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기도란?

박 목사님! 저에게 ‘중보기도’에 대한 정의를 물어 오셨는데, 제가 그 질문에 대해서 명쾌하게 설명을 드릴 자신이 없네요.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정리해서 최대한 답변을 드리고 싶네요. 일단 박 목사님이 읽으셨다는 ‘중보기도에 대한 글’이 제 생각엔 신사도운동을 비판하는 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히 개혁주의(장로교) 쪽에서 비판하는 글이겠지요. 그 분들이 지적하는 부분은 저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충분히 그런 문제점들이 있었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중보’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 중보(자)의 정의

성경에서 사용된 ‘중보(자)’라는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보(자)’라는 단어가 사용된 가장 대표적인 구절은 디모데전서 2장 5절과 갈라디아서 3장 19절과 20절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갈 3:19~20)

여기서 ‘중보(자)’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메시테스’이며 ‘중재인’, ‘대리사절’, ‘화해자’, ‘조정자’, ‘중재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메소스’에서 유래 되었는데, ‘메소스’는 ‘중간의’, ‘가운데 있는’, ‘중앙’, ‘가운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다시 풀어보면 ‘갑’과 ‘을’ 사이에서 어떤 문제를 조정하거나, 어떤 계약을 맺게 하거나, 깨어진 관계를 화해케 하는 행위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입니다. 창세기 3장에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반드시 중보자/중재자가 필요했습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제사장,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거나, 백성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중재자로 섰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신약으로 넘어오면 완전한 중보자/중재자로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중보의 완성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새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 마태복음 27장 51절과 히브리서 10장 20절, 8장 6절, 9장 15절, 12장 24절입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 27:51)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 10:20)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히 8:6)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히 9:15)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 12:24)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한 중보자/중재자이십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롬 5:1).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혔던 모든 벽들이 무너지고 연합할 수 있습니다(엡 2:14).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됩니다(골 1:14).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중보기도를 드릴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하고 완전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2. 그렇다면 우리도 중보자가 될 수 있는가?(혹은 중보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여기까지는 큰 의견의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박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중보자’, ‘중보기도’라는 표현을 사람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가? 그것이 정당한 표현이고 성경적인가? 그런 표현들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나 중보 사역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먼저 저의 결론을 말씀 드린다면 “그렇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는 적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골로새서 1장 2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이런 내용의 말씀을 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 예수님은 고난은 속죄와 구원을 위한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엄청난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가 부족하다는 말씀입니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100% 채워지지 않고 남은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까? 그래서 그 남은 것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그 남은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의미입니까?

당연히 아니지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죄의 문제, 구원의 문제는 100% 완성되고 채워진 것입니다. 무엇인가 남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인간이 따로 고난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고난은 어떤 고난입니까? 골로새서 1장 25절 이하의 말씀을 읽어보면 답이 금방 나옵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5~29)

그 남은 고난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 구원받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특히 29절을 보면 ‘힘을 다해 수고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힘을 다해 수고한다는 말에는 부여된 노동 때문에 피로를 느끼고 쇠약해져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 전파의 결과로 구원 받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돌보고 세우는데 최선을 다했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저는 똑같은 원리가 중보기도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중보자이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신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 땅 가운데 구체적을 실현(적용)되기 위해선 인간의 순종과 땀과 노력도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다 이루셨으니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구속이나 십자가의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짧은 중보기도 사역을 통해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중보기도만이 아니라 중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골방에 들어가 이 땅의 문제와 아픔, 상처들을 위해서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깨어진 마음을 품고 중보자로서 그 아픔의 영역 안으로, 고통과 문제가 가득한 상황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변화(구원)와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일하시는 원리입니다.

예수님도 중보자로 오신 것이지요. 공생애의 삶도 그렇고 십자가도 그렇고 모두 중보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과 구속의 사역은 어찌되는 것입니까? 그것을 이 땅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기 위해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의 영’으로서 단독적으로 일하시거나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과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도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저는 교회를 ‘주님의 몸’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교회는 그 분의 몸입니다. 몸이란 머리의 명령을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가시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머리되신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 안에 성령님을 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동역’이라고 부르지요. 예수님의 사역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십자가를 통해 성취하신 구속의 역사를 계속 이루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3. 결론

저는 개혁주의 분들이 지적하는 부분에 대해선 다시 한번 겸손히 받아들이고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면에서 ‘Word-Play’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신사도운동’ 안에 부작용도 있고, 신학적인 오류도 보입니다. 그렇다고 이단이라고 쉽게 정죄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류가 있고 문제점이 있다면 적극적인 토론을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보완해 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신학적인 연구가 과거에 매여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필요한 사역들을 일으키시고 일하시고 계시는데, 그것을 과거에 매여서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옳은 행동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찌보면 바리새인들과 같은 반응은 아닐까요?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을 섬겼지만 과거에 매여 현재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정죄하고 비난하기 바빴던 바리새인들 말입니다.

더불어 교리적인 이론에만 매여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과거 영국교회가 선교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 안에 갇혀서 선교사 파송에 미온적이고 소극적이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너무 이론적으로만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정치 영역, 경제 영역, 교육과 문화 영역 안에 지금도 심각한 죄악들이 벌어지고 있고 그 영향력이 사회 전반에 흘러가고 있는데 실제적인 중보 사역 없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늦은 밤에 정리하다 보니 더 나누고 싶은 것들이 있지만 나중에 다시 시간을 내어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박 목사님이 다시 질문하실 것이 있으시면 나누어 주세요. 매번 이렇게 박 목사님과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ㅎㅎ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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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sponses to 중보기도란?

  1. 권대용 says:

    인간 자체가 중보자로서의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왜 자꾸만 인간을 신격화하려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도고’라는 성경적 용어가 있음에도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한 분 주님께서만 감당하실 자격이 되는 ‘중보’의 역할을 감당하려하는 마음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 이상준 says:

      왜 그렇게 판단하시나요? 중보라는 단어 하나를 사용했다 안했다는 가지고 사람의 마음과 의도까지 어떻게 그렇게 쉽게 판단하실 수 있나요? 저는 그게 더 궁금합니다. 또한 언제 제가 인간이 중보의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나요? 글을 다시 한번 제대로 읽어보시고 댓글을 올리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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