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밟기 기도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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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존경하는 김세윤 교수님이 요즘 한참 논란이 되는 ‘땅밟기 기도’에 대해서 인터뷰를 하셨고, 그 내용이 뉴스앤죠이에 기사로 올라왔네요. 그 기사의 내용을 읽으면서 몇 가지 의견과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땅밟기 기도’가 ‘지신밟기’ 하던 샤머니즘에서 왔다는 말에 대해서

‘땅밟기 기도’란 말 자체가 많은 오해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영어로 하면 ‘Prayer Walking’입니다. 이 단어를 한국 말로 번역하다보니 ‘땅밟기 기도’라는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누가 어떻게, 어떤 의미로 그런 번역을 하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Prayer Walking’을 정확하게 번역한 말은 아닙니다. 다시 한번 번역을 한다면 ‘현장중보기도’, ‘현장실습기도’, ‘기도하며 걷기’, ‘걸으며 기도하기’ 등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현장중보기도’라는 말과 ‘현장실습기도’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땅밟기 기도’라는 표현보다 ‘현장중보기도’라는 표현을 사용하겠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지적하고 싶은 것은 ‘Prayer Walking'(현장중보기도)이 한국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기도 방법이 한국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김세윤 교수님이 지적하신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 방법은 영미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영어도 짧고 능력이 되지 않아 영미권에서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역사적인 조사가 필요하겠지요. 아무튼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한국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고 영미권에서 사용하던 기도 방법을 배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Prayer Walking’이란 말이 ‘땅밟기 기도’라고 번역되면서부터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김세윤 교수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지신밟기’ 등 샤머니즘적인 전이해(pre-understanding)가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밝히지만 저는 영어권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어서 ‘Prayer Walking’이란 말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사용되고 있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땅밟기=지신밟기)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런 전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참으로 크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중보기도'(Prayer Walking) 자체의 문제보다 그것을 받아들여서 성경에도 없는 한국적 ‘땅밟기 기도’를 만들어낸 우리의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의 단편에 불과합니다. 조금 더 넓게 살펴보면 한국적인 기독교, 한국적인 신앙생활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성경에도 없는 한국 사람들만의 정서와 문화, 전통에서 비롯된 신앙생활들이 성경의 가르침보다 더 강력하게 한국교회 안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토착화의 문제와 다릅니다. 혼동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토착화가 아니라 기독교를 변형 시키고, 변질 시킨 것입니다. 어느 분의 표현처럼… 나무는 기독교인데 뿌리내린 토양이 500년의 유교와 1,000년의 불교와 그 이상 되는 샤머니즘이어서 맺혀지는 열매가 유교식 기독교, 불교식 기독교, 샤머니즘적인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입니다. 교회도 100일 기도, 절에서도 100일 기도… 비는 대상은 다르데 목적과 과정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묻기 보다 일방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어서 좋은 대학, 그것도 돈 잘벌 수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100일 기도가 어디에서 왔는지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분히 한국적이고 샤머니즘적이고 불교적인 색채가 강합니다.

‘땅밟기 기도’라고 부르는 ‘현장중보기도’도 동일합니다. 그 기도 방법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한국 사람들의 마음에 문제가 있습니다. 영미권 사람들은 그런 샤머니즘적인 배경 없이 골방에서만 기도하지 말고 기도의 대상이 되는 현장에 직접 가서 현장의 상황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직접 만지고, 느끼면서 기도하자는 의도와 목적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여러 가지 현장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해서 실제적이면서 효과적으로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방글라데시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면, 기도의 골방에서 그 나라와 민족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겠지만 직접 방글라데시라는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상황들과 영혼들을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면서, 귀로 들으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방글라데시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들을 직접 확인하면서 기도의 제목들을 만들고, 전략들을 세우며 실제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Prayer Walking’ 즉 ‘현장중보기도’입니다.

이런 기도 방법에 샤머니즘적인 요소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한국교회가 더 깊이 배워야하는 기도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한국교회 안에 엄청나게 이루어지고 있는 단기선교의 시간이 ‘현장실습기도’ – 열방을 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배워야 하고 드려야 하는 기도-을 깊이 배우는 기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또 한 ‘현장실습기도’를 제대로(바르게) 배워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각 영역 안에서 기도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정치와 경제, 교육과 문화, 예술, 과학기술 등등 한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사회의 각 영역들 안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그 땅을 밟으며(다른 말로 하면 직장 안에서, 공장 안에서, 학교 안에서…) 기도하는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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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Responses to 땅밟기 기도에 대해서

  1. 이상준 says:

    땅밟기 기도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서 오래 전에 작성한 글인데 다시 올려봅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 말로 번역하면서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 것 같습니다. 더불어 김세윤 교수님의 글이 궁금하신 분들은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작권 문제가 있어서 링크를 걸어 놓으려고 했는데, 기사는 바로 검색이 안 되고 다른 분들이 올린 기사 내용이 많이 검색되네요. 감사합니다.

  2. 박성식 says:

    용어도 문제지만 그 “땅밟기”에 참여하는 자들의 태도에 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점령군처럼 행하는 태도가 많이 보여지니까요.
    용어부터 태도까지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 이상준 says:

      참 이상하게 한국에만 들어오면 왜곡이 생기고 변질이 일어나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저 개인적으론 그만큼 한국교회 안에 샤머니즘과 불교적 세계관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본질을 자꾸 왜곡 시키고 변질 시키다고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3. 김상호 says:

    단순히 용어 번역 문제는 아니지요. 예전단 등에서 나오는 땅밟기 기도 관련 서적들을 보면, 그 땅을 사로잡고 있는 악령들의 권세를 누르고 뭐 이런 것들이 등장하거든요. 그리고 이런 사상은 한국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미국의 일부 신비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개념이구요. 그 뿌리가 같은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지신밟기랑 마찬가지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 Sangjun Lee says:

      일부 신비주의지들이 만들어 놓은 개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그것에 대한 근거를 말씀하셔야 합니다. 무슨 근거로 그 사람들이 신비주의자들인지, 그리고 서구권 사람들은 ‘지신밟기’라는 개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인데, 그것이 어떻게 ‘지신밟기’와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지도 설명하셔야할듯 합니다.

  4. Sangjun Lee says:

    그렇다면, 기도가 어느 한 장소에서만 하라는 명령은 있나요? 기도란 정해진 기도실/특정 장소에서만 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이 있나요? 현장중보기도가 단순히 땅을 밟고 기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기도를 좀더 역동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걸으며 기도할 수도 있고, 운전을 하며, 선교지의 상황과 환경을 오감을 통해 느끼고 보고 들으며 기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 글은 그런 의도와 목적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 ㅁㄴㅇㄹ says:

      요는 걸어다니면서 기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산책하면서 기도하는 ‘산책 기도’참 좋습니다. 저도 즐겨합니다.

      저 땅밟기 기도 운동이 걸으며 기도하고 역동적으로 기도하기 위해서 시작되고 그런 골자로 시행되는 ritual인지 생각해보십쇼.

      그 누구도 걸어다니며 운전하면서 생활하면서 하는 기도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 이상준 says: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히시고, 직분을 밝히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진지한 토론을 할 수 있겠지요. 제가 님을 뭐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먼저 중보자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인데, 물론 당연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작게는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셨다는 것은 그런 중보적인 사역도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발로 걸으며, 그 현장에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무 신비주의로 정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기도에 대한 편협적인 생각, 또는 어느 특정 교단의 신학으로 모든 사역과 신앙을 재단하고 판단하려는 마음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겠지만, 저의 신앙을 다 아는듯한 표현과 정죄가 참 무례하게 느껴집니다.

  5. ㅁㄴㅇㄹ says:

    신비주의의 본산은 서양입니다.

    그 적통자녀들이 미국 신비주의자들이구요.

    걔들이 만든 개념이 한국 샤머니즘과 결합한게 지금 땅밟기죠.

    그리고 중보자는 한분뿐이라는 구절은 어떻게 보십니까?

    신학적인 배경이 문제가 아니라,

    서양 종교 체계에 대해서 무지가 극명하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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