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요즘 가장 큰 부담감과 기도의 제목은 성경과 하나님을 바르게 전하고 살아내는 것이다.

지난 주에 교회 공동체에 새롭게 오신 두 분의 새가족 자매님들과 식사 후에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중에 한 분은 이미 교회생활을 경험해 보신 분이셨다. 그런데 그 분 안에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신앙생활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대화 중에 느꼈다. 참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한국 사회 그리고 한국 교회는 조정과 통제가 심한 집단이다.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정죄감을 심어줌으로 그들을 쉽게 조정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것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편하고 빠른 방법이다. 그러나 성경적이고 건강한 신앙(인격적이고 건강한 삶도 마찬가지)은 절대 조정과 통제, 두려움과 정죄감으로 주입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를 심어줄 뿐이다.

종교성과 신앙은 다르다. 종교성을 심어줄 순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자발적이고 건강한 신앙은 그런 환경과 토양 안에서 만들어 낼 수 없다. 우리는 다시 왜곡된 하나님을 바르게 가르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잘못된 성경 해석과 그 가르침을 걷어내고 풍성한 성경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성경을 다시 바르게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요즘 한국교회의 사명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학도, 목사로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기존 성도들이건 비신자들이건 하나님과 성경을 너무 많이 오해하고 있고 오용하고 있으며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오랜 시간동안 쌓여온 것이기에 한 순간에 해결될 순 없지만 지금이라도 건강한 것을 심어야 한다. 그래야 1년, 5년, 10년 후에는 건강한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기도하라!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1:20~33

  1. 성전을 척결하신 후에 그 다음 날 아침에 제자들과 함께 어제 저주한 무화과 나무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나무가 뿌리째 말라서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이 너무 신기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저주한 무화과 나무가 말라 죽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믿어라.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누구든지 저 산에서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등진 일이 있다면 그 사람을 용서해 주라. 그러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2. 먼저 이 사건이 무화과 나무에 열매를 찾으신 사건과 성전을 척결하신 사건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마가복음은 앞뒤에 무화과 나무 사건을 배치하고 그 가운데 성전을 척결하신 사건을 집어넣음으로서 의도적으로 두 사건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 이 두 사건이 하나로 연결되는 근거는 ‘기도’라는 주제가 관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모든 민족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말라 죽어있는 것을 통해서 다시 한번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기도하는 자의 두 가지 태도를 가르치신다. 첫째는 믿음이고, 둘째는 용서이다. 이것을 다시 성전 척결 사건으로 가지고 가면 그들은 단지 기도만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들에겐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없었고, 용서하는 삶을 살지도 않았다.
  3. 뿌리째 죽어있는 무화과 나무를 발견하고 신기해 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첫 마디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믿어라!” 기도의 핵심과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 없는 자들은 절대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물론 종교적인 열심으로 기도할 순 있다. 지금 예수님은 그런 종교적인 열심으로 하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절대적인 확신이다. 예수님은 이 확신을 강조하기 위해서 언어유희를 사용하신다. 이것은 산을 향해서 바다에 빠지라고 외치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 그대로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산을 옮긴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관용어인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기에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간구하고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 하나님이 이루어주신다는 것이다.
  4.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당시 유대인들이 전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너무 기도하지 않아서 기도 좀 하라고,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기도 좀 하라고 가르치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들은 하루에 몇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던 사람들이다. 누구보다 기도에 열심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믿음이 없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없었고, 어떤 기적도 능력도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전 가득하게 종교적인 언어와 소리만 가득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라고 강조하신다.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했다면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강조하신다. 더 나아가 기도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세는 용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다.
  5.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을 거닐고 계셨다. 성전을 척결하신 후에 다시 그런 일들이 성전 안에서 일어나는지 살펴보고 계신 것이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소?”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다시 질문으로 답한다. “난도 한 가지 물어보겠다. 대답해 보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느냐, 사람으로부터 왔느냐? 말해 보라.” 이 예수님의 질문은 다시 종교 지도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한다면 요한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해서 책망 받을 것 같고,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한다면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책망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잘 모르겠소”라고 대답했다. 이런 그들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도 그들에게 대답하신다. “그렇다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6.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많은 질문을 받으신다. 그 질문이 진리를 찾고 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질문이라면 진리를 계시하시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질문이라면 예수님은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어떻게 대답하든 그들은 수용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이번 권위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이다. 성전을 척결하신 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도전하신 것이다. 그들은 그런 예수님의 행동에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성전은 자신들의 나와바리(세력 범위, 세력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권위의 출처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어떻게 대답을 하든 그 대답을 통해서 예수님을 제압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해 주시지 않으신다(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마음이 1도 없다.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모든 민족들이 기도하는 집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1:11~19

  1. 어린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그리고 곧바로 성전으로 들어가신다. 마치 시찰이라도 하시듯 성전의 모든 것을 둘려보시곤 다시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나가신다. 그 다음 날 베다니를 떠나시려고 하는데 배가 고프셨다. 마침 예수님의 눈에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들어왔다. 그래서 열매가 있을까 해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지만 잎만 무성할 뿐 원했던 무화과 열매는 없었다. 왜냐하면 무화과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런 나무를 저주하신다. “이제부터 어느 누구도 네 열매를 따 먹지 못할 것이다.” 그리곤 장면은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겨진다(구체적인 내용은 내일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 말씀을 읽는 독자가 눈치가 조금만 있다면 이 무화과나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곧 다시 등장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2.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것은 왜 무화과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시즌(season, 철)도 아닌데 예수님은 열매를 기대했느냐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 점을 명확히 밝힌다. 보통 무화과 열매가 맺히는 8~9월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벌어지는 때는 3월 말경이었다. 열매가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열매를 기대하셨고, 기대했던 열매가 없다고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 하셨냐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기대하셨던 열매는 8~9월에 맺히는 열매가 아니었다. 보통 8~9월에는 가장 좋은 열매가 맺히지만, 3월 경에도 작은 열매가 열린다. 예수님이 이 점을 몰랐을리가 없다. 비록 제철이 아니지만 그래서 풍성하고 맛있는 무화과 열매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맺혀야 하는 작은 열매마저도 없는 것을 보시고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것이다.
  3.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나무에 자주 비유한다. 대표적인 나무가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무화과 나무에 열매를 기대하셨고, 기대하셨던 열매가 없음으로 인해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성전 척결’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이야기이다. 그럼 무화과 나무 사건과 이어지는 ‘성전 척결’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셜펴보자.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고 곧장 성전으로 향하신다. 그리고 바로 성전(정확히 말하면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내쫓기 시작하셨다. 마가복음에서 묘사하되는 예수님의 모습은 상당히 과격하고 폭력적이다. 예수님은 돈 바꿔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어떤 사람도 장사할 물건들을 들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지 못하게 하셨다. 아마 당시 성전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멘붕에 빠지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4. 그렇게 충격과 당혹감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집은 모든 민족들이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성경에 기록돼 있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말았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왜 예수님이 분노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성전의 본질을 두 가지로 말씀하신다. 첫째는 ‘모든 민족들’이고, 둘째는 ‘기도’이다. 성전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전은 철저하게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것도 한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열방,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그곳을 장사를 하고, 그 장사를 통해서 이득을 취하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어제 성전을 둘러보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겸손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곧장 성전의 모든 부분들을 둘러보시고 확인하신다. 그것을 통해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더러운 일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신 것이다.
  5. 그리고 그 다음 날 다시 오셔서 성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더러운 일들을 금지 시키며, 성전이 존재하는 목적을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만민이 모여서 기도하는 장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한 가지를 명확히 정리해야 한다. 이 사건의 목적이 ’성전 정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러워진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건의 목적은 ‘성전 척결’ 즉 성전의 기능을 완전히 끝내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심판하셔서 이젠 건물로서의 성전의 기능을 끝내버리신 것이다. 이것을 명백하게 보여준 사건이 그 앞에 나온 무화과 나무 사건이다. 두 사건이 연결이 되는 근거는 ‘기도’이다(내일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에 기대하셨던 열매란 기도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최소한의 열매(기도)라도 기대하셨지만 그런 열매도 없었던 것처럼, 성전 곳곳을 둘려보았지만 모든 민족이 모여서 기도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고, 이방인의 뜰(그곳이 진짜 이방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장사꾼들의 소리과 짐승들의 소리들 뿐이었던 것이다.
  6. 그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처럼, 지금 성전 안에 모든 더러운 것을 둘러엎으시고 그들을 쫓아내시며 그 장소를 통해 하나님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말씀하신다. 그곳은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과 간구와 예배와 중보의 소리가 가득한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과 귀에는 최소한의 열매도 없었던 무화과 나무처럼, 최소한의 기도 소리조차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종교적인 행위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그냥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분 안에 있는 열정과 분노가 예수님 자신을 가만히 있게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의 행위를 지켜보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고 두려웠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 놀람과 두려움이 회개로 이어졌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법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7. 이것은 비단 유대인들을 향한 심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건물로서의 성전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즌을 열어놓으신 예수님은 우리들의 몸이 성전이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움직이는 성전, 살아있는 성전으로서 동일하게 기도의 열매를 기대하신다. 이것은 기도를 무조건 많이 하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한국 교회는 그것마저도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로 전락 시켜버렸고, 세속적인 성공과 명예와 부를 얻는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지만 – 그런 점에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방인의 뜰에서 물건과 동물을 사고 파는 것을 통해 이득을 얻었던 그들과 세상의 부와 성공만을 추구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이 무엇이 다른가를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하나님은 진정한 기도와 예배를 원하신다. 자신의 욕망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왕국과 열방을 향한 그리고 그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간구와 감사와 찬양, 중보의 소리가 넘치는 살아있는 성전이 되기를 바라시고 원하신다.

믿음에 기초한 기도, 기도가 있는 믿음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9:14~29

  1. 변화산에서의 사건 이후에 산에서 내려와 보니 남은 제자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유는 어느 아버지가 귀신 들려 있는 아들을 고쳐 달라고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는데 남아 있던 제자들이 그 아이 안에 있던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자마자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신다. “이 믿음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왜 예수님 이렇게 강하게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는 것일까? 마가복음을 읽어보면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 권능을 받고 파송을 받아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내쫓는 사역을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이미 충분히 경험을 했고, 실전 훈련까지 마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2.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을 책망하신 후에 그들이 고칠 수 없었던 아이를 자신 앞으로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신다. 아이 안에 있던 귀신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아이의 몸에 경련을 일으켜 입에 거품을 물고 뒹굴게 하였다. 이때 예수님은 바로 아이 안에 있던 귀신을 쫓아내시지 않으고 그의 아버지에게 아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질문을 하신다. 그 아버지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이렇게 되었다고 설명하면서 “어떻게든 하실 수 있다면 제발 우리들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한다. 예수님은 “‘하실 수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라고 대답하신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이 바로 아이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지 않으시고 그의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지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단지 제자들의 믿음 없음 만을 지적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 믿음 없는 세대야!”라는 표현에서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3. 이 아버지는 아마 제자들이 예수님께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듣는 것을 보았을 때는 이 모든 문제가 제자들의 믿음 없음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 자신도 동일하게 믿음이 없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바로 예수님 앞에 엎드리며 자신의 믿음 없을 인정하고 믿음이 없는 자신을 도와 달라고 간절히 간청한다. 어쩌면 이것이 이 사건의 본질일 것이다. 귀신 들린 아이에게서 귀신이 쫓겨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세대 전체가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이 사건의 핵심인 것이다. 기적과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햔한 진실된 믿음만 있다면 기적과 능력은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다. 예수님은 지금 아이의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계신다.
  4. 아버지의 회개와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은 바로 아이 안에 들어가 있는 귀신을 꾸짖고 쫓아내신다. 그러자 그 귀신은 심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아이에게서 나갔다. 제자들이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꼼짝하지 않던 귀신이 예수님의 한 마디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나갔다. 이것이 제자들의 시선에는 매우 신기했던 것 같다. 왜 자신들은 되지 않고 예수님은 되시는가? 왜 자신들의 말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더니 예수님의 말씀에 귀신이 저렇게 격렬하게 반응을 하는가? 제자들은 그 일이 창피했던지 집 안에 들어가 따로 질문을 던진다. “어째서 저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그 질문에 예수님은 다시 믿음을 언급하지 않으시고, 그 이유가 기도라고 대답하신다. 그렇다면 믿음과 기도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믿음과 기도의 공통분모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이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믿음은 인간의 확신이 아니다. 기도 또한 종교적인 행위로서 얼마나 많이 하느냐의 문제를 언급하시는 것이 아니다. 믿음과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5. 우리가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된다. 기도를 많이 해라. 어느 정도의 기도가 쌓여 있어야 한다. 기도빨이 있어야 한다. 뭐 그런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그렇다고 기도를 많이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다. 제발 이런 식으로 이해하지 말자). 믿음도 동일하다. 인간의 확신의 차이를 가지고 믿음이 좋다 나쁘다 혹은 크다 작다고 말하지 않는다. 믿음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와 교제를 의미한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확신, 그 분과의 교제가 믿음의 본질이라면, 그 믿음은 기도라는 행위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가지고 그 분과 교제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과 기도는 분리될 수 없다. 믿음은 좋은데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믿음이 거짓이라는 말이다. 반대로 기도를 하는데 믿음이 없다는 것도 이상한 것이다. 진정한 기도는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6. 그렇다면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말은 기도하지 않는 세대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유대인들은(제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루를 때를 정해서 기도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기도의 행위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그들은 우리들보다 더 철저하게 기도했던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 기도가 믿음이 없는 기도였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만남이 없는 그냥 종교적인 기도였다. 그런 기도에는 능력이 있을 수 없다. 믿음이 없는 기도엔 아무런 역사가 없다. 예수님은 지금 이것을 언급하고 계신다.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기도, 그것은 믿음의 기도이다. 제자들은 그런 믿음이 없이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알아가지도 못했다. 기도가 무슨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 그 분과 교제, 그것을 통해 하늘 아버지를 알아가고 닮아가기 되기 때문에 능력이 드러나고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7. 진정한 기도는 믿음의 기도이다. 믿음의 기도는 능력이 있는 삶을 살게 한다. 단순히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 분을 알아가고 그 분과 대화하고, 그 분의 뜻을 알아가는 시간들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믿음은 인간적인 확신을 말하지 않는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향한 신뢰을 의미한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바로 그들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을 보라. 그 분은 믿음의 사람이었고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의 한 마디에 귀신을 쫓겨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