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다른 복음

묵상한 말씀 : 갈라디아서 1:1~10

1. 오늘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5절까지는 인사와 더불어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강조 그리고 아주 간단하게 복음을 정의한다. 6~10절까지는 ‘다른 복음’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도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4절에서 복음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려고 우리 죄를 대신해 자신의 몸을 내주셨습니다.”(우리말)

2. 여기서 중요한 단어들이 있다. (가) 예수 그리스도 Lord Jesus Christ, (2) 아버지의 뜻 the will of our God and Father, (다) 이 악한 세대 this present evil age, (라) 건져냄 rescue, (마) 우리 죄 our sins, (바) 대신해… 내주셨다 gave Himself for. 복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를 이 악이 가득한 세대에서 건져내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대신 값을 지불하심)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주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지금까지 교회가 복음의 방점을 ‘대속’(우리 죄를 대신해 예수님의 몸을 내어주심)에 찍었다. 물론 옳은 것이다. 복음의 정수는 ‘대속’에 있다. 하지만 그것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한 가지 놓친 것이 있다.

3. 4절에서 복음을 간단히 정의하면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내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이 악한 세대’라는 말에는 ‘하나님의 왕국(나라)’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그것을 ‘이 세대’(this age/present agd)와 ‘오는 세대’(to come age)로 표현하고 있다(참고 엡 1:21).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이 세상의 시민이 하나님 왕국의 시민으로 건짐을 받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값을 그리스도가 대신 지불하신 목적이 단순히 죄의 용서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철저하게 이 세상의 가치와 목적을 따라 살던 사람을 건져내어 하나님 왕국의 가치와 목적을 따라 살도록 하는 것이다.

4. 문제는 갈라디아 교회가 사도 바울을 통해 전해 들은 복음에서 신속하게 떠나 다른 복음을 좇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이란 무엇인가? 다른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갈라디아서를 계속 살펴보면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른 복음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의 기쁨을 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시고 성취하신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들고 싶어하고, 사람들의 만족을 위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다.

5. 사도 바울은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 ‘종’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종이란 자신의 주관과 판단이 없는 존재이다. 주인이 시키는대로 하면 된다. 사도라는 직분도 그러하다. 이게 무슨 높은 계급이나 직급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도라는 직분을 너무 대단한 것처럼 만들어 놓았는데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복음을 위해서 택하여 보낸 사람이 사도이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에게서 난 것도, 사람으로 인해서 된 것도 아니라고 명백하게 밝힌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복음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6. 그러므로 사도나 종은 받은대로, 시키는대로 전하는 사람이고 행하는 사람이다. 보낸 자와 주인의 뜻과 말씀에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빼면 안 된다. 있는 그대로, 전해 받은 그대로를 전달하고 가르치고 나누면 된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빼면 그것이 바로 ‘다른 복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이 말씀에 자유로울까? 우리는 지금 온전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있는가?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무엇을 뺀 것은 없는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시고 성취하신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가? 전하고 가르치고 있는가? 한국 교회는 과연 온전한 복음을 전했는가? 다른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닌가?

예수님이 누구시고, 어떤 일들을 하실 것인지를 믿는 것이 중요하다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4:53~65

  1.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계획은 명절(유월절/무교절)이 지난 후에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들(가룟인 유다의 배반)이 벌어져 명절을 앞에 두고 예수님을 급박하게 체포하게 되었다. 아마 그들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명절이 끝나면 여러 가지 음모와 계획을 세워서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예수의 제자 중의 한 명이 제 발로 찾아와서 예수를 넘기겠다고 하니 이 기회를 어찌 놓치겠는가? 그래서 급박하게 예수님을 체포하고 어설프고 엉성한, 명분 쌓기의 재판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 재판은 시작하자마자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증거도 마땅치 않고 참여한 증인들의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못했다. 적어도 율법에 의하면 두 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증인들의 증언 조차도 서로 달랐다는 말이다.
  2. 이것은 분명히 급하게 거짓 증인들을 세웠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공정한 재판에는 관심이 없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 상황들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조작하고 거짓으로 증인들을 세우고, 그냥 형식적인 절차들을 밟아갈 뿐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거짓과 미움과 증오, 자신들의 종교적 카리텔을 지키기 위한 더러운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3. 그런 억울하고 안타까운 재판의 현장 속에서 예수님은 계속 침묵을 유지하신다. 그들의 거짓 증언을 눈 앞에서 보고 듣고 있는데도, 그들의 여러 가지 고발과 질문 속에서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아무 대답도 반응도 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길을 가기로 결정하셨다. 자신을 변호할 마음이 전혀 없으시다. 다만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이다. 대제사장이 질문을 던진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인자란 다니엘서에 예언된 메시아의 호칭이다. 그 인자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을 것이며 다시 최후 심판을 위해서 오실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그들에게 던지는 예수님의 마지막 경고일지 모른다. 자신의 정체을 명확하게 드러내시고 자신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지를 정확하게 밝히심으로 말이다.
  4. 하지만 그들은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나 돌이킴이 아니라 신성모독이라고 외치며 예수를 사형 시켜야 한다고 외치며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린다.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빌미로 사용한다(왜 예수님은 그런 빌미를 제공하셨을가? 그들이 그렇게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치 못했을까?). 사형을 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도 상황을 잠잠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제공해 준 것이다. 끝까지 침묵을 지키셨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다른 질문에는 답하지 않으시다가 그 질문에 왜 그런 답을 하셔서 그들에게 그런 빌미를 제공하신 것일까? 물론 그렇다고 예수님이 거짓을 말하신 것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메시아)이시다. 다니엘이 예언한 인자로서 종말을 이 땅에 실현하실 분이시다. 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전혀 인지하지도 믿지도 않았다.
  5. 우리는 다시 예수님의 대답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구약에 약속된 그 메시아임을 인정하시곤 바로 재림과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말이다. 예수님은 종말을 실현하기 위해 오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다. 구약에 약속된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실현하고 최종적으론 그 왕국을 완성함으로 종말을 이 땅에 가져오실 것이다. 이것이 주님 앞에 가져야할 우리의 믿음이다. 이 땅의 왕국이 영원한 것 같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파국과 종말을 가지고 올 최종 심판의 주님이시다. 그것을 인식하고 주님 안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지고 온다. 지금 종교 지도자들은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 버렸다. 그들은 분명 예수님이 모든 권세를 가지고 다시 오시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때는 아무런 핑계도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이루어질 것인지를 아는 것이고 믿는 것이다. 그것이 이 땅에서의 삶을 결정짓는다.

왕국 백성의 삶, 제자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Love God, Love People Mark 12:28-34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2:28~34

  1. 율법학자들이 와서 예수님과 사두개인들이 논쟁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두개인들에게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다. “모든 계명들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신다. “첫째로 중요한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네 마음과 네 목숨과 네 뜻과 네 힘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은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계명은 없다.” 그러자 이 율법학자가 대답한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말씀이 옳습니다. 온 마음과 모든 지혜와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더 중요합니다.”
  2. 이 율법학자가 던진 질문은 계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계명(곧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두 가지로 정의하심으로 대답하신다. 많은 계명들이 존재하고 다양한 가르침들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말씀을 다시 살펴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으뜸되는 본질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강조하신다. 이것이 구약의 신앙관의 핵심이다. 창조주, 전능자, 지존자, 목자, 안식처, 거룩하신 분 등등 다양하게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지만, 그 하나님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다른 경쟁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출발하며, 모든 영광과 능력과 부와 지혜와 능력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으며, 비교할 수 없고 비교될 수 없는 가장 거룩하고 지존하신 분이시다.
  3. 그런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응과 응답은 다양할 수 있다. 예배와 기도, 찬양과 경배, 헌금과 봉사 등등.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집약하신다. 그것도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마음이란 내면 세계의 모든 것을 의미하며, 목숨은 생명을 의미하고, 뜻이란 이해와 지혜, 지성을 의미하며, 힘이란 육체가 가진 능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모든 인격과 삶, 존재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신다. 형식과 구체적인 행위는 두 번째이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을 온전히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웃 사랑으로 확대되고 전이 된다. 이것은 구분될 수 없고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 사랑이 따로 존재하고 이웃 사랑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4. 이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이런 대답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재해석과 적용을 한다. 율법에 나온 번제물이나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율법학자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를 칭찬하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하나님 왕국으로부터 멀리 있지 않구나” 정확히 말하면 아직 하나님 왕국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 입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겐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는 율법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했고 깨닫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형식과 종교성에 빠져 있을 때 그는 율법이 정말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하나님 왕국에 들어가진 못했다. 바로 코 앞까진 와 있었다. 그럼 이 사람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본문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니 추측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없다는 것이다. 이 율법학자는 예수님을 여러 선생 중의 한 분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5. 율법학자는 율법의 본질을 어느 누구보다 정확히 이해했고, 그 사람 안에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 앞에 계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이심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어떤 율법적인 행위들보다 소중하고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사랑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 자신 앞에 서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마가복음에 나오는 제자도의 모습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제자도란 하나님 왕국의 삶을 의미하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삶 가운데 실현하는 방법이 마음과 묵숨과 뜻과 힘을 다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이웃들을 사람하고 섬기는 것이다. 군림하거나 머리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 종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왕국의 삶이다. 이 왕국을 이 땅에 가져 오시는 분은 예수님이시지만, 그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그 분을 따르며 왕국 백성의 삶을 사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몰라서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2:13~27

  1. 오늘 말씀은 두 가지의 상반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이 로마의 황제 가아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아닌지를 묻는 질문과 부활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되는지에 질문이다. 첫 번째 질문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이 던진 질문이고, 두 번째 질문은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던진 질문이었다. 또한 전자의 질문이 이 땅에서의 삶, 이 세상 왕국에서의 삶에 대한 질문이라면, 후자의 질문은 새 땅에서의 삶, 하나님 왕국에서의 삶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앞의 질문이 상식과 정치, 경제, 세상의 법과 관련된 질문이라면, 이어지는 질문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2. 전자의 질문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트집을 잡으려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이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와 마음의 동기를 이미 알고 계셨다.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던지는지 다 파악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데나리온 동전 하나를 가져와 보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곤 그 동전에 있는 얼굴과 새겨진 글자가 누구의 것인지를 물으신다. 당시 그 동전은 로마 제목의 화폐였기에 당연히 황제 가이사의 것이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한 마디로 그 문제를 정리하신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3. 너무도 명쾌한 예수님은 대답에 그들은 아무런 꼬투리도 잡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어쩌면 우리의 문제는 어느 것이 가이사의 것이고, 어느 것이 하나님의 것인지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왕이시다. 하지만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살고 있다. 작게는 가정에서 시작해서 조직과 민족과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렇게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이중국적을 가진 자들이다. 이 세상에도 속해 있고 하나님의 왕국에도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처럼 무엇이 세상에 속한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를 잘 분별하고 구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인들은 매우 이상한 존재와 집단들이 되어 버린다. 어쩌면 한국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의 원인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4. 후자의 질문은 그 유명한 부활 논쟁이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부활과 관련된 가장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신명기 25:5~10에 나와 있는 ‘형사취수제’(혹은 계대결혼법)를 근거로한 것이다. 이 제도는 후사가 없이 죽은 형제를 위하여 아들을 낳아 줌으로서 죽은 자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고 기업을 보존하려는 것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상황을 설정한다. 그것은 일곱 형제가 있었고, 그들 모두가 형수와 결혼했지만 자식이 없이 죽었다면 부활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식의 질문이 대표적인 상황윤리이다. 예수님은 이런 도전에 대해서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신다.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몰라서 이런 잘못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5. 그럼 사두개파 사람들은 성경을 어떻게 잘못 이해했는가? 예수님은 부활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신다. 육체를 가지고 다시 부활하는 것으로 보면 죽은 이후의 부활은 분명히 연속성을 가진다. 하지만 육체를 가지고 다시 부활한다고 모든 것이 다 연속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활한 후에는 결혼생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못 이해했는데,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죽어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게 이런 자들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6. 그리스도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영적인 삶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은 두 가지 모두를 강조한다.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오늘의 삶도 중요하고, 부활 이후의 삶도 중요하다. 그렇게 보면 부활 이후의 삶에 영적인 것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육체를 입고 부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것이 이 땅에서의 삶이든 완성된 하나님 왕국에서의 삶이든 상관이 없다. 이 땅에서의 삶에서는 건강한 상식과 기준, 세상의 법률을 인정하고 지켜야할 것은 지켜야 한다. 더 나아가 무엇이 하나님의 것인지, 무엇이 세상의 것인지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삶은 부활 이후의 삶으로 연장된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잘 구분하는 것이다.
  7. 그렇다면 이런 것을 잘 구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예수님의 대답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성경과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 성경을 제대로 바르게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 – 바리새파, 사두개인, 헤롯 당원 등 – 은 모두 성경도 잘못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하고 있었다. 바르게 아는 것, 올바로 아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알아야 바로 믿을 수 있고, 바로 믿어야 바로 살아갈 수 있다. 그 지식과 믿음의 근거는 바로 성경과 하나님이다. 성경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을 깊이 알 때 건강한 삶과 신앙생활이 가능하다. 요즘 한국 교회를 볼 때마다 적실하게 필요한 것이 이 두 가지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문제는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숙제는 성경과 하나님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