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만왕의 왕 예수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1:1~10

  1.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계속 강조하신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영광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이 기다린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시며 그 길을 걸어가신다. 그런 예수님이 갑자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걸음을 멈추시더니 두 제자를 가까운 마을 안으로 보내시며 말씀하신다. “저기 보이는 마을로 들어가라. 그곳에 들어가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하나가 있을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서 이리로 끌고 와라. 만약 누가 ‘왜 이러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필요하시니 쓰고 제자리에 갖도 놓겠다’고 하라.”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느 문 앞에 새끼 나귀가 매여 있었다. 그래서 주인이 허락도 없이 나귀를 풀고 있는데 거기에 서 있던 사람들이 왜 나귀를 주인의 허락도 없이 가지고 가는지를 묻는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일어준 말로 대답하자 그 사람들이 허락해 주었다.
  2. 우리가 여기서 던져야 하는 질문은, “왜 예수님은 갑자기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새끼 나귀를 타야겠다고 하시는가?” 한 가지 명확한 것은 당시 예수님의 인기는 절정을 치닫고 있었으며,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소문이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제자들은 왜 자리 다툼을 벌이는 것이며, 왜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려고 하시며, 사람들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할 수 있었단 말인가? 지금 갈릴리에서 출발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으며, 제자들은 이 결론이 메시아로서 왕위에 오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계속해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을 것과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가르치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그들이 오직 기대하는 것은 메시아로서의 영광을 얻으실 때 누가 그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것인가였다.
  3. 이 사실은 소문으로 이미 여러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있었다. 능력과 기적을 베푸셨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다? 그것은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정치적 메시아가 왕위에 등극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자신의 겉옷을 깔아 드렸고, 나뭇 가지를 꺾어 와 길에 깔기도 하였다. 이것은 왕의 즉위식과 연결된 행동들이다. 더 나아가 그들은 그런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호산나! 복이 있으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여! 복이 있도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은 명백하다. 정치적 메시사가 와서 다윗의 왕국을 회복할 것을 기대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행해서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외친다. 자신들이 처한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구원해 주시길 기대했고 소망했다. 구약의 예언과 약속이 이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다.
  4. 당시 대부분의 지도자들(왕, 장군 등등)은 몸집이 큰 노새를 탔다.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드러내고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겸손히 작은 새끼 나귀를 타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당시 자신을 환영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였다. 그들이 기대하던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권력과 부와 명예를 가져다줄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미천하고 나약한 왕으로 입성하고 계신 것이다. 그 분은 곧 종교 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이방인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너무도 무능력하게 죽을 것이다. 그것이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이유였다. 진짜 왕이시고 진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가장 겸손하게 왕의 즉위식을 시작하고 계신 것이다. 세상 지도자들과는 다른 방식의 즉위식,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자신을 따르는 열두 제자 외에는 어떤 군대도 조직도 없었다. 예수님은 지금 점령군으로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다. 섬기기 위해 자신을 목숨을 내어주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이다.
  5. 계속해서 말하지만, 하나님 왕국은 이렇게 임한다. 점령군으로 군대를 이끌고 입성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왕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계신 것이다. 그 분은 왕이시고 창조주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가장 연약하고 나약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입성하고 계시다. 오늘날 다원주의 사회, 후기 기독교 사회, 후기 포스트 모던니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기독교 국가를 이루겠다고 십자가군처럼 권력과 힘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가? 힘으로 모든 반대 세력들을 제압하고 기독교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가? 그것이 하나님 왕국인가?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고 뜻인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우리는 겸손히 섬김으로 다스리는 자이고, 낮아지고 연약해짐으로서 하나님 왕국을 임하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겸손으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어 가시는 예수님을 배워야 한다.

섬김과 무능력함으로 세워지는 하나님 왕국

마가복음 10:32~45

  1.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따로 불러 놓으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이유와 그곳에 올라가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예수님을 결박해서 이방 사람들(로마군인들)에게 넘겨줄 것이고,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린 뒤에 죽일 것이다. 하지만 3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주시길 요청한다. 그들의 소원은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자신들을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혀 달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눈치가 없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올라가 종교 지도자와 이방인들에 의해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제자라는 사람들은 누가 더 높은가에 대해서 논쟁을 하더니 이제는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혀 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책망하기 보다는 다른 차원의 질문을 새롭게 던지신다.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예수님이 받으시려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 이것은 앞으로 벌어질 고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죽음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죽음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이다. 두 제자는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조차 알지 못하면서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을 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마시는 잔을 그들도 마실 것이고, 자신이 받는 세례를 그들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이것은 단순히 두 제자만의 운명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의 운명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 분을 따르는 자들은 그 분이 마신 잔을 동일하게 마셔야 하고, 그 분이 받은 세례를 동일하게 받아야 한다. 그것이 모든 제자의 운명이다. 대신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누가 앉을 것인가는 예수님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밝히신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정하실 일이고 하나님의 소관이시다.
  3. 이런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은 모두 분개했다. 얼마 전까지 이 문제를 놓고 서로 논쟁을 벌였는데, 이렇게 갑자기 자신들 앞에서 대놓고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 자리를 자신들에게 달라고 하는 부탁을 뻔뻔하게 하고 있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아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놓고 다시 하나님 왕국의 리더십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이 세상의 리더돌은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력을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제자들은 그런 방식을 동일하게 취해서 안 된다. 오히려 큰 사람이 되고 싶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려고 한다면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리를 삶으로 살아내시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섬김을 받으러 하시지 않고 섬기시고 계신다. 또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몸값을 치루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주려고 하신다.
  4. 예수님은 계속해서 역설을 말씀하신다. 제자도의 삶의 본질도 역설이지만, 리더십의 본질도 역설이다. 그 역설은 세상의 방식과 모습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고 명령하고 군림하고 지배하지만, 하나님 왕국의 리더들은 그것과는 완전히 반대된 삶을 살아야 한다. 낮아지고 무능력해지고 나약해져서 섬겨야 하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왕국을 위해 헌신된 리더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영광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추앙과 권력을 챙취하기 위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생명을 내주기 위함이다. 세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무능력해지고 나약함으로 체포되어 고문과 조롱을 받고 십자가에 죽기 위함이다. 하나님 왕국의 리더는 그런 자리이다. 야고보와 요한이 정말 그것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런 자리를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잔과 세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5. 하나님의 왕국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이다. 강력한 권력과 힘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능력해지고 나약해지는 것이다. 군림하여 조정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 왕국은 이 땅에 임한다. 역설로 임하고 역설로 세워지는 왕국이다. 제자도에도 역설이고 리더십에도 역설이다. 전부 뒤집어지고 전복된 왕국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그 전복된 왕국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많은 성도들도 그런 역설과 전복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날 교회는 자꾸 더 높이, 더 많이, 더 크게만을 부를짖고 있다. 얼마 전 새롭게 선출된 한기총 회장은 취임식에서 기독교 국가를 회복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마치 예수님께 오른편과 왼편의 자리를 구한 세베대의 아들들과 같은 어리석은 외침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그렇게 임하지 않는다. 그렇게 세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낮아지고 섬기고 나약해지고 무능력해져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왕국이 임하는 방식이고 세워지는 방법이다.

머리가 되지 말고 꼬리가 되라!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9:30~37

  1.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후에 처음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3일만에 부활하신 것을 말씀하시고, 제자도와 하나님의 왕국이 능력으로 임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가르치신 후에 다시 갈릴리를 지나게 되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 일행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를 원치 않으셨다. 왜냐하면 지금 집중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집중적으로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일까? 31절을 보면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가르치신다. 문제는 이런 내용이 제자들에게 무척이나 불편하게 들려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깨닫지 못했고,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두려움(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어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내용이 무엇이냐고 묻지도 못했다.
  2. 그런 상태에서 가버나움으로 도착하게 되었고, 어느 집에서 쉬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신다. “오는 길에 너희 끼리 왜 논쟁했느냐?” 이런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는 제자가 한 명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오는 길에 서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해서 논쟁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그들이 무슨 주제로 논쟁을 벌였는지 전혀 모르시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특유의 질문법을 통해서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시길 원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모두 불러 놓고 자리에 앉히신 후에 다시 하나님 왕국의 삶(제자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3. 세상에서는 경쟁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첫째, 으뜸, 머리가 되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왕국에서 첫째가 되려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서는 모두 주인이 되어 명령하고 군림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예를 보여주기 위해서 한 어린아이를 데려와 제자들 가운데 세우고 다시 말씀을 시작하신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당시 어린 아이는(여자도 그러했지만) 매우 미천한 존재로 여겨졌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인원을 계산할 때 어린 아이와 여자는 그 숫자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 사이에 미천한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시고, 그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사람이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4.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지만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대부분 그 사람의 사회적/경제적 위치와 신분, 혈통으로 따진다. 제자들이 살아가는 그 시대에는 더욱 더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그런 세상적인 가치가 통용되지 않는다. 계속 이야기를 하지만 하나님의 왕국은 뒤집어진 왕국이다. 세상적으론 미약하고 미천한 존재가 오히려 인정을 받고 섬김을 받는 곳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행한 것이 예수님께 행한 것이고 하나님께 행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가르침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그와 못지 않게 주변에 있는 연약하고 미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주인이 되어 군림하는 것이 성공한 삶이 아니라 종이 되어 섬기는 삶이 성공한 삶이라고 말씀하신다. 머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되라는 것이다(한국 교회에서는 매주마다 머리가 되라고 하셨는데 말이다).
  5. 사실 더 충격적인 것이 있다. 예수님은 집중적으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그 와중에 서로 누가 큰 자인가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크게 당황하고 두려워 했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고, 그들은 서로 누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을 것인지에 대해서 논쟁 했다는 것을 통해서 제자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통해 집중 훈련(교육) 기간을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제자들에게 전혀 이해되거나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이해를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다. 철저하게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 세계관에 갇혀 있다. 나름 멋진 신앙 고백도 하고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세계관과 충돌 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바꿀 마음은 거의 없어 보인다.
  6. 그렇다면 제자들은 언제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가? 많은 사람들은 오순절 성령의 임재 때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복음서를 자세히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기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부활을 믿고 있었다. 제자들에게 더 충격적인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그 분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하나님의 왕국이 어떻게 임하고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지를 깨달고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메시아가 권능으로 임하셔서 새롭고 영광스러운 다윗의 왕국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리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의 일하심이 자신의 종교적인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제자들은 변화하게 되었다.
  7. 이런 세계관의 충돌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그 분이 선포하신 하나님 왕국의 복음을 어느 정도나 이해하고 있을까? 어느 정도나 받아들이고 삶에서 적용하고 있을까? 역설이 존재하고 세상의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뒤집어진 왕국의 삶을 어느 정도나 받아들이고 있을까?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짜 이해하고 각자의 삶에 적용하고 있을까? 여전히 꼬리가 되지말고 머리가 되라는 축복을 들으며 세상 속에서 경쟁하고 으뜸이 되고 성공하려고 하나님의 축복만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위 세상적으로 성공한 자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군림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린 아이 하나를 세워놓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반성해야 할 것이다.

Discipleship = Kingdom of God + Lordship

마가복음 4:30~41

  1.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비유를 듣고 깨닫는 자들이 있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비밀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님이 자신의 신분을 계속해서 숨기고 감추려고 하셨던 것과 같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 앞에서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나기를 꺼려하셨다.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리들이 자신을 좇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도 동일하다. 만약 모든 청중들이 듣고 이해하기 위함이라면 더 쉽게 설명 했어야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계속해서 비유로만 말씀하신다.
  2. 그렇다면 누가 그 비유를 이해했을까? 사실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대신 제자들에게 청중들에게 없는 특혜가 있었다. 그것은 저자 직강 설명회가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리들 앞에선 비유로 말씀하시고 제자들과 따로 모일 때 그 비유에 대해서 일일이(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다. 이것이 제자들이 누리는 특혜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그들은 이미 비유를 들은 자들이다. 거기에 예수님이 추가로 해석해 주시고 설명해 주심으로 인해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다.
  3.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 왕국을 다시 비유로 설명하신다. 그것은 한 알의 겨자씨와 같다는 것이다. 겨자씨는 땅에 심는 씨들 중에서 제일 작은 씨이지만, 그 씨가 심어지면 자나라 어떤 식물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그 그늘에 새들이 와서 쉬게 된다.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왕국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 왕국의 모습은 너무 초라하고 작고 미약하지만, 그 왕국이 이 땅에 임한 이후에 자라게 되면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 영향력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안식이다. 앞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열매를 강조 하셨다면, 이번 비유에서는 쉼과 안식, 보호를 강조하신다. 하나님의 왕국은 세상 사람들에게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안식과 쉼과 안정과 보호를 제공해 준다.
  4. 비유로 가르치는 사역이 마무리 되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고된 사역에 매우 지치셨는지 배 뒷 부분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다. 그때 매우 강한 바람이 불어와 큰 파도가 배 안으로까지 들어오자 배가 침몰하기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일로 평생을 보낸 몇몇 제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 이 위기 상황을 해결해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도무지 자신의 힘으론 해결이 되지 않았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깨워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설명하였다. 예수님은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예수님은 바로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파도에게 명령하셨다. 그러자 바람이 멈추고 호수가 잔잔해졌다.
  5. 이어지는 말씀에는 예수님의 반응과 제자들의 반응이 짧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두려워 하고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책망하신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크게 두려워하며 수군거린다. “도대체 이 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파도까지도 복종하는가?” 초점은 예수님은 누구시냐는 것이다. 누구이기에 바람과 파도에게 명령하시고 잠잠케 하느냐는 것이다. 에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반응을 책망하신다. 그들에게 믿음이 없으며, 믿음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6. 사실 더 당황스럽고 놀라는 사람은 이런 마가복음의 말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다. 제자들은 이미 앞에서 많은 기적들을 눈으로 목도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고 각종 질병들을 직접 고치셨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이렇게 놀라고 두려워 하는가? 더 나아가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 독자들을 더 당황스럽게 만든다. 사실 그렇게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이 비유를 다시 설명하고 해석해 주시자 그제야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은 왜 이런 부분을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7. 이것이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 임하는 모습이 아닐까? 씨가 길가에 돌짝에 가시덤불에 좋은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왕국은 그렇게 이 세상에 뿌려지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배척과 거부를, 어떤 사람에게는 잠시 기쁨으로 환영을 받지만 금방 시들어 버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성장하지 못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왕국의 왕이시다. 하지만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하고 환영하지는 않는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환영을 하고 영접하지만 온전히 따르지 않는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열매를 맺는다. 마가복음은 그것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 진짜 누구인가?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8. 이것이 제자도(Discipleship)의 핵심이다. 마가복음에서 계속 던지는 질문의 본질은 제자도의 문제이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제자도는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과 로드십(Lordship, 주님의 주님되심)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 왕국의 비밀을 아는 자만이 진짜 제자의 삶이 가능하며, 예수님이 그 삶의 주인이 되셔야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 이 발란스가 무너지면 성경적인 제자도는 존재할 수 없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목사와 교리와 조직(교단)을 따르는 교인들은 많지만 하나님 왕국과 로드십을 고백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진짜 제자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진짜 제자가 누구인가? 진짜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제자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가 진지하게 던져야할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