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d Men For Christ

3일간 육지에서 귀한 사역을 경험했다. 말 그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인쳐진 남자들”을 세우는 사역이다. 2박 3일의 시간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상처들과 거룩, 사명을 살펴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함께 싸워가는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사역이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남성들의 삶이 얼마나 많이 깨어져 있고 망가져 있는지를 안다면, 이런 사역들이 한국과 조국 교회 안에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아래엔 짧은 P1 수련회(Phase 1 Experience)를 통해 느낀 몇 가지를 정리해 보았다.

1. 미국 선교단체의 공통된 특징이지만, 리더십 전부가 평범한 성도들이라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목회자들이 이끌지 않으면 사역 자체가 시작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항상 부럽다! 정말 정말 부럽다!

2. 지식 전달 보다는 액티비티(activity), 포퍼먼스(performance), 소그룹(그들은 soul group이라 부른다) 활동이 많았다는 것이다. 한국은 다분히 지식 전달 위주이다. 무엇인가를 많이 가르치고 주입 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미국인 강사들(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은 몸으로 표현하고 경험하고, 이런 저런 다양한 포퍼먼스를 하고, 액티비티를 한다.

3. 그들은 무엇보다 성령님을 환영하고 사모 했으며, 그 분의 역사와 인도 하심에 열려 있었다. 남성들의 상처와 아픔을 다루고, 그들의 삶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부여된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어떤 조직이나 강의, 체험 등 짧은 수련회를 통해서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4. 모든 사역을 자비량으로 섬기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도네이션(donation)을 받기는 하지만, 철저하게 섬기기 위한 목적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비량으로 사역을 한다. 평범한 성도들이 자신의 직업을 가지면서 선교단체를 이끌고, 자비량으로 사역을 한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5. 철저하게 팀 사역(team ministry)을 하고, 메뉴얼(manual)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진행하는 세미나에 참석하면 늘 놀라는 것이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메뉴얼로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또한 부부라든지, 리더십들이 함께 팀 티칭(team teaching)을 한다는 것이다. 그냥 한 사람이 쭉 가르치면 될 것을, 그것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함께 가르치고, 서로 보완하고, 상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6. 3일간의 수련회엔 오직 남자들만 있었다. 솔직히 이런 분위기는 익숙하지 않다. 딸만 넷이며 집에 가면 여자만 다섯이 있는 집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경과 인종과 문화를 초월해서(수련회엔 미국인과 필리핀인, 한국인이 있었다) 남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끈끈함과 우정, 공감, 아픔, 눈물, 그리고 축복과 격려, 지지를 경험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 여성이 단 한 명도 없이 이런 분위기와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7. 한국의 남성 그리스도인들을 깨우고 세우는 사역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주신 남성성을 하나님 왕국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 남성들이 일어나야 한다. 과거의 상처와 죄에 빠져 무능력 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주님의 남성들이 다시 견고하게 세워져야 한다.

진리를 살아내는 삶

진리는 치열한 교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을 변화 시키고 건강하게 세워주는 역할/기능도 해야한다. 그렇게 보면 교리란 형이상학적이고 고차원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살아가는 삶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작금의 개신교는 저급한 고등종교가 되어 삶은 사라지고 종교적인 시스템만 남아 있는 것 같다. 삶을 변화 시키지 못하는 진리는 진리로서의 힘을 상실한 것이며, 그런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종교적인 시스템으로 그것을 대체하게 된다.

건강한 삶, 건강한 관계가 없는 신앙이 판을 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건강하지 않고, 내 자신, 내 이웃과의 관계도 건강하지 않다. 여기 저기 성벽들은 무너져 있고, 많은 원수들이 마음대로 들어와 우리의 삶을 짓밟고 있다. 우리는 다시 진리로 무너진 성벽을 세우고, 성문을 달아야 한다. 이것은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고, 가치와 세계관, 경계선의 문제이기도 하다. 진리는 (건강한) 성벽을 쌓게 만든다. 그것은 (건강한) 정체성을 고양 시키고, 삶(관계)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내보내야 하는지(거절해야 하는지) 알게 해 준다. 그것은 외부의 여러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준다. 최종적으론 성문을 열어 환영과 사랑과 돌봄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을 진심으로 내어준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는 진리로 혐오와 배타와 정죄를 생산해 낸다.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어느 누구도 못 들어오고, 어느 누구도 못 나가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진리를 알고 살아내는 자의 모습이 아니다. 진리는 죄를 죄 되게 하고 그 죄를 미워하게 한다. 동시에 그 타락한 세상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내어주며 섬기고 사랑하게 만든다.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놀라운 사랑을 누리고 있기에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줌으로 진리를 보여주고 나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우리의 몸에 있는 피부이다(헨리 클라우드, 노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피부의 기능은 구분과 분리이다. 더불어 무엇을 내어보내야 하는지,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 진리도 우리 안에 동일한 역할을 한다. 진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 준다. 진리는 우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항상 닫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무엇을 수용해야할지, 무엇을 거부해야할지를 알려 준다. 다시 말하면 성벽, 성문과 같은 것이다.

요즘 한국 교회는 양극단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한쪽 진영은 성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누구도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게 만든다. 성 안쪽에 있지만 않으면 무조건 적을 간주하고 공격한다. 그렇게 해야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성 밖은 너무도 위험하고 타락한 곳이라만 가르친다. 다른쪽 진영은 성문이나 성벽 자체가 아예 없다.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환영하고 받아들인다. 적군인지 아군이지 피아식별 조차 하지 않는다. 정체성도 없고 기준도 없다. 구원 받았다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진리는 건강한 경계선과 관계를 만든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무엇보다 그런 진리가 진정으로 필요하다. 혐오와 배타를 넘어, 절대적 진리라는 것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세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 진리를 제대로 알고 경험해야 한다. 삶이 없는 고차원적인 지식만을 습득하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삶의 자리로 내려와야 하고, 삶의 문제를 진솔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런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작업이 목회 현장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부르심의 확인

오늘 신학 공부를 하겠다는 분을 만났습니다. 요즘은 이런 분을 만나면 가급적이면 하지 마시라고 권면을 합니다만, 이 분과는 아직 관계 형성이 부족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곧 기회가 되면 구체적으로 나눌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대신 평소에 생각했던 ‘부르심’을 확인하는 두 가지 전통에 대해서 나누어 보겠습니다.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한다면 (1) 개인적이고 내적인 요소와 (2) 공동체적이고 외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이고 내적인 요소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개인의 경건과 기도, 결단에 맡기는 것입니다. 뭐 성경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개인적이고 내적인 사건이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그 부르심은 공동체 안에서 확인되고 점검되어야 합니다(신약의 교회론적 입장에서). 왜냐하면 그 부르심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목적지는 세상과 공동체를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의 본질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이나 헌신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부르심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고 세상을 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동체를 통해 부르심을 확인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간단하게 말하면 공동체의 동의와 지지, 확인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일정 기간의) 특별한 과정을 통해 그것이 확인되고 점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예를 든다면, 적어도 복음전도의 열매가 있어야 하며, 영혼들을 돌볼 수 있고,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로 세워지는 열매들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교회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목장을 섬길 수 있어야 하고, 그 목장이 건강하게 재생산 되어 분가하는 열매들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속한 공동체는 그런 열매들을 확인해야 하고,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지를 일정 시간을 통해 점검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공동체가 그리고 개인들이 그런 과정들을 무시하거나 점검하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부르심은 개인의 영역으로는 존재하지만 공동체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부르심은 개인의 은사나 지적 능력의 영역으로 전락해 버렸고, 사역은 공동체와 별개의 사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부르심은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먼저는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을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 확인하는 과정도 거쳐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가 속한 공동체가 그 사람을 안수하여 세워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부르심은 절대 개인의 차원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동체를 통해서 점검되고 확인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시고, 어떤 일들을 하실 것인지를 믿는 것이 중요하다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4:53~65

  1.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계획은 명절(유월절/무교절)이 지난 후에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들(가룟인 유다의 배반)이 벌어져 명절을 앞에 두고 예수님을 급박하게 체포하게 되었다. 아마 그들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명절이 끝나면 여러 가지 음모와 계획을 세워서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예수의 제자 중의 한 명이 제 발로 찾아와서 예수를 넘기겠다고 하니 이 기회를 어찌 놓치겠는가? 그래서 급박하게 예수님을 체포하고 어설프고 엉성한, 명분 쌓기의 재판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 재판은 시작하자마자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증거도 마땅치 않고 참여한 증인들의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못했다. 적어도 율법에 의하면 두 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증인들의 증언 조차도 서로 달랐다는 말이다.
  2. 이것은 분명히 급하게 거짓 증인들을 세웠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공정한 재판에는 관심이 없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 상황들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조작하고 거짓으로 증인들을 세우고, 그냥 형식적인 절차들을 밟아갈 뿐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거짓과 미움과 증오, 자신들의 종교적 카리텔을 지키기 위한 더러운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3. 그런 억울하고 안타까운 재판의 현장 속에서 예수님은 계속 침묵을 유지하신다. 그들의 거짓 증언을 눈 앞에서 보고 듣고 있는데도, 그들의 여러 가지 고발과 질문 속에서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아무 대답도 반응도 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길을 가기로 결정하셨다. 자신을 변호할 마음이 전혀 없으시다. 다만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이다. 대제사장이 질문을 던진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인자란 다니엘서에 예언된 메시아의 호칭이다. 그 인자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을 것이며 다시 최후 심판을 위해서 오실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그들에게 던지는 예수님의 마지막 경고일지 모른다. 자신의 정체을 명확하게 드러내시고 자신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지를 정확하게 밝히심으로 말이다.
  4. 하지만 그들은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나 돌이킴이 아니라 신성모독이라고 외치며 예수를 사형 시켜야 한다고 외치며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린다.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빌미로 사용한다(왜 예수님은 그런 빌미를 제공하셨을가? 그들이 그렇게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치 못했을까?). 사형을 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도 상황을 잠잠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제공해 준 것이다. 끝까지 침묵을 지키셨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다른 질문에는 답하지 않으시다가 그 질문에 왜 그런 답을 하셔서 그들에게 그런 빌미를 제공하신 것일까? 물론 그렇다고 예수님이 거짓을 말하신 것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메시아)이시다. 다니엘이 예언한 인자로서 종말을 이 땅에 실현하실 분이시다. 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전혀 인지하지도 믿지도 않았다.
  5. 우리는 다시 예수님의 대답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구약에 약속된 그 메시아임을 인정하시곤 바로 재림과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말이다. 예수님은 종말을 실현하기 위해 오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다. 구약에 약속된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실현하고 최종적으론 그 왕국을 완성함으로 종말을 이 땅에 가져오실 것이다. 이것이 주님 앞에 가져야할 우리의 믿음이다. 이 땅의 왕국이 영원한 것 같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파국과 종말을 가지고 올 최종 심판의 주님이시다. 그것을 인식하고 주님 안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지고 온다. 지금 종교 지도자들은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 버렸다. 그들은 분명 예수님이 모든 권세를 가지고 다시 오시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때는 아무런 핑계도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이루어질 것인지를 아는 것이고 믿는 것이다. 그것이 이 땅에서의 삶을 결정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