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

공동체 :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교회

목산교회 김현철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에서 최근 15년 동안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열린 세미나에서 가장 많이 다룬 주제는 단연 교회론이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증거인 동시에, 현재 한국교회가 본질을 상실한 채 어디론가 잘못 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그리고 교회 구성원인 신자들 간의 관계성이다. 미국 샬롯에 있는 갈보리교회 담임목사 글렌 와그너(E. Glenn Wagner)는 “최초의 교회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이 서로 삶을 나누는 가족공동체이었다. 그 이후에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갔는데 거기에서는 교회가 철학이 되었다. 다음으로, 교회는 유럽으로 옮겨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미국으로 옮겨왔는데 그곳에서는 교회가 사업이 되었다.” 라고 말했다. 그에 말을 따른다면, 원했든 원치 않았던 미국 기독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한국교회의 현재 모습은 어떠할까? 예수님이 구상하셨던 교회, 신약성경에 증언된 교회와 한국교회의 괴리는 어느 정도인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교회

기독교가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생명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세월을 오래 보내다 보니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고민의 해답을 성경책에서 찾는다 해도 교회의 본질을 제대로 실현하려는 시도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성경책에 분명히 교회의 정의가 기록되어 있고 교회 역사에 모범적인 공동체의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본질을 실현하지 못한 이유는 듣기만 했지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교회가 어떤 관계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요한이 공동체에 보낸 편지에서도 교회의 정의를 찾을 수 있다. 바울의 편지 이곳 저곳에서 교회의 공동체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특히 다음의 한 구절로 교회는 정의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에베소서 2:19)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가족 같은 분위기로 지내는 사람들의 동호회가 아니라 진짜 가족이다. 가족이라는 단어 속에, 교인들 간의 관계성, 서로에 대한 헌신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예수님은 육신의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암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그리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고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마태복음 12:48~50)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모든 가족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 맏아들 예수가 집안 일을 돌보지 않고 밖으로만 나돌기 때문에 그를 찾아 할 말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어머니와 친족들에게 무례한 발언을 한다. 친족을 향해서는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앞에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며 “너희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헌신한 신자가 내 형제 자매, 즉 가족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혁명적인 발언으로, 그 뜻은 육신의 가족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 가족이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 또는 자매가 된다. 실제로 교인들에 대한 호칭을 형제, 자매로 부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며 그 호칭은 오직 구원 받은 신자들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므로 영광스러운 호칭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발언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란 종교기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성하시는 새 가족이다. 형제처럼 지내는 집단이 아니라 형제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가족 개념을 가지고 교인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헌신한 사람만이 교회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교회의 신비란 사랑을 말하는 것인데 사랑은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야 한다. 재산과 시간과 체력과 감정을 영적인 가족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교회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공동체 경험을 바탕으로 교인들의 관계성이 어떤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 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3:16)

이 구절에서 형제자매는 혈족이 아니라 교회 교인을 가리킨다. 얼마 전까지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지만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만나게 되면 서로를 가족으로, 형제로, 자매로 알아 목숨까지 내어 놓는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 교회 공동체의 특성이다.

아버지로서의 목사 – 아비·자식 관계의 목사와 교인

사람이 사회적 역할을 감당할 때 자신의 신분 범주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면, 열심히 활동을 하지만 그 활동은 올바른 활동도 아니고 타인에게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이런 경우를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라고 하는데, 교회의 목사가 누구인가라는 범주정의(範疇定義)가 잘못되면 사명감을 가지고 평생을 힘써도 실제로는 영적인 일도 아니었고, 교인들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된다. 목사는 누구인가?

육신의 가족을 뛰어넘어, 믿음이라는 공통유전자를 가진 신자들은 하나님의 가족을 이룬다. 교회는 가족이기에 형제 자매 관계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는 영적인 부모자식 관계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는 일만 명의 스승이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여러분을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 일 때문에 나는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얻은 나의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나의 생활방식을 여러분에게 되새겨 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15~17)

바울이 떠난 고린도 교회에서는 경쟁적으로 지도자가 되려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서 교회에 분란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이 권면한 내용은, 교회에 성경교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실상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울이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은 신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복음으로 낳은 자식’으로 묘사했다. 바울은 그들을 아버지의 심정으로 목회했다. 자기가 직접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수 없어서 디모데를 보내게 되었는데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일컬었다. 디모데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때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은 신자이고 2차 여행 때부터 바울과 동행하며 선교사역을 함께 했다. 바울은 디모데와의 관계를 아비-자식 관계로 인식하고 목회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교사는 학생을 끝까지 책임지고 돌보지 않지만 부모는 자식을 끝까지 책임질 뿐만 아니라 자식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관계성이 교회 공동체에서도 발견되어야 한다.

교회는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서 제자를 성숙시키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믿음의 선조를 본받음으로 교인들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가족이다. 교회의 전임목회자나 목자가 프로그램 속에 맡겨진 역할만 하는 기능인이 아니라 교인들을 자식으로 알아 사랑하고 섬기며 돌보는 부모라는 성경적인 공동체 인식이 분명해야 교회의 본질을 유지할 수 있다. 교육자, 상담자, 종교의식 인도자, 설교자는 기능을 일컫는 말이지만, 부모는 관계를 일컫는 용어이다. 교사는 학생을 위해서 죽지 않지만,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전임목회자들과 목자들은 교인에게 기능만 발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전통적인 성직자로서의 목사와 아버지로서의 목사의 일상은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

성직자는 출퇴근이 있지만 아버지는 출퇴근이 없다. 성직자는 교인의 삶의 일부에 관여하지만, 아버지는 교인의 삶의 전부에 관여한다. 성직자는 규격화된 순회 심방을 하지만, 아버지는 밤을 지새워 함께 한다. 몇 가지 질문을 해보자. 자기 교회 청년이 결혼을 하는데 주례자인 목사가 신랑, 신부로부터 사례비를 받아야 하나, 그들에게 축의금을 듬뿍 주어야 하나? 목사가 자기 교회 수양회를 인도하는데 강사료를 받는 것이 옳은가? 목사도 교인 중의 한 명인데 왜 목사는 수양회 회비를 내지 않는가?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교회가 어디서 어떻게 목사를 구하고 있는가? 목사는 과연 어디에서 배출되는 것인가? 신학교인가, 교회인가? 다음은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공고문에 실린 심사를 위한 제출서류 목록이다.

자필 이력서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
본인 소개서
목회 계획서
사모 본인 소개서
정규 대학과 신학대학원 졸업증명서
시무교회 최근 주보
설교 테이프 또는 CD (최근 3개월 이내 2개)
종합병원 건강진단서
학위증명과 자격증 사본

전혀 관계가 없는 외부인이 어떻게 목회 계획을 미리 세울 수가 있을까? 현재 시무하고 있는 교회가 있다면 어떻게 그 교회를 버리고 다른 교회로 갈 수 있을까? 설교 테이프 두 개를 듣고 어떻게 그가 교인들의 아비인 줄을 알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기업의 인사채용 개념이다. 목사도 자신의 입장을 성직자라는 기능인 정도로 인식하고 목회한다면, 결코 교회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다. 교인들이 요구하는 기능만 발휘하게 될 것이다.

신구약 성경을 통털어서 분명히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는 그 교회의 교인 가운데 이미 있기에 그를 발견하여 세우면 되는 것인데 어쩌다가 목사를 외부에서 영입하는 것으로 알게 되었을까? 기독교계 풍토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기원 후 4세기 말부터 로마제국이 로마 카톨릭교라는 국교를 만들어 1,000년이 넘도록 세계를 종교문화화 시켰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로마 카톨릭교의 문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리 성경적으로 목회를 하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로마 카톨릭교는 통치지역의 모든 곳에 종교지도자를 파견해야 하기 때문에 갑자기 많은 지도자들이 필요했고 그 지도자들을 국가가 양성하게 되었다. 종교를 통치방식으로 이용한 것이기 때문에 중앙집권제도와 계급제도를 도입했다. 이렇게 하여 생겨난 것이 성직자 계급의식이다. 로마제국의 권력구조가 신과 동일시되는 황제, 원로, 천부장, 백부장, 사병이듯이 그것을 그대로 벤치마킹 하여 교회에 권력구조를 만들었다: 교황, 추기경, 주교, 사제, 평신도. 평신도와 성직자(특신도)라는 신분의 구별은 하나님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다.

잘못된 로마 카톨릭교의 흔적을 벗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관, 목사관, 교인관, 신앙관 등 신앙의 본질이 상실된 채 상당기간 역사는 흘러왔다. 현재는 어떠한가? 벗어났는가? 과연 지금의 한국 교회가 성경적인 공동체인가? 목사, 장로, 권사, 집사, 평신도라는 교인간 계급제도가 교회를 그르치고 있지는 않은가? 신자 위에 신자 없고, 신자 밑에 신자 없다. 마찬가지로, 교회 위에 교회 없고, 교회 밑에 교회 없다. 교회에 직분(역할)은 있을지언정 직급(階序 hierarchy)은 없다.

목사는 모든 교인들의 목회적 책임을 대행하는 대리인이 아니다. 그도 교회의 한 지체로서 일인 분의 목회를 할 뿐이다. 그 일인 분의 목회라는 것이, 다른 교인들이 자기 몫의 목회를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안내해 주고 모범을 보이는 일이다. 그 결과 모든 교인들이 목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만신자제사장주의와 짝을 이루는 만신자목회자주의 개념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교회의 기초를 영적인 지도자, 지금으로서는 목사라는 직분명을 지닌 교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에베소서 2:20~22)

목사는 채용되는 교회의 최고경영자가 아니라, 세워지는 교인들의 아버지이다. 따라서 목사는 교회의 기초이며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의 삶이 모든 교인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영적인 자녀들은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모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방향을 잃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에게 회복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고린도전서 11:1)

이 발언은 결코 건방지거나 교만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목사라는 역할을 지목하여 세웠다면 그는 당연히 “자신의 삶을 보고 그대로 흉내 내면 제대로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라고 아버지답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교사, 설교자 정도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목사라면 교인들에게 젖을 주면 되지만,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교인들에게 피를 주어야 한다. 목장의 양은 젖을 먹고 자라지만, 교회의 양은 젖으로만은 자라지 않고 영적 아비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사실을 목사들은 명심해야 한다.

아버지의 마음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도자와 목회자로 불렀을 때 그 역할이 영적인 아버지로서 교인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 것이라는 인식이 없었다면,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골로새서 1:24)와 같은 고백은 있을 수 없다. 아버지의 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고린도 교회를 포기했을 것이다. 피눈물이 섞인 네 통 이상의 편지를 보내고, 디모데를 파견하는 등의 비효율적인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의 ‘아버지로서의 목사’ 의식이 없었다면 사도행전 20장 18~35절에 기록된 밀레도에서의 고별연설도 없었을 것이다. 바울과의 관계에서 아비-자식의 관계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 에베소에서 온 노인들이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자기가 직접 전도해서 양육하고 훈련하여 형성된 교회의 교인들을 바울은 어떻게 상대하고 목회했는지는 데살로니가전서 2장 2~11절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2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전에 빌립보에서 고난과 모욕을 당하였으나 심한 반대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3우리의 권면은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이나 속임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4우리는 하나님께 검정을 받아서,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5여러분이 아는 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아첨하는 말을 한 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6우리는 또한, 여러분에게서든 다른 사람에게서든,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한 일이 없습니다. 7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서,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유순하게 처신하였습니다. 8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을 사모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줄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9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파하였습니다. 10또, 신도 여러분을 대할 때에,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올바르고 흠 잡힐 데가 없이 처신하였는지는, 여러분이 증언하고, 또 하나님께서도 증언하십니다. 11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우리는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합니다.”

현재 목사로서 교회의 목회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위 성경구절의 항목마다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동일성을 확인해야 한다. 목사가 아버지로서 교인들에게 헌신하지 않고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의도했던 공동체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됨 – 아버지의 마음 품기

목사가 성경공부나 강의를 통해서 자신의 입장과 역할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했다고 해서 아버지의 역할을 기능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며칠간 아버지스럽게 행동할 수는 있으나 진짜로 아버지가 되어 아버지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일시적인 어릿광대 짓에 불과할 수 있다. 존재가 바뀌어야 태도가 바뀌고 태도가 바뀌어야 행동이 바뀐다. 그러므로 진실로 아버지로 존재의식이 바뀌어야만 아버지로서의 목회적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미 2세기 기독교 세계에서는 교회의 지도자를 교부(敎父 church fathers)라고 불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4세기 이후의 로마 카톨릭교에서는 교부에게서 아버지됨(fathership)은 사라지고 고위 성직자(prelate)라는 종교기능적인 의미만 남았다.

아버지 됨을 회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지령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전임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 교인들의 아버지가 되라는 명령을 받아야 한다. 1,600년 이상 형성된 사람의 전통과 종교의 전통을 따른다면, 또한 기득권 지도자들의 눈치를 살핀다면 예수님의 지령을 수행할 수 없다. 회심(回心)하던 첫 순간에 진심으로 죄인임을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생의 주권자로 모시는 분명한 체험이 있어야 사람의 말은 순종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 순종하는 성향이 생길 것이다. 기초적이고 상식적인 주제이지만 목사가 분명한 회심체험, 주재권 이양의 믿음으로 구원 받은 회심체험(Lordship salvation)이 있는지부터 확인이 되어야 아버지로서의 목회는 가능하다.

둘째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살펴야 할 것은 인간 내면의 문제이다. 자아용납이 잘 되어서 자기 자신을 조건에 관계없이 소중하게 다루고 있어야 기꺼이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아버지로서의 목회를 할 수 있다. 자아용납이란, 열등감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열등감은 교만과 짝을 이루기 때문에 열등감이 해결되지 않은 목사는 교만한 태도로 그 증세를 나타낸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열등감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 기독교계에서 성령님의 비전(vision)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그분의 뜻이 아니라 목사 개인의 야망인 경우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뜻이 영적인 확신으로 포장되면 그 누구도, 심지어 하나님도 그 목사의 뜻을 바꿀 수 없다. 기도하는 교인들은 알아차릴 수 있는 목사 개인의 야망이 집행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권력이 사용된다. 왜냐하면 교인들로부터는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제대로 자아용납이 되려면 이른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충만이란 성령님의 지시에 항상 순복하는 태도를 의미하기 때문에 성령충만함을 받은 목사는 성령님과 다투어 자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성령충만한 상태를 유지하려면 실제적인 기도생활이 밑받침 되어야 한다. 종교의 한 가지 행위으로 기도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진정한 의미대로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체험해야 한다. 그분과 교감을 나누고 그분의 뜻을 시의적절 하게 전달 받을 때 교인들의 아버지로서 교인들이 가야할 곳으로 교인들을 안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목사의 아버지됨은 목사의 부부생활에서 확인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 혼자는 괜찮은데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다면 과연 좋은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가?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부모를 보면서 자란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불안하듯이, 행복하지 않은 부부관계에 있는 목사 내외를 목격하며 교회생활을 해야 하는 교인들은 늘 불안하다. 그렇게 되면 교인들은 목사에게서 더 이상 아버지 됨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아버지 됨은 교인들이 인정, 불인정을 결정하는 것이지 목사 본인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 회중은 목사인 당신을 누구로 알고 있는가?

맺는 말

교회는 ‘죄인임을 회개하고 자기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생의 주님으로 영접한 신자들’이므로, 교회가 이루어지고자 하면 가장 먼저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도가 있어야 한다. 한국 근대 교회사에서 뼈아프게 반성해야 하는 것은 1970년대 이후 전도가 대폭 줄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신자들이 개인의 기호와 취향을 따라 이 교회, 저 교회로 수평이동만 했을 뿐 실제로 새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통계에서도 밝혀졌다. 이 사실은 목사들이 전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석해도 될 것이다. 목사는 아버지로서 어떤 교인보다도 먼저, 그리고 많이 전도해서 영적인 자식을 낳아야 한다.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영적인 친자식들이 있어야 한다. 만일 모델인 목사가 전도하지 않는다면, 교인들이 스스로 알아서 전도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에서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실마리는 목사의 정의(定義)이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의 아버지로 부르셨다는 소명을 재확인하는 작업이 한국 기독교계 전체에 필요하다. 현대의 교회가 기독교학원으로 전락한 이유는 목사가 성직자 계급의식을 갖고 규격화된 기능만을 교인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사도와 예언자’로 대변되는 목사가 교회의 기초라고 한 것은 그가 절대적인 권력자라는 뜻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초인 목사가 아버지의 마음으로 교인들을 위해서 희생하지 않으면 교회의 공동체성 형성이나 회복이란 구호일 뿐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성장 과정 중에 들을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이나 가장 큰 상처를 주는 말, 그리고 수치가 가슴에 새겨지는 말은 ‘아비 없는 자식’일 것이다. 교회가 고아원인가, 가정인가? 어떤 교인보다도 먼저 각 교회의 목사들이 자신의 부르심이 아버지였다는 것을 깨닫고 새롭게 헌신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낭만적인 종교용어일 뿐이다.

엘리야가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엘리사는 “아버지!”를 연호하며 아쉬워했다(열왕기하 2:12). 엘리사가 죽었을 때 여호아스 왕은 “아버지!”를 부르며 슬퍼했다(열왕기하 13:14). 과연 우리나라의 교회들에서 목사-교인의 관계가 이와 같이 아비-자식의 관계인가? 교회라는 신비공동체를 기획하신 하나님께서는 목사로 사명을 주신 자들이 아버지로서 교인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 줄 것을 기다리고 계신다. 교회는, 아버지가 있은 후에 ‘하나님의 가족’공동체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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