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

묵상한 말씀 : 마태복음 27:1~10
나에게 주시는 말씀 : 예수를 배반한 유다는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쳐 은돈 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며 말했습니다. “내가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팔아넘기는 죄를 지었소.” 그러나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오? 당신 일이니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3~4절)

1. 예수님을 돈 받고 판 것과,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인한 것. 어느 것이 더 큰 죄일까? 우리는 베드로의 죄보다 가룟 유다의 죄가 더 무겁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두 사람의 모든 행위를 아셨고, 미리 예고하신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사랑하셨다(마 26:20~25; 31~35).

2. 미리 예고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일까? 하나님은 죄를 조장하시거나 유혹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아신다. 마치 자녀를들을 양육하다보면 자녀들의 기질이나 성격, 행동의 패턴, 생각을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가룟 유다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계셨다. 그런 예수님은 그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행할 일들을 미리 예고하신다. 그렇다면 그렇게 미리 예고하시는 목적은 무엇일까?

3.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잘못된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지만, 그 이후에 다시 돌이켜서 하나님에게로 나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 아버지는 그것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하다. 자녀들을 키우다보면 충분히 예측이 되고, 어떤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때 부모가 원하는 반응은 한 가지이다. 자신의 행동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끝까지 거짓말을 하거나 그것을 가지고 너무 자책하는 모습을 본다. 부모 입장에선 그런 모습이 제일 안타깝고 답답하다.

4.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는 어떠하실까? 모든 것을 다 알고 게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실까? 얼마나 답답하고 아프실까? 그래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향해서 이렇게 그 답답하고 아픈 마음을 표현하신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좋았을 것이다.”(마 26:24)

5. 오늘 말씀을 보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유죄 판결을 받으시는 것을 보곤 뉘우쳤다고(remorse, 후회, 가책, 반성, 참회) 말씀하신다. 나는 이것이 잘못된 뉘우침이나 후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문은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지만, 그런 뉘우침이나 후회, 반성이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인간의 양심을 통해서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이다. 하나님 그에게 한번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6. 문제는 그 다음의 선택과 결정이다. 가룟 유다는 은 30을 성소에 던지곤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자신의 상태와 모습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주님에게 나왔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자기가 자기를 정죄하고 판단하여 심판을 내린 것이다. 그런 죄는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스스로 확정지은 것이다.

7. 그렇다면, 무엇이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성경을 통해서 한 가지 힌트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부른 호칭의 차이이다. 마태복음 26장에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선생님’(랍비, 마 26:25)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베드로는 같은 마태복음 26장에서 ‘주님’이라고 부른다(마 26:33, 35).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은 그냥 여러 랍비 중에 한 명이었다. 하지만 베드로에겐 주님이었다.

8.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관계인 것이다(기독교의 핵심은 관계이다).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하고, 어떤 분으로 관계를 맺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호칭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베드로에게 처음부터 온전한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랍비’일 뿐이다.

9. 나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변을 보면 나름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신학까지 공부한 사람들 중에 자신의 연약함으로 넘어지고 쓰러진 사람들이 여럿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런 상황 속에서 회복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신앙을 완전히 떠난 사람, 사역을 포기하고 내려놓은 사람, 신앙생활을 거의 포기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모두 예수님을 주님으로 불렀지만, 전자의 경우는 진짜 주님이었고 후자의 경우는 종교적인 (형식적인) 만남 정도였을 것이다.

10. 인간적인 후회와 참된 회개의 차이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하고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다. 똑같이 넘어질 수 있다. 죄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님으로 고백되어지는 사람들은 그 가운데 주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회복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랍비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후회와 정죄, 실패감, 패배감에 사로잡혀 회복의 길을 걷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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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Responses to 무엇이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

  1. 김성현 says:

    이상준 형제님,
    형제님의 글을 읽다가 한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만약에 믿지아니하는분이 (성령을 받지 않으신 분이) 자기의 어떤 실수를 인정하고 후회하면, 그것이 성령님의 역사라고 할수 있나요? 거듭난 성도나 믿지않는 일반인이나 인간은 모두 하나님께로 받은 양심이 있습니다. (창 1:27 하나님의 모습). 대신 요 13:27 에 유다가 예수님의 떡조각을 받는 순간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 부터 거듭난 제자이고 가롯유다는 사탄의 자녀 이었습니다. 형제님의 마지막 부분이 역시 거듭난자와 사탄의 자녀의 차이가 아닐까요?

    • 이상준 says: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거듭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이 제자로 선택하시고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다는 말인가요?

      • 김세훈 says:

        안녕하세요. 평소에 기재하신 블로그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고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떡을 주면서 할 일을 하라고 하셨을때에 그때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는 말씀을 아실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자에게 사단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비록 사단이 전도의 일을 막을 수는 있지만(바울의 전도여행을 생각할때) 사단의 영이 믿는자의 마음에 들어가서 조종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는 다르게 주님을 믿음으로 나오는 행동을 말씀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물론 예수님께서 유다를 사랑하셨지만 유다는 그 마음이 점점 강팍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유다는 거듭나지 않은 자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리고 위에 김성현님 말씀에 (창1:27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외적인 생김새(빛)와 내면(거룩)을 닮았다고 한다면 애초에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안에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통치권 아래에서 인간은 벗어나게 되죠.
        또한 양심을 말씀하셨는데 양심은 믿는 자들에게 선한양심으로 머물게 됩니다. 목회서신서를 보게되면 믿는 자들 속에 선한양심이 있다고 나오죠 이러한 선한양심은 베드로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어보실때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했던것과 같이 또한 요한이 자기 자신을 고백할때 요한복음에는 주께서 사랑하는 자 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믿지 않는 사람에게 양심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올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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