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 일기 (2) “건강한 가정교회가 대안이다”

가정교회라는 것을 처음 접하게 된 곳은 90년대 후반 방글라데시였다. 그때 나는 이슬람권 선교사가 되고 싶어서 이런 저런 선교훈련을 집중해서 받았고, 선교지는 방글라데시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처음으로 선교지를 밟은 곳이 방글라데시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곧 깊은 좌절감을 경험하게 되었다. 무슬림이 삶이고 삶이 무슬림인 그 사회를 경험하면 할수록 내가 받은 선교훈련이 의미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그곳에서 교회 개척 사역을 하고 싶었다.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곳, 교회가 개척되지 못한 곳에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피부로 느껴지는 무슬림 사회는 철옹성과 같았다. 도저히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 개척 사역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때 가정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 남침례 선교사들이 무슬림 지역 안에서 가정교회라는 방식으로 교회 개척 사역을 한다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교회론과 신학을 한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구별된 예배당 없이 가정에서 모이는 모임을 교회라고 부른다는 것이 수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정교회를 접하면 접할수록 그것이 교회의 본질(존재 방식)에 가깝다는 것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나아가 무슬림 지역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 가정교회 방식의 교회 개척 사역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중국 성도들이 엄청난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어떻게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 했는지에 대한 책을 접하게 되면서 중국 처소교회(가정교회, 삼자교회와는 구분된다)를 알게 되었다. 더불어 한국에 셀 교회 사역이 소개되면서 전국적으로 셀 교회 열풍이 강력하게 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참 많은 셀 사역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미국식 가정교회가 소개 되었고(앞에서 언급한 가정교회는 ‘레디컬’(과격한)한 방식이라고 한다면, 후자에 언급되는 미국식 가정교회는 온건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미션얼 처치(missional-church)가 소개 되고 있다.

이런 일련의 흐름을 보면 모두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관련이 있다. 이상하게도 한국에 소개가 되면 모두 프로그램화 되어 버린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가정교회이든 셀 교회이든 미션얼 처치이든 그 핵심은 모두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서 시작하는 교회 회복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절대 교회 성장 프로그램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피값으로 세운 교회가 무엇이며, 그 교회는 세상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나는 이런 교회론적 질문에 가장 성경적으로 답할 수 있는 방식이 (레디컬한) 가정교회라고 생각하고 믿는다.

가정교회를 처음 접한지 20년이 되었다. 지난 20년 동안 다양한 사역의 현장들을 경험했다. 작은 교회에서 중형 교회까지, 선교단체에서 개척 교회까지. 그런 가운데 한국 사회는 엄청난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다. 하루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과거의 목회 방식이나 프로그램들이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있다. 새로운 접근과 시도가 필요하다. 이럴 때일수록 방법이나 도구의 변화를 시도하기 보다는 본질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나는 교회론의 변화가 시급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답이 될 수 있는 것이 성경적(레디컬한) 가정교회라고 생각한다. 유일한 답이라고는 말하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문화적인 옷을 어떻게 입힐 것인지에 대해선 남은 숙제이다. 하지만 가장 건강하고 복음적이고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며 시대의 변화에 적합한 방식은 가정교회라고 믿는다.

신약성경이 어린이 전도를 강조하지 않는 이유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행 16:31, 새번역)
“Believe in the Lord Jesus and you will be saved, along with everyone in your household.” (NLT)
 
1. ‘그대'(간수, you)에게서 ‘그대의 집안'(your household)으로의 확대 – 이것이 순차적인 것인가? 간수의 회심을 통해 점차적으로 가정이 복음화 되어 간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동시적인 사건인가? 
2. 문맥을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32절에서 34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수와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32절, 새번역)
“And they shared the word of the Lord with him and with all who lived in his household.” (NLT)
“그 밤 그 시각에, 간수는 그들을 데려다가, 상처를 씻어 주었다. 그리고 그와 온 가족이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다.”(33절, 새번역)
“Even at that hour of the night, the jailer cared for them and washed their wounds, Then he and everyone in his household were immediately baptized.” (NLT)
“간수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온 가족과 함께 기뻐하였다.” (34절, 새번역)
“He brought them into his house and set a meal before them, and he and his entire household rejoiced because the all believed in God.” (NLT)
3. 32절을 보면, 간수뿐만 아니라 간수의 집안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복음)을 듣는다.
4. 33절을 보면, 간수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그 자리에서 (즉시) 세례를 받는다.
5. 34절을 보면, 간수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6. 비슷한 사건이 사도행전 10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바로 고넬료 가정에 복음이 전해지고, 그의 가족 모두가 회심하는 사건이다.
7. 사도행전 10장 33절과 44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에게 지시하신 모든 말씀을 들으려고 다같이 하나님 앞에 모여 있습니다.” (33절, 새번역)
“Now we are all here, waiting before God to hear the message the Lord has given you.” (NLT)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에,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리셨다.” (44절, 새번역)
“Even as Peter was saying these things, the Holy Spirit fell upon all who were listening to the message.” (NLT)
8. 고넬료는 일명 ‘경건한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혼자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집안 전체가 하나님을 믿었다. 그리고 기도 중에 천사의 지시를 받고 베드로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온다. 그때 고넬료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말씀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 – 남녀노소, 자녀들, 집안의 종들을 다 포함해서 – 에게 성령님이 임하신다.
9. 신약성경은 이것을 ‘오이코스’라고 부른다. 여기서 ‘오이코스’란 일가족, 집 안에 있는 모든 식구 – 단지 가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안에 있는 종들, 방문한 손님들까지 포함하는 의미 – 들을 말한다.
10. 그런 차원에서 신약성경에서의 전도와 회심은 단순히 한 개인의 회심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회심은 가족 전체의 회심과 연결된다. 왜냐하면 그 시대는 ‘오이코스’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11. 그러므로 사도행전 16장 31절의 말씀은, 점진적인 가정의 복음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간수가 개인적인 회심을 경험하고, 그 회심의 사건이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쳐 점진적으로 가정의 복음화를 이루어야 한다거나 그렇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는 말씀이 아니다(1차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신약 시대는 철저하게 ‘오이코스’ 중심의 사회였다. 한 가장(부모)의 회심은 ‘오이코스’ 전체의 회심으로 연결된다.
12.  그렇기 때문에 신약성경은 어린이 전도를 강조하지 않는다(어린이 전도와 관련된 구절이 없다). 어린이는 ‘오이코스’의 일원으로서 부모에게 속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부모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그 영향력은 자녀(오이코스)에게까지 반드시 미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오이코스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13. 이런 개념은 적어도 천 오백년 이상 교회뿐만 아니라 동서양 문화 안에 존재해 왔다. 이런 개념이 무너진 계기는 18세기 ‘산업혁명’이다. 기계의 발달, 엄청난 속도로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고, 집에 있던 여성들마저 공장으로 내몰리면서 자녀들이 방치되었다. 또한 공교육 제대과 발달하면서 ‘초-중-고-대’라는 학교 시스템이 확립되었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교육이 가정에서 학교 넘어갔다.
14. 주일학교 시스템도 이때 교회에 도입이 되었다. 방치되어 있던 아이들을 모아 학급 중심의 주일학교가 진행되었고, 거기서 성경을 가르치면서 신앙교육마저 가정에서 교회 주일학교로 옮겨지게 되었다.
15. 오늘날은 가정의 해체와 붕괴로 인해 사회와 가정이 파편화 되었고, 세대별로 분화되었다. 더 이상 공동체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생활도점점 개인주의에 물들어 간다. 예배를 보아도 그런 현상이 뚜렷하다. 어린이 예배, 청소년 예배, 청년 예배, 어른 예배로 세분화 되었다. 그 중에서 어린이 예배마저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로 나누어진다. 거기에 주일학교는 학년별로 학급을 구성한다. 철저하게 세분화 되어 있다.
16. 하지만 신앙 – 아니 신앙뿐만 아니라 성품과 인성, 가치, 태도까지 – 은 철저하게 관계를 통해서 전수되며, 그 전수의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의 몫이다. 다시 말하면, 가정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양육뿐만 아니라 삶으로 신앙의 전수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이고 핵심이다. 주일학교 시스템을 바꾸고, 교제를 새롭게 개발하고, 교사 교육을 강화하는 것은 응급처치일 뿐, 진정한 본질이 될 수 없다.
17. 하지만 오늘날 교회를 보면, 응급처치를 하기에 급급하다. 무엇이 진짜 문제의 핵심이고 본질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교회가 가정 중심이 아니라 건물(예배당) 중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시대정신을 역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시대정신에 흡쓸려 본질을 놓치고 있는 형국이다. 본질로 돌아가자. 본질을 붙잡자.

새로운 교회 개척 실험하기

1. 이슬람권을 돌아다니면서 ‘과격한 가정교회’를 자주 접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국의 ‘처소 교회’이다. 이런 가정교회의 특징은 건물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붙잡힌 한 사람, 한 가정으로부터 시작되는 – 말 그대로 사람과 관계 중심의 공동체이다.

2. 그러기 때문에 장소와 환경에 구속을 받지 않는다. 어디든 모이는 곳이 예배당이고 기도처가 된다. 복음자리교회를 시작할 때는 그런 과격한 가정교회를 기대했다. 더욱이 개척 멤버들이 선교단체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3.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나에겐 멘붕 그 자체였다. 선교단체 간사 출신도 있었고, 거의 대부분이 특정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리라 확신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아니었다. 각자 자신들의 신앙 경험을 통해 형성된 교회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견고하고 완고했다.

4. 더 큰 문제는 내 자신(가정)부터가 ‘과격한 가정교회’로서의 삶의 실험(test)과 검증이 되어 있지 못했다. 머리로는 잘 정리가 되어 있었지만, 실제 삶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십 년 가까이 전통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십 년동안 전통적인 신학을 공부했으며, 십 오년 넘는 시간동안 전통적인 목회 환경에서 사역을 했다.

5. 우리 중에 한 사람도 과격한 가정교회를 경험하거나 맛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나는 어깨너머로만 살짝 맛을 보았을 뿐이다). 이것을 비유로 설명하면, 외국에 나가서 정말 맛 있는 어떤 음식을 몇 번 먹어본 것뿐인데, 그 음식을 취급하는 전문식당을 창업한 것이다. 그런 식당이 잘된다면 그것은 정말 놀라운 기적인 것이다.

6. 엄청난 시행착오와 실패, 좌절의 반복이었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아직 한국에서는 어렵겠다”는 것이다. 건물 중심의 전통적인 신앙생활이 뼈속 깊은 곳까지 인이 박혀 있어 쉽게 바꾸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7. 하지만 몇 가지 소망들은 발견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인식과 사고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은 ‘과도기’인 것 같다. 1막의 조명이 꺼지기 시작하고 새로운 2막의 조명들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하는 시점에 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새로운 패러다임과 방법들을 준비해야 한다.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복음의 공동체, 성령의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8. 그것에 가장 적합한 방법이 ‘교회 개척’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기존 교회를 개혁하거나 혁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가장 탁월하고 효율적인 방법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진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는 것이라 믿는다.

9. 어쩌면 이 부분에 대해선 목회자보다 일반 성도들이 더 깨어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전통적인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들은 필연적으로 ‘보수’적인 자세와 태도를 가지게 된다. 교리 중심적인 신학 교육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10.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진 영적 지도자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현대적이면서 복음적인 시각을 가진 지도자, 변화하는 시대도 보지만 동시에 그 시대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경륜(경영)도 볼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지금은 꺼질듯한 작은 불씨이지만, 곧 새로운 기름부으심이 있을 것이다. 그 때는 제어할 수 없는, 꺼질 것 같지 않는 불길로 타오를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회복 시켜서 마지막 추수를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교회가 소망이다. 성령의 새로운 역사를 담아낼 수 있는 새 부대가 절실히 필요하다. “성령님! 우리의 사고와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새 일들을 행하시는 주님의 경륜(경영)을 보게 하소서! 복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새로운 교회들이 일어나게 하소서!”

새로운 마중물

1. 오늘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은 헌금을 통장째로 받았습니다. 눈물을 흘리시면서 저에게 전달하시는데, 받는 저로서는 감사하기도 하면서 불편(미안, 죄송, 송구 등등)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저의 마음은 그냥 다시 그대로 돌려 드릴 생각입니다. 그 분의 마음과 기도만으로도 행복하고 풍성합니다.

2. 오늘 이 분의 통장을 받으면서 5년 전 한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제주 열방대학 CDTS에서 이집트와 구미로 두 달간의 전도여행을 가야했습니다. 저희 여섯 식구의 경비를 계산해 보니 상당한 금액이 나왔고 부족한 금액이 850만원이었습니다. 지금도 큰 돈이지만 그 때는 더 큰 돈이었습니다. 저는 해결될 가망성이 없으면 빨리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 그때 아내는 하나님에게 “정말 저희 가정이 전도여행을 가야 한다면 필요한 재정의 십분 일을 주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채워주신다는 싸인이라고 생각하고 전도여행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어느 간사님이 저에게 두툼한 봉투를 전달하셨습니다. 봉투에는 ‘마중물’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고, 정확하게 5만원권 지폐가 17장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이 정말 마중물이 되어서 남은 금액이 그 주간에 다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4. 몇 달 전부터 교회 예배당을 놓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대출을 받아서라도 건물을 얻어야 한다는 충고를 많이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매월 원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 허덕이면서 돈과의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예배당을 지을 땅을 구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5. 화요일 저녁마다 가까운 지역 가정교회 목사님들과 함께 한라산 어리목으로 산기도를 하러 올라갑니다. 기도하러 갈 때마다 어떤 특정한 기도제목을 정해놓고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질문을 합니다. “주님! 오늘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까요?” 이번 주는 하나님에게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지 않는 저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적극적으로,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기대함으로, 당당하게 기도하고 구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추운 어리목 주차장에서 폴짝 폴짝 뛰면서 교회의 필요-예배처소-에 대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6. 오늘 또 한번의 ‘마중물’ 헌금을 받았습니다. 재정이 많아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그 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은 헌금입니다. 저에겐 액수를 떠나서 하나님이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계시며,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고 계시며, 교회를 세워가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싸인으로 다가왔습니다. 저의 역할은 기도하며 말씀하시는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라고 하시면 가고,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는 것입니다.

7. 개척하고 지난 2년 10개월 동안을 그런 훈련만 받아 왔습니다. 앞서 가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 모든 필요를 아시며 공급하시는 하나님, 내가 원하는 목회가 아니라 교회가 세워진 이 땅에 주님이 하시길 원하시는 목회를 하는 것,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삶 등을 배웠습니다. 오늘 한 여인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이 앞으로 어떤 일들을 행하실지 다시 한번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배운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말씀하신만큼 믿음으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서두르지 않고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길 원합니다. 새롭게 시작된 마중물의 역사를 보기를 원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