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성경적 공동체

현대교회와 성경적 공동체

피터 새비지: 피터 새비지는 기독교 교육학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페루와 볼리비아의 선교사를 지냈다. 현재는 ‘남미 신학연합’의 책임자를 맡고 있다.

완전한 복음을 전세계로

이제 개인주의의 아성은 서구 사회 전반에 걸쳐서 흔들리고 있다. 사람들은 사랑, 우정, 평안, 소속감 등 현대 사회 속에서 잃어버렸던 모든 감정들을 애타게 찾아 헤멘다. 심지어 오랜 세월 동안 전혀 흔들림 없이 지속되어 온 가족의 구성마저도 위협받고 있는 형편이다. 광범위하게 확산된 이런 의식은 최근 신학계에 일고 있는 ‘교회의 재발견(rediscovery of the church)’ 움직임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그런 움직임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추정된다.

이 두 가지 흐름은 모두 과거의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의 한 복판에서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임을 드러내야 할 적절한 시기라 하겠다. 이런 역할을 감당할 때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교회, 로잔언약 6절에 ‘하나님의 우주적인 목적의 핵심이며 복음을 편만케 하시려고 그분이 약속하신 방법’ 이라고 표현된 바로 그런 교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로잔언약에 함축된 의미와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하기에는 매우 미흡한 상태이다.

많은 교회들이 복음 전도에 대한 비전이 결핍되어 있어서 불신자 세계로 스며들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로잔언약은 이런 교회들을 ‘신자들의 집단 거주 지역’ 이라고 표현한다. 또 다른 교회들은 비전은 있지만 그들이 복음에서 벗어나거나 하나님 안에서의 생생한 신앙을 잃어버리면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고 만다. 사람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잃어버린다든지 신분 상승이나 금전 문제에 있어서 사소한 일이라도 정직하지 못할 때에도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선교에 있어서 교회가 무슨 기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교회는 어떤 특별한 문화나 사회/정치 체제, 혹은 인간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되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놓치는 것이다. 이 세대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긴요한 문제는 세계 복음화의 주역으로서 그 책임을 다하는 성경적인 교회 모델을 찾아내는 일이다. 세계 복음화의 과업은 전문가들이나 직업목회자들에게 맡겨서 간단히 완수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로잔언약에 표현된 대로 ‘전(全) 교회가 완전한 복음을 전 세계로’ 전파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일을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야 한다.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백성들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교회가 마땅히 가져야 할 그런 비전을 회복할 때 세계 복음화의 목표는 좋은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현대 교회의 네 가지 모델

오늘날 지역 교회나 ‘모여진 교회’는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는가? 이제 가장 보편적인 현대 교회의 모델 네 가지를 택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현재 교회가 처한 상황을 알려주는 한편 성경적인 교회 모델과 비교하는 방법을 제시해 줄 것이다.

(1) 강의실과 같은 교회

이 모델은 루터와 칼빈시대 이래로 개신교 전통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이 모델의 교회는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가 살아 움직이게 하는 열쇠는 설교이며 그 설교는 교리를 설명하는데 중점을 둔다. 목회자들은 복음적인 교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올바른 믿음을 세우는 방향으로 설교를 이끌어간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들은 비범한 권능을 부여 받은 사람들로 여겨지는데 칼빈은 그 권능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겼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러한 모텔은 뛰어난 성경 해석이 발달하는데 자극이 되기는 하지만 성도들을 수동적으로 만든다. 성도들은 활동적인 주체가 되기보다는 관객이나 방관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들은 끊임없이 목표를 제시 받고 있지만 스스로 목표를 설정할 기회는 거의 없다. 이것은 성도들이 참된 제자로 성장하는데 장애 요인이 된다. 우리 모임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요소는 바로 영적인 성장이다. 그런데 이 영적 성장은 정확하고 정돈된 메시지에서 성경 지식을 요약해내고 재활용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2) 극장과 같은 교회

성도들은 기대에 차서 자리에 앉아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날 밤 죄를 고백하고 지금은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있다. 이제 교회에서 시작될 본격적인 드라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목사가 나타나고 성가대가 찬양을 시작하면 성도들이 화답한다. 모든 관심은 강대상 위에서 막 재연(再演)되려 하는 드라마에 집중되어 있다. 종이 울리고 성가를 부르고 나면 이제 성찬식이다. 목회자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과 피’를 베풀어주신 것을 기념하는 의식에 참여한다. 이 모든 드라마가 끝나면 성도들은 예배에서 받은 은혜를 간직한 채 가정과 사회 활동으로 돌아간다.

이 모델에서 목회자는 성례를 집전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앞서 설명한 모델과 마찬가지로 늘 수동적인 입장에 머무르게 된다. 게다가 교회가 지니고 있는 복음 전파의 잠재력마저도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세계 각처에 가서 전하라는 ‘특별 명령’을 제정해야 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3) 기업과 같은 교회

이 모델에서 교회는 복음을 판매하는 소매상이다. 이것은 다른 상품들이 시장에서 판매되는 것과 아주 흡사하다. 그러한 교회들의 목표는 신앙적인 재화와 용역을 사람들에게 쓸모 있게 만들어 제공하는 것이다.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박사는 기업, 혹은 슈퍼마켓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원리를 분명하게 밝히고 또 그렇게 운영해왔다. “나는 때때로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Garden Grove Comunity Church)를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20에이커 짜리 쇼핑센터라고 말하곤 합니다. 우리 교회는 무료 고속도로의 입체 교차로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외부인을 위한 넓은 주차장과 몇 개의 부속건물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과 예배의 안내서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이 프로그램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찾고 원할만한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게 고안된 것입니다.”

그는 운영 본부로 쓰이도록 커다란 교회 건물이 있어야 하며 공동체를 위해 봉사할 훈련된 평신도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무언가 위대한 일을 행하시길 기대한다면, 그리고 그들의 사역을 더욱 확장 발전시키길 원한다면 원만한 현금유통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 교회는 잘 짜여진 프로그램에 의해 교육받으며 전임 사역자는 팀을 이루어 기업체의 간부 구실을 한다. 성공적인 비지니스에서 도출된 경영 원리들은 전혀 무리 없이 이런 모델의 교회에 적용된다. 이익은 교인의 숫자로 측정되는데 그들이 초신자든, 등록 교인이든, 헌신된 사람이든 구분하지 않는다. 전임 사역자 팀은 고도로 질이 높고 전문적이다. “아픈 곳을 찾아서 고쳐라’는 말이 목표가 되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러한 모델의 교회들은 복음을 사업상의 표현에다 꿰어 맞추려 한다는 말이 나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킨다. 이런 환경에서 성경적인 제자화가 얼마만큼이나 지속될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4) 친목회 성격의 교회

이 모델은 풍요로운 사회가 낳은 문화적인 부작용 가운데 하나이다. 개중에는 교회가 내세우는 사회적 관심과 유익에 마음이 끌려서 마치 친목회에 가입하듯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사회적 지위 따위의 몇 가지 요건만 충족되면 그는 어엿한 회원(교인)이 된다. 사람들은 신앙적인 교제에서 얻어지는 종교적인 유익을 위해서 교회에 등록하거나 교회를 이용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익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헌신적으로 일했던 주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교회에 들끓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영혼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모임은 어떤 목적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그저 위안을 찾아 모였을 뿐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복음을 위하여 모이지도 않았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통치하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이 쓰시는 모임도 아니다. 이 클럽은 그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활동에만 동참하고자 하는 회원들의 ‘숨은 욕구’를 충족시켜 줄뿐이다. 실제로 이 클럽회원의 열도(熱度)는 ‘관계의 질’과는 상관없이 활동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 넣었느냐로 판가름되게 마련이다. 그 신앙클럽은 목회자가 활동의 조정자, 상담자, 혹은 관리인의 역할을 하는 사회활동 센터가 된다. 성취도는 그 클럽이 회원들에게 제공하는 지위, 가치 및 사회적 안정 등에 의해 결정된다. 많은 경우에 그러한 교회는 오로지 사회에서 선택 받는 집단의 요구에 부응할 뿐이며 선교에 대한 소명감이 거의 없다. 또한 그 교회는 자신이 속한 사회집단 밖으로 움직이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는다.

위에 열거한 네 가지 말고도 오늘날 많은 교회모델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소개한 모델들은 다양한 현상 속에서 어떤 개념을 심어주는데는 별 모자람이 없다. 이제 이러한 문제들을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생각해보자.

성경적인 교회 모델

(1) 공동체의 성격

성경에 따르면 크리스찬 공동체는 ‘관용과 응집’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모두 포용하는 동시에 매우 단단한 유대를 맺고 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성령의 이끌림을 받았던 공동체는 모든 구성원이 서로 화합하려고 애썼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피부색이 검든 희든, 지적인 성격을 가졌든 행동 지향적이든, 초신자든 성숙한 신자이든 아무 제한 없이 하나가 되려고 애썼던 것이다.

이런 노력은 사도 바울의 경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 당시 교회 안에서 가장 심각했던 것은 유대계 크리스찬과 비유대계 크리스찬 사이의 문제였다. 이들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운동이 문화와 인종에 따라 나누어지고 자신들의 문화 성향에 따르기를 기대했다. 새로운 일치를 이루라는 바울의 주장은 이런 상황 하에서 나온 것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사도행전 15장은 사도들이 교회 생활에서 이 원칙들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그 원칙은 현대 교회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크리스찬 공동체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열려져 있었다면 어떻게 응집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복종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것을 앨런 스팁스(Alan Stibbs)는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잘 다듬어진 기교로 원숙한 화음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은 개인이나 몇 그룹이 따로따로 갈라진 채로 서로 흉내 내는 것만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각자 자신이 맡은 부분을 분명히 연주하고 노래해야 가능하다. 그들이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있어도 화음을 내는 것은 악보에 따라서 지휘자의 인도에 기꺼이 따르기 때문이다.”

크리스찬 공동체의 토대는 성경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세우신 언약이다. 하나님은 이 언약 속에 그의 백성을 끌어들이시고 세상을 위하여 온 세계로 내보내신다. 로잔언약은 ‘성도들의 집단 거주지’로서의 교회를 깨뜨려버리고 불신자들의 사회로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고 선언한다. 크리스찬 공동체의 토대가 하나님의 언약인 반면 그 언약을 이끌어 가는 원칙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순종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구성원을 크리스찬이라고 부르는데 언약에 참여함과 동시에 주께 복종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안에서 그들을 축복하신다. 세례는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좋은 예표가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덧입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단단한 유대를 갖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공동체 안에서 은총과 직무와 사명을 심어 주어서 성도들이 서로를 세우고 교회의 몸을 이루는 관계를 견고하게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완수해야 할 역할이 주어지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결코 그 사명을 다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크리스찬 공동체는 그 구성원이 성장하도록 격려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표현되기도 한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개인이 성장하는 것과 그의 사역이 커 가는 것과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 한 편 이 사랑은 공동체가 지닌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주어진 유일한 사명은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물질과 정신이 연합된 존재이며 결코 물질과 영혼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할 수 없음을 상기해야 한다. 결국 우리의 사명은 요한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 가야 한다(요일3:17).

성경은 공동체가 반드시 유기적인 존재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점은 교회를 묘사하는데 몸, 결혼, 가족, 형제 등 여러 유사개념을 사용하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공동체는 매우 구체적으로 조직된 형태로 표현되어야 한다. 어떤 공동체라도 형태, 범위, 규율과 승인을 규정하는 기구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공동체는 성령 안에 있어야 하며 성령을 통해 사명을 실천해야 한다. 교회가 실제 세상에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움직일 때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개요를 염두에 두호 성경적인 공동체를 종말론적인 차원, 제자화의 차원, 그리고 성례전의 차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2) 종말론적인 공동체

크리스찬 공동체는 이미 이루어진 언약과 앞으로 이루어질 약속의 선상에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서 미래에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며 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역사에 뛰어든 하나님 나라의 실재 가운데서 산다는 말이다. 공동체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 나라의 성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실제로 그것은 ‘역사를 만드는’ 일을 수반한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크리스찬들의 일상적인 삶에 뛰어들면서 움직이셨던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실재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행5:19,7:52,10:8~43,13:28~41,14:3). 그 공동체는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을 기뻐했을 뿐 아니라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행3:19)’을 간구 했다. 그들은 미래에 완전하게 이루어질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았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인 시각은 초대교회에 세상을 향한 사명의 일체감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세상이 그들을 향해 문을 걸어 잠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을 밀어 제치고 그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사명감은 그리스도의 지상명령(마28:18~20)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했다.

크리스찬 공동체는 ‘새 시대’, ‘새 사람’의 공동체였다. 그들은 새로운 하늘과 땅을 기다리는 나그네였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믿음의 개척자였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감격적이고 가슴 설레이는 인식이 초대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의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은 일을 하는 것처럼 현대 교회의 특징으로 이어져야 한다.

(3) 제자들의 공동체

크리스찬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학습 공동체이다. 주님이 이미 가르쳐 주신 것과 성령님 안에서 계속 알려 주시는 것들을 그대로 따르고 자라 가는 것이다. 우리는 제자화를 두 가지 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먼저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의 관계이다. 폴 미니어(Paul Minea.)는 그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산다. 그분과 더불어 고난을 받으며 영광도 함께 누린다.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고 또한 그분과 함께 다스린다.”

다른 한 측면은 주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분명한 제자화를 이루지 못하면 크리스찬 공동체는 쉽게 신앙 클럽으로 전락하고 만다. 모든 사람을 제자화 해서 다시 제자 삼게 하는 크리스찬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데까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엡4:12~13).
이 제자화 사역의 핵심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섬김으로 또한 그리스도를 섬기게 하는데 있다. 이 공동체는 또한 선교의 수단이 된다.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크리스찬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평화나 부에 대한 약속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크리스찬 공동체에 가입하는 순간 지상명령 성취를 위한 요원으로 위임 받는 것이다.

(4) 성례 공동체

성례 공동체의 핵심은 영적인 헌신과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 있다.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공동체는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 그대로 드리는 헌신을 하게 된다. 이제 이 성례전 공동체를 3개의 국면으로 나누어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 성례 공동체는 이미 말한 것처럼 경배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정기적으로 그리스도의 중보 하심과 하나님의 권능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경배와 감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경험한 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어 있으며 감사는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 재 헌신하는 고백이 된다. 이러한 경배와 헌신의 행위는 말의 차원을 넘어 매우 구체적이어야 한다.

둘째로, 성례 공동체는 중재의 공동체이다. 주님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했다. 그분은 성도들과 일반 사람들, 정부와 그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모범을 보이셨다.

셋째로, 성례 공동체는 고난의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는 남을 위하여, 또한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며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에 동참한다. 고난은 종종 선교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로잔언약은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임을 분명히 한다. 크리스찬 공동체는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토대로한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는 사랑으로 묶여 있는 공동체이기도 하다. 교회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학습 공동체이다. 제자화의 공동체인 동시에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희생의 공동체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처음에 살펴보았던 강의실과 같은 교회, 기업과 같은 교회, 극장으로서의 교회, 친목회로서의 교회 등은 모두 문제점을 함유하고 있다. 하나같이 깊이가 없고 성경적인 공동체에 요구되는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http://jeondo.org/making/community.php?PageNum=030201 이곳에서 발췌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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