구하는 자이다. 그가 아무리 종교적인 행위를 많이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거나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4.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신다. 그것을 우리는 제자도(discipleship)라고 부른다. 그럼 제자도의 핵심은 무엇인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어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자기 생명을 무엇과 맞바꾸겠느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일, 사람의 생각, 사람의 계획과 판단을 부인하고 버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일을 따를 수 없다. 거기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 존재한다. 이 역설은 뒤에 나오는 하나님의 왕국(나라)와 연결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이 땅에 역설로 임하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5. 마가복음은 제자도를 하나님의 왕국(나라)와 연결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제자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바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 가운데 죽기 전에 하나님 왕국(나라)가 능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이 있다.” 이것에 대한 해석은 여러 의견이 있다. 바로 뒤에 이어질 변화산 사건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는 사건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오순절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확산되는 사건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것이 맞고 틀리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사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이다. 이후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을 것과 아버지께 돌아갈 것을 계속해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후의 모든 사건을 말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6.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 왕국이 능력으로 임할 것이라는 것이다. 근데 그 왕국은 뒤집어진, 역설로 존재하는 왕국이다. 하나님의 왕국 자체가 역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 왕국의 원리와 존재 방식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을 입고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 왕국과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왕국의 백성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자는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왕국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이다. 그렇게 버릴 때 다시 얻을 수 있다. 버리지 않고 움켜쥐는 사람은 이 세상에선 부와 성공과 명예를 얻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 왕국에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삶은 부인하고 버리는 삶이다. 어리석게 보이고 미련하게 보이지만 영원한 것,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다.
  7.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제자의 삶은 이 세대의 가치와 정신, 유행을 따르지 않는 삶이다.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세대 사람들은 하나님 왕국의 가치와 진리, 삶의 방식들에 대해서 어리석다고 말하며 부끄러워할 것이다. 특히 절대자 신이란 존재가 가장 연약하고 무능력하게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정말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가 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는 방식이고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는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그런 삶의 선택들 때문에 조롱과 멸시와 핍박을 받는다해도 제자는 그런 삶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반전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하나님 왕국의 가치를 부끄럽게 여긴 사람은 하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이 말은 반대의 상황도 일어난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복음 때무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사람들은 하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명예와 칭찬과 인정, 격려와 지지를 받을 것이다.
  8. 정리하자. 예수님은 두 가지 십자가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제자들의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과 구속의 십자가이다. 하나님이 창세 때부터 세우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한 십자가이다. 제자들의 십자가를 전혀 다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their cross)라고 부르신다. 이 십자가는 대속과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우리들의(제자들의) 십자가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져야 하는 삶의 방식(하나님 왕국의 가치와 원리, 라이프 스타일)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제자도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제자도는 자신을 부인함으로 시작된다.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사람의 일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지만 여전히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죄송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사탄이라고 부른다. 진짜 제자는 자신을 온전히 부인하고 예수님 안에 이루신 그리고 이루어 가시는 구원의 역사를 위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자이다.

세례의 남용

어제 남긴 유아 세례에 대한 글을 읽고 우려의 글을 어느 목사님이 보내오셨다. 무엇보다 먼저 귀한 마음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하다. 하지만 요즘 교회 공동체를 돌아보면 그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유아 세례뿐만 아니라 성인 세례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본인의 생각하는 문제의 핵심은 (그것이 유아 세례이든 성인 세례이든) 세례라고 하는 본질은 망각한채 종교적인 의식만 남아서 그저 교인을 만들고 교세를 늘리는 것으로만 세례가 사용 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유아 세례에 대한 신학적인 찬반은 존중한다. 비록 유아 세례가 성경에 명확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하더라도 오랜 기독교 전통 안에서 존재해 왔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수단과 방법으로서 유아 세례의 필요성과 유익을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다(목회적인 측면에서). 그러나 목회 현장에서 본인이 경험한 세례는 (대부분) 그런 것이 아니었다.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례의 남발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신교대에서 행해지고 있는 진중 세례이다.

사실 교회 공동체와 기독교 신앙생활 안에서 세례는 독특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전체 신앙생활을 통틀어서 딱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단회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교회 공동체의 회원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아무튼 교회의 정회원이 되는 유일한 조건은 세례의 유무에 달려 있다. 이렇게 보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례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의미는 매우 크다. 문제는 이런 세례가 너무 교회 안에서 남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생의 체험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그저 교회의 멤버를 만들기 위해서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세례를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조심스럽게 나누었지만, 한국 교회의 수준이 상식 이하로 떨어진 가장 결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가 세례의 남용일 것이다. 부목사로 사역 하면서 가장 안타깝고 답답했던 것이 연중 행사로 치루어지는 세례식이었다. 많은 경우 담임목사의 눈치를 보면서 숫자를 채워야 하는 경우도 많았고, 그 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도 없었다. 그저 주일예배 참석 유무와 형식적으로 치루어지는 일련의 세례 교육에 참석만 하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안 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믿음 좋은 담임목사와 부인되는 권사들은 “목사님! 그렇게 세례라도 주면 믿음이 언제가는 생겨서 신앙생활 잘 할겁니다”라는 논리로 설득을 하곤 했다.

유아 세례도 그런 연장 선상에 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세례 자체에 무슨 신비적인 힘이 있거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신앙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도 정말 웃긴 말이다(그것이 진짜 가능하다면 면죄부는 왜 안되는가?). 유아 세례를 받았다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그 아이에게 임하거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함께 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부모가 자녀를 신앙 안에서 잘 양육하고 싶다면 유아 세례와 상관 없이 그 마음으로 매일 순종의 삶을 보여주면 된다. 그런 부모의 삶을 본 아이는 하나님을 아는 축복 가운데 성장할 것이고, 나이가 되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결국 문제 해결의 키(key)는 우리 목사들이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안에 만연해 있는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건강하고 성경적인 목회신학을 가지고 목회 현장에서 아닌 것은 아니라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복음과 신앙생활의 본질에 속한 부분은 철저하게 가르치고 그 가치를 고수하기 위해 씨름해야 한다. 선배들이 그렇게 외쳤던 것처럼, 목사로 사는 것이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진짜 아니라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관행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그것을 막아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목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새로운 세대가 일어나기를]

요즘 한국 사회와 교회를 살펴보면서 한계를 많이 느끼는 부분은, 기성세대들(OB)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권한을 다음세대들(YB)에게 이양하거나 함께 동역하지 않고 여전히 권력을 붙잡고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새로운 세대들(리더들)이 일어나 창의적인 시도와 도전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OB들이 독차지 하면서 구 시대의 패러다임과 기준으로 YB들의 도전들을 재단하고 결정하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그들은 변화를 너무 싫어하고 두려워 한다).

과거 몸담았던 선교단체의 사례를 보면 (국내가 아니라 해외의 경우), OB들이 리더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경우는 많지가 않다. 그들은 대부분 뒤로 물러나서 상담과 컨설팅, 멘토링,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다. 대신 YB들이 사역과  팀의 리더가 되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도전하고 개척하는 일을 시도한다.

그러다보니 공동체가 훨씬 역동적이고 활기차다. 젊은이들의 헌신과 수고가 계속 일어나고, YB들은 OB들의 지지와 격려, 삶을 통해 배운 진리들을 공유하고 배움으로 더 단단한 리더로 세워지게 된다. 그들은 진짜 한 팀으로, 동역자로 함께 살아가게 된다.

한국은 그 반대 현상이 너무 강하다. OB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내어줄 마음이 전혀 없을뿐 아니라, YB들의 도전도 가로막고 있다. 더 심각한 상황은 그저 자신들이 이루어놓은 업적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경험과 방법만이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강요하면서.

요즘 나의 기도 제목 중 하나는 하나님께 붙들린 새로운 세대가 일어나는 것이다. 기존 체제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 새로운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새로운 사역과 개척을 감당할 수 있는 젊은 리더들이 더 많이 일어도록 기도한다. 더불어 그들을 후원하고 지지하며 멘토링 하며, 그들과 함께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영적 어른들이 더 많이 생기도록 간구하고 있다. 특히 한국 교회 안에 이런 일들이 속히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