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자녀답게 자유를 누리라

묵상한 말씀 : 갈라디아서 4:21~31

1. 바울은 율법으로 사는 삶과 복음으로 사는 삶을 비교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비유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는 여종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이고, 둘째는 부인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 이삭이다. 둘 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커다란 차이점도 있다. 하갈을 통해 얻은 아들 이스마엘은 육신의 자녀이고, 사라를 통해 낳은 아들 이삭은 약속의 자녀라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의 방법으로 얻은 아들이고,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얻은 아들이라는 것이다.

2. 바울은 이것을 상징이라고 말한다. 두 여인과 두 아들은 두 가지 언약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종의 아들이고 육신으로 얻은 아들로서 율법을 상징하고, 사라와 이삭은 자유인의 아들이고 약속의 아들로서 복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길 중의 하나를 가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을 따라 종의 자녀로 살 것인지, 복음을 따라 자유인의 자녀로서 살 것인지, 또한 육신을 따라 살 것인지, 약속(성령)을 따라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처음에는 육신을 따라 종의 자녀로 살 수 밖에 없다. 마치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육신의 방법으로 자녀를 얻으려고 함으로 이스마엘을 낳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얻은 다음에는 두 아들이 한 집에 공존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육신의 자녀가 약속의 자녀를 핍박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육신의 자녀를 집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이 공존할 수 없고, 종과 자유가 함께 거할 수 없으며, 육신을 따라 사는 삶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한 몸 안에 함께 할 수 없다.

4. 약속의 길과 육신의 길은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이다. 종의 자녀로 사는 삶과 자유인의 자녀로 사는 삶도 그러하다. 하루 중에 반은 종의 자녀로 살고, 나머지 반은 자유인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완전히 종의 자녀로만 살든지, 아니면 완전히 자유인의 자녀로만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좋은 소식)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의 자녀이었던 자가 자유인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의 지배 아래 있던 자가 은혜의 지배, 성령의 지배 아래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5.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종의 자녀로 살아갈 필요가 없다. 육신을 따라 살아서도 안 된다. 그런 삶에서 우리는 완전히 해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케 되었고 해방되었으며 새롭게 되었다. 새로운 신분이 주어졌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오직 그 길로만 가면 된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되고, 돌아가서도 안 된다.

6.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유인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자들이 있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아니다. 복음의 핵심은 자유다. 더 이상 종의 자녀가 아니다. 우리는 본처의 자녀로서 자유롭게 되었다. 다시 말한다. 복음의 핵심은 자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어떤 것도 우리를 얽매이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救贖)을 받은 자들이다. 죄와 율법의 구속([拘束)을 받은 자들이 아니다.

7. 그렇다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 그것은 바로 자유를 누리는 삶이다. 사실 이 점에 대해선 할 말이 많고, 하고싶은 말이 많다. 한국 교회가 복음을 강조하고 복음을 선포했지만(물론 그 복음도 반쪽짜리 복음이긴 하지만) 그 복음으로 인한 자유에 대해선 대단히 무지하다. 오히려 신앙생활은 매우 율법적이고 유교적이다. 죄의 종들을 복음을 자유케 하여 교회의 종으로 다시 전락 시키는 일들을 하고 있다. 아니다! 복음의 핵심은 자유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만이

묵상한 말씀 : 갈라디아서 3:1~9

1. 다른 복음에 너무나 쉽게 빠진 이들을 보면서 바울은 개탄을 한다. 그들의 이런 행위들이 큰 아픔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두 가지의 명백한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이다. 둘째는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건이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후자의 사건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도 너무나 중요하지만,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건도 중요하고 확실하며 명백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2. 그런 차원에서 1~9절의 강조점은 믿음이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예로 설명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동일하게 (이방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동시에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을 함께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3. 재미 있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렇게 믿음에 대해서 강조하기 위해서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은 2절에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라고 말을 시작하며 질문들을 던진다. “여러분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5절에서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기 때문입니까?”

4.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성령 받음’은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일까? 흔히들 알고 있는 회심 이후에 2차적으로 일어난다는 ‘성령 세례’를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다시 읽어보면 그런 구조를 발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성령 받음’은 중생이나 회심의 사건과 별개로 존재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또한 몇 사람들만이 특별하게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사건으로 언급하고 있지도 않다. 복음을 듣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2, 5절).

5. 우리가 알고 있는 2차적인 사건으로서의 ‘성령 세례’가 많이 왜곡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성령을 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성령 세례’만의 문제가 아니다. ‘성령의 은사’나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통해 받는 것으로, 인간의 특별한 노력과 열심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성도가 경험하는 ‘성령 받음’이나 ‘능력 행함’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6. 바울은 이것을 확증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언급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것이 하나님께 의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으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을 동일하게 의롭다고 선포하시고 복을 주실 것이다. 이것도 어떤 종교적인 노력이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7.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믿음은 인간의 행위 자체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통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는데, 갈라디아서나 로마서 등에서 강조하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인간의 구원에 관계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당연히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순종을 강조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예를 든다면 율법의 행위라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거부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이루거나 얻으려고 하는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이다.

8. 거기에 성령의 역사도 포함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그렇고, 성령을 받는 사건도 그렇고, 이바르함의 자손이 되어 그에게 허락된 복을 누리는 것도 그렇고, 모두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인간의 행위 자체를 부정하거나 부인하지 않는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무엇인가를 더 첨가하려고 하는 모든 인간의 시도와 노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복음이고, 교회 공동체가 늘 경계해야 하는 거짓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것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Overlap : 성전, 율법학자들을 통해 한국 교회를 본다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2:35~44

  1. 예수님은 성전을 척결하신 후에 계속 성전에 머무르시며 사람들을 가르치신다. 오늘 내용은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35~37절은 메시아(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주’(Lord)이시다. 38~40절은 사람들 앞에서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41~44절은 과부의 작은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이 모든 이야기가 성전 안에(정확히 말하면 성전 바깥뜰)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2. 예수님은 먼저 율법학자들이 메시아(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반박하신다. 그 근거로 제시하시는 것이 다윗의 시편인 110:1이다. 다윗의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네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여기서 전자의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하고, 후자의 ‘내 주’(히브리어로 ‘아도니’)는 하나님의 왕국을 완성할 메시아를 의미한다. 율법학자들은 그 분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그 분을 ‘내 주’(아도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기 보다는 다윗의 자손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박하신다.
  3. 이어서 그들의 잘못된 삶의 태도와 교만, 종교적인 권력을 쥐고선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모습에 대해서 지적하신다. 율법학자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며, 시장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 또한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잔치에 윗 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당시 옷이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다. 긴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옷을 입고 시장(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을 걸어다니면 사람들은 그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그들은 그런 것을 매우 즐겼다. 더 나아가 회당과 잔치에서 가장 높은 자리,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다. 그 자리에는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 종교적으로나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 앉는 자리이다.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고 존경을 받으며, 높임 받기를 좋아했다. 여기서 좋아했다는 것을 그것을 추구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4. 더 큰 문제는 그런 권력과 명예를 가지고 사회적인 약자들을 착취하고 탈취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과부(구약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회적인 약자)의 집을 삼킨다. 당시 집이란 전재산을 의미한다. 그것도 과부의 집이니 그렇게 좋은 집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과부의 유일한 재산인 집을 빼앗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또한 자신들이 얼마나 종교적으로 괜찮은 사람인지를 드러내기 위해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길게 기도한다. 그것을 통해서 종교적인 인기와 영향력을 얻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율법학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더 클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사람들은 속일 수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종교적인 권력을 확보하고 그것을 가지고 남이 모르게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 아신다. 하나님은 그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게 심판하신다.
  5. 그 다음 이야기는 그런 율법학자들이 무시하고 착취했던 과부의 헌금 이야기이다. 마가복음은 의도적으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집어넣음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며,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악행이 어느 정도인지를 더 확실하게 드러낸다. 예수님은 성전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 사람들이 그곳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와 신앙과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큰돈을 넣었다(큰돈 넣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아주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렙돈 동전 두 개 곧 1고드란트(가장 작은 단위의 로마 동전으로 그 가치는 1데나리온의 64분의 1에 해당, 1데나리온은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이다)를 넣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헌금을 드렸다. 그들은 모두 풍족한 가운데서 드렸지만 이 여인은 가난한 가운데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
  6.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돈의 액수가 아니다. 누가 진정한 헌금을 하나님께 드렸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돈의 액수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드리는 사람의 마음과 태도를 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예수님 당시의 성전과 그것을 배후로 종교적이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힘을 가진 세력들 – 오늘은 대표적으로 율법학자들이 등장한다 – 의 모습이 어떠했으며, 그들이 어떻게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했는지를 고발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더불어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한 가지 오늘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본문의 모습과 현재 한국 교회의 모습이 오버랩이 된다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의 모습 속에서 한국 교회 종교 지도자들(대표적으로 목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화려한 예배당과 엄청난 사역들과 헌금들, 그 가운데 종교 지도자들이 큰 권력을 소유하면서 교인들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모습들이 자꾸 오버랩 된다. 우리는 그런 것에 금방 속아 넘어가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기준과 마음은 우리와 전혀 다르다.
  7. 한국 교회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그래서 우리가 세워놓은 그 멋진 예배당에서 예수님이 거닐고 계신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그때의 그들과 지금 우리들과 다를까? 비난을 받을까 칭찬을 받을까? 더 큰 심판이 있을 것라고 말씀하실까? 과부의 헌금과 같이 격려하시고 칭찬하실까? 마음에 큰 두려움이 밀려온다. 나름 그런 시스템과 구조 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여전히 내 안에 그런 사고와 가치와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실패를 통해 낮아지고 비운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 그 자리에 앉고 싶고, 그런 대우를 받고 싶고, 그런 풍족함을 누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한 자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을 찾으시는 주님의 시선이 나를 계속 붙들어 주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몰라서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2:13~27

  1. 오늘 말씀은 두 가지의 상반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이 로마의 황제 가아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아닌지를 묻는 질문과 부활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되는지에 질문이다. 첫 번째 질문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이 던진 질문이고, 두 번째 질문은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던진 질문이었다. 또한 전자의 질문이 이 땅에서의 삶, 이 세상 왕국에서의 삶에 대한 질문이라면, 후자의 질문은 새 땅에서의 삶, 하나님 왕국에서의 삶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앞의 질문이 상식과 정치, 경제, 세상의 법과 관련된 질문이라면, 이어지는 질문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2. 전자의 질문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트집을 잡으려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이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와 마음의 동기를 이미 알고 계셨다.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던지는지 다 파악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데나리온 동전 하나를 가져와 보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곤 그 동전에 있는 얼굴과 새겨진 글자가 누구의 것인지를 물으신다. 당시 그 동전은 로마 제목의 화폐였기에 당연히 황제 가이사의 것이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한 마디로 그 문제를 정리하신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3. 너무도 명쾌한 예수님은 대답에 그들은 아무런 꼬투리도 잡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어쩌면 우리의 문제는 어느 것이 가이사의 것이고, 어느 것이 하나님의 것인지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왕이시다. 하지만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살고 있다. 작게는 가정에서 시작해서 조직과 민족과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렇게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이중국적을 가진 자들이다. 이 세상에도 속해 있고 하나님의 왕국에도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처럼 무엇이 세상에 속한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를 잘 분별하고 구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인들은 매우 이상한 존재와 집단들이 되어 버린다. 어쩌면 한국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의 원인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4. 후자의 질문은 그 유명한 부활 논쟁이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부활과 관련된 가장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신명기 25:5~10에 나와 있는 ‘형사취수제’(혹은 계대결혼법)를 근거로한 것이다. 이 제도는 후사가 없이 죽은 형제를 위하여 아들을 낳아 줌으로서 죽은 자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고 기업을 보존하려는 것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상황을 설정한다. 그것은 일곱 형제가 있었고, 그들 모두가 형수와 결혼했지만 자식이 없이 죽었다면 부활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식의 질문이 대표적인 상황윤리이다. 예수님은 이런 도전에 대해서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신다.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몰라서 이런 잘못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5. 그럼 사두개파 사람들은 성경을 어떻게 잘못 이해했는가? 예수님은 부활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신다. 육체를 가지고 다시 부활하는 것으로 보면 죽은 이후의 부활은 분명히 연속성을 가진다. 하지만 육체를 가지고 다시 부활한다고 모든 것이 다 연속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활한 후에는 결혼생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못 이해했는데,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죽어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게 이런 자들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6. 그리스도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영적인 삶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은 두 가지 모두를 강조한다.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오늘의 삶도 중요하고, 부활 이후의 삶도 중요하다. 그렇게 보면 부활 이후의 삶에 영적인 것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육체를 입고 부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것이 이 땅에서의 삶이든 완성된 하나님 왕국에서의 삶이든 상관이 없다. 이 땅에서의 삶에서는 건강한 상식과 기준, 세상의 법률을 인정하고 지켜야할 것은 지켜야 한다. 더 나아가 무엇이 하나님의 것인지, 무엇이 세상의 것인지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삶은 부활 이후의 삶으로 연장된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잘 구분하는 것이다.
  7. 그렇다면 이런 것을 잘 구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예수님의 대답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성경과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 성경을 제대로 바르게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 – 바리새파, 사두개인, 헤롯 당원 등 – 은 모두 성경도 잘못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하고 있었다. 바르게 아는 것, 올바로 아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알아야 바로 믿을 수 있고, 바로 믿어야 바로 살아갈 수 있다. 그 지식과 믿음의 근거는 바로 성경과 하나님이다. 성경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을 깊이 알 때 건강한 삶과 신앙생활이 가능하다. 요즘 한국 교회를 볼 때마다 적실하게 필요한 것이 이 두 가지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문제는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숙제는 성경과 하나님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