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복음의 공동체

김현진 목사 (사귐의 교회)

“그리스도께서 이방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시켜서 이룩하신 것 밖에는, 아무 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표적과 이적의 능력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이룩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하였습니다.” (롬 15:18~19, 표준새버역)

한국 교회의 세속화의 가속과 본질적인 복음의 생명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위기 상황 가운데, 온전한 복음의 내용을 통하여 교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온전한 복음의 반대는 부분적인 북음이다. 한국 교회의 흐름들은 말씀 운동, 성령 운동, 공동체 운동, 사회정의 운동, 선교 운동 등이다. 문제는 한 가지 복음의 특정한 부분에만 극단적으로 치중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분적인 복음에 치우친 행위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막1:15). 그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온전한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삶 자체가 온전한 복음의 내용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셨으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역하셨으며,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셨으며,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선포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예수님은 말씀 자체이셨고, 즉 온전한 복음의 제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능력, 공동체, 정의, 선교로 요약할 수 있다. 온전한 복음의 내용으로 다른 요소들도 더 있겠으나 이 다섯 가지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와 온전한 복음의 상관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1.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과 실행의 최종 권위의 근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한 복음의 기반이며 출발점이다. 성경은 교회의 전통, 개인의 체험, 개인적 계시와 환상보다 우선한다. 성경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매일 당면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근거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한국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들은 말씀의 권위를 수용하는 편이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말씀의 권위를 중요시하는 칼빈주의의 주류 전통 위에 서 있는 한국 교회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라는 소중하고 견고한 유산을 가지고 있다. 독일의 경건주의 신학자 알브레히트 벵겔(J. A. Bengel)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은 교회의 생명력이다. 교회는 성경의 후견인이다. 교회가 강할 때는 성경이 널리 빛을 발하지만, 교회가 병들면 성경은 감금되고 만다. 이처럼 성경과 교회는 다 함께 건강한 모습을 보이거나, 아니면 다 같이 병든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성경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곧 교회의 상태를 좌우하게 된다.”

교회의 건강과 성경의 권세는 서로 맞물려 있다. 교회 생활에서 성경이 제 역할을 못하면 교회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될 수 없다. 교회 공동체는 성경에 계시된 말씀에 충실할 때라야만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근본적인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기이다. 교회는 말씀의 역동성을 온전히 되살려 내어야 한다. 그것은 말씀을 그저 성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특히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성육신 하신 말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타협할 수 없는 관점과 말씀을 철저히 실천하는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이해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을 그대로 믿는다고 하는 복음주의자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회복되어야 한다.

어떤 교단과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 무오한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종교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가운데 종교 다원주위와 혼합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교회 공동체의 가장 근본된 기초는 절대 진리의 기둥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온전한 복음의 근본적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2. 성령의 능력

20세기에 가장 괄목할 만한 기독교 운동은 오순절 성령운동(Pentecostalism) 이며 최대의 성장을 보인 교파는 오순절 교파이다. 1904년 미국의 토페카라는 작은 동네에서 시작된 오순절 성령운동은 당시에는 신자가 약 1만 명이었으나 현재는 전 세계에서 3억 5천만 명의 신자를 가진 교파로 급성장했다. 교회성장 학자인 엘머 타운즈(Elmer Townes) 박사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10개의 교회들 중에 네 교회가 오순절 교파에 속한 교회이다.” 라고 보고하였다.

성령운동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 기독교의 역동적인 영적 현상과 체험을 되살리자는 운동으로서, 성령 세례를 강조하며 방언, 은사, 신유 등과 같은 초월적 현상과 기적을 추구한다. 오늘날 세계교회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현상은 교파를 초월하여 교회들이 오순절 교회를 닮아간다는 것이다. 현대의 크리스천들은 딱딱한 교리보다는 초월적인 하나님과 만나는 영적 체험을, 교회 안에서의 신앙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 현장에서 성령님과 동행하는 역동적인 능력의 삶을 선호한다.

예수님은 40일 금식 기도하신 후 ‘성령의 권능’을 받아 치유, 축사, 기적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120여명의 성도들의 기도 가운데 임하신 성령으로 이루어졌다. 성령의 사역의 특징은 ‘능력(power)’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증인될 것을 당부하셨다(행 1:8), 그 권능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능력이었으며, 성령으로 제자들과 성도들도 동일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교회들이 전통적 신학의 영향으로 이 오순절 성령의 능력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온전한 복음이 이루어지려면 성령을 적극 환영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성령의 권능으로 사역했는데 왜 현대교회는 이 성령의 능력을 회피하는가? 말씀 사역은 고상하고 성령 사역은 저급하다는 것은 이상한 전통이며,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저지하는 사탄의 덧이다.

성령의 역사에는 중생과 성화를 이루는 내적인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통하여 사역하는 외적인 성령의 역사가 있다. 전자에 치중하는 흐름을 ‘내향적 성령운동’이라고 하며 침묵기도, 관상기도 같은 영성 훈련을 한다. 후자에 치중하는 흐름을 ‘외향적 성령 운동’이라고 하며 방언, 예언, 치유, 능력전도 등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들은 주로 내향적 성령의 역사에 치중하는 경향이 짙다. 침묵 기도, 관상 기도 등은 고상한 기도이고, 성령의 세례를 받아 방언으로 하는 통성기도는 저급한 기도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세계적인 개신교 자매회인 독일의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는 수도적인 영성과 성령 운동적인 영성을 모두 견지하여 침묵기도와 함께 방언기도, 예언기도와 신유의 사역도 함께 실행한다. 예수원도 두 영성을 모두 포괄하여 성령 운동과 수도적 영성을 균형 있게 추구한다.

최근 성령운동의 새로운 추세는 성령의 능력과 섬김의 사역이 통합되는 흐름이다.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신앙을 견지하면서 고통 당하는 이웃을 섬기는 ‘섬김의 성령운동’이다. 이 운동은 성령의 능력과 사회 정의를 배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사회 참여의 힘을 성령의 능력에서 찾는다. 섬김의 성령운동은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서 교육과 집을 제공하고, 윤락 여성과 미혼모를 돌보며, 에이즈의 위험성에 놓인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을 운영하며,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며, 빈민가에서 무료진료소를 운영한다. 그리고 사회적 빈곤을 조장하는 사회 체계와 구조의 문제까지 근본적으로 다루려는 단계까지 접근하고 있다. 이전에 민중, 해방신학자들이 다루는 영역의 문제들을 이제는 성령운동이 취급하고 있다. 섬김의 성령운동은 온전한 성령운동의 모습이다. 진정한 성령운동은 민중운동과 통합된다.

현대는 오순절 성령의 시대이다. 중국과 남미의 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들인 외향적인 성령의 역사의 결과였다. 한국교회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은 초대교회의 오순절적 성령의 역사였다.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들도 내향적인 성령의 역사와 외향적인 성령의 역사를 모두 받아들여 인격과 능력이 겸비된 균형 잡힌 영성을 함양하여 온전한 복음의 교회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3. 공동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새 가족이다. 신학적으로 교회의 본질을 ‘성도의 교제(communion of the saints)’라고 정의한다. 성도의 교제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말하며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의 공동체이다. 현대 교회의 문제는 이 공동체가 너무 개념적인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말로만 공동체이지 실제로는 공동체가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공동체는 실제 가족이 되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단순한 종교 단체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가족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물질까지 공유하며 진정한 사랑의 가족으로서의 공동체 삶을 추구한다. 이러한 시도를 ‘기독교 공동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것이다. 사랑이야 말로 결국 최고의 계명이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서로 사랑’은 구체적인 공동체 삶을 통해서 보다 효과적으로 구현될 수 있다. 기독교는 수세기 동안 진정한 의미의 사랑의 공동체를 상실한 가운데 그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이 사랑의 공동체야 말로 온전한 복음을 회복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기독교 공동체에는 수도 공동체, 생활 공동체, 공동체 교회 등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수도 공동체는 공동생활, 영성 수련, 독신의 삶, 생활 공동체는 공동소유, 확대 가족, 검소한 생활, 공동체 교회는 두 종류로서 기성교회 내에 일부 공동생활 그룹을 가지고 있는 경우와 일부 공동생활 그룹은 없지만 교회 지체 전체가 헌신된 공동체성을 지니고 있는 셀 공동체 교회의 형태가 있다.

교회사적으로 기존 교회의 세속화에 반발하여 생명력 있는 기독교를 추구하기 위한 수도 공동체와 생활 공동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A.D.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탄압 받던 지하의 기독교가 사회의 주류 세력이 되면서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본질과 생명력을 점차 상실해 갔다.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반발로 수도 공동체가 등장하였으며 나중에 수도원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중세의 수도원이 이원론적 신비주의로 상당히 오염되기도 했으나, 중세 암흑기에 교회의 본질과 복음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다음 세대에 계승시킨 것은 일부 복음적 수도원들이었다.

복음적 수도원과 함께 교회사에서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의 큰 빛을 던져 준 것은 산상수훈의 철저한 실행을 통한 제자도의 확립과 사랑의 공동체 삶, 평화주의를 확립한 16세기의 재세례파 운동이다. 우리는 후터라이트(Hutterite: 재산공유 공동체), 메노나이트(Mennonite: 지역 공동체성), 아미쉬(Amish: 부락 공동체) 등의 다양한 재세례파 공동체들의 실례를 통해서 공동체에 대한 그들의 풍부한 유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16세기 종교 개혁을 통하여 부패한 가톨릭에서 갱신된 기독교인 개신교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한지 70여년 정도가 지나서 유럽 대륙의 루터교회는 이미 교회의 본질적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주류 교회의 생명을 회복하기 위하여 일어난 갱신의 움직임이 17~18세기의 경건주의 운동이었다. 경건주의는 지적인 교리보다는 내적이며 진심에서 우러나며 체험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중심을 두었다. 또한 기존 교회를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본질적인 공동체로 갱신하고자 했던 운동이었다. 이 경건주의 운동에의 대표적 주자들은 야곱 쉬페너(Jakob Spener), 아우구스트 프랑케(August Francke),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Nicolaus Zinzendorf), 존 웨슬리(John Wesley) 등이다.

야곱 쉬페너는 기성교회 내에서 10명 내외의 헌신된 멤버들의 정기적인 모임인 ‘경건한 모임’을 통해서 헌신된 소그룹 공동체 운동을 펴나갔으며 이를 통하여 기존 교회를 갱신하는 역할을 했다. 야곱 쉬페너의 제자 아우구스트 프랑케는 기독교 학교들을 세워 청소년들을 학교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시키고자 하였다. 지금의 기독 대안학교 운동과 유사하다고 불 수 있다. 아우구스트 프랑케의 제자인 진젠도르프 백작은 자신의 땅에 기독교의 자유를 찾아 나선 모라비안 교도와 다양한 교파 배경의 지체들을 수용하여 성령의 역사로 500여명이 함께 사는 생활 공동체인 헤른후트(Herrnhut) 공동체를 결성하였다. 이 공동체로부터 중보기도 운동과 근대의 개신교 세계선교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760년까지 헤른후트 공동체는 모라비안으로 구성된 226명의 선교사들을 해외 오지에 파송하였다. 모라비안 형제단은 해외 13개 지부를 통해 3,057명이 세례를 받고 6,125명이 모라비안들의 양육을 받았다.

한편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 신부였던 존 웨슬리는 1735년 미국 인디언을 위한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대서양을 건너던 중 폭풍우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던 선상의 헤른후트 공동체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에게 큰 감명을 받았었다. 2년간의 미국 선교사역에 실패하여 영국에 돌아와서 그는 런던의 모라비안 교도의 집회에 참석하여 진정한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모라비안 교도의 본부가 있던 독일의 헤른후트 공동체를 두 주간 방문하여 진젠도르프 백작을 만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본질을 경험하였고 공동체 안에서 실행되고 있었던 10여 종의 소그룹 모임들을 또한 배우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생활공동체보다 헌신된 소그룹 공동체 모임을 통해서 전체 영국 성공회를 갱신하고자 하였다. 주 1회 모이는 밴드(속회)는 10여명 내외의 작은 모임으로서 말씀 나눔, 죄의 상호 고백, 물질 나눔, 형제애적 교제 등의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이 속회 모임은 진젠도르프의 헤른후트 공동체의 삶의 능력과 수준을 기성교회 내의 헌신된 소그룹 모임 안에 안착시키고자 하는 웨슬리의 의도였다. 영국 성공회가 웨슬리의 운동을 배척하자 그 운동은 감리교 운동으로 변환되었다. 웨슬리의 헌신된 소그룹 공동체 운동이 바로 현대 교회의 셀 교회의 기반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셀 교회는 생활 공동체와 기성 교회의 중간적 위치에 있는 소그룹 공동체 운동이다. 우리는 비록 공동체 생활을 하지는 않지만 기성 교회가 헌신된 제자들로 구성되어 자발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을 때 이를 ‘공동체 교회’라고 볼 수 있다. 요즈음 이러한 교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도시에서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없을 경우 기성교회로서 건전하고 헌신된 소그룹 공동체로서 교회의 공동체 됨을 이루어 나가는 교회들은 매우 바람직한 공동체 운동인 것이다. 사실 초대교회는 셀 교회였다. 그들은 한 공간에 모여 살지 않고 각자 집에서 살면서 성령의 역사로 자발적으로 물질을 나누며 공동체를 형성하였다(행 2:44~46). 공동체 신학자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특별한 형태의 기독교 공동체를 교회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신실한 제자도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주님의 임재가 분명하고 철저한 제자도를 실행하는 가운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서로 간에 생명력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고, 또 성경에 부합된 그리스도인의 삶과 복음 증거를 고양하는 것이라면 어떤 유형이라도 수 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서 기존 교회이건, 셀 교회이건, 가정교회이건, 공동생활체이건 모두 수용 가능한 것이다. 공동생활의 공동체가 만능이 아니다. 우리는 공동체 매니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지체들은 “우리는 공동체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하다.”라고 고백하며, 독일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의 창설자 바실레아 슐링크는 “우리가 예수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만큼 지체들에게 더욱 이끌린다.”라고 말했다. 공동체의 형태가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머리이신 주님의 임재하심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현대 의 일부 셀 교회들이 셀(cell)을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한 방법으로 활용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측면도 있으나, 사랑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진정한 본질을 추구하는 셀 교회들도 상당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 운동에는 제도 교회 밖에서 일어난 교회를 갱신하고자 일어난 생활공동체 운동과 제도교회 내에서 교회를 갱신하고자 했던 헌신된 소그룹 공동체 운동(셀 교회 운동)을 모두 포괄해야 한다. 셀 교회는 생활공동체와 기존 제도교회를 연결해 하는 중간자 역할을 하는 공동체교회 운동이다. 제도 교회와 제도권 밖의 기독교 공동체 모두 예수님이 자신의 피 값을 주고 사신 그분의 몸된 교회이다. 예수님은 양자를 모두 사랑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통로로 귀하게 사용하신다. 셀 교회의 출현은 온전한 교회와 온전한 복음으로 나아가는 교회갱신의 희망적 전조이다.

4. 사회 정의

예수님은 누가복음 4:17~19에서 자신의 사역을 가난하고 포로 되고 눈 멀고 눌린 자를 위한 것이라고 천명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에서 ‘주의 은혜의 해’는 구약 레위기 25장의 ‘희년’을 말한다. 예수님의 사역은 표면적으로는 가난한 자를 위한 사역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희년 사역이다. 대안식년인 희년에는 50년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부채가 탕감되어 돈을 내지 않고 자기의 땅을 되찾을 수 있고,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다. 부익부 빈익빈 없이 모두 안정되게 살게 되고, 가난한 동포가 있으면 그를 도와 더불어 함께 생활하는 삶을 의미한다. 희년은 모두가 더불어 함께 잘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를 이루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해법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제도가 인간의 탐욕 때문에 파괴되고 말았다.

구약에서 폐지된 희년법을 예수님이 다시 선포하신 의미는 다음과 같다. 성령을 받아 내적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자원하여 나누고 섬김으로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를 만들어 가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신약의 희년 사역이며 교회가 바로 희년 사역의 통로이다. 구약의 희년의 기능은 신약의 ‘코이노니아’로 대체되었으며 코이노니아의 삶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적 삶을 넘어서 대사회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원적인 나눔과 섬김으로 사회 문제를 교회 공동체가 스스로 해결하라는 신약적 인권 선언이다.

예전에 교회 사역은 복음 선포가 우선이냐, 사회 정의 사역도 포함시켜야 하느냐 라고 하는 신학적 논란이 있었다. 초대교회는 극적인 나눔으로 교회 지체들과 주변에 “가난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행 4:34)라고 증거한다. 신약 교회는 대사회적인 코이노니아를 시행하여 본질상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 교회이기에 복음 선포와 사회 정의의 구분은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누가복음 4:17~19 에서 예수님의 사명 선언은 단지 가난한 자에게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이 임하므로 가난한 자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즉시 물질을 가난한 자와 나누어 희년을 실천하였다. 즉 희년을 실천하는 것은 법을 지키거나 인간의 정의감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에 의해 자원해서 지키게 된다는 말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눅 4:17~18)”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았을 때 가난한 자들에게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진정으로 가난한 자와 함께 하고자 하는 사회정의 운동은 바로 성령과 함께 가야함을 보여준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회정의 사역을 해야 할 때 균형 잡힌 인권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가난한 자는 성령의 우선적 사역 대상이다. 즉 성령운동은 방언, 예언, 치유, 축사 사역 등 능력 사역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우선적으로 돌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가난한 자는 헬라어 원어로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으로 가난한 민중(ptokos)’을 지칭하는 말이다.

예수님의 사명 선언은 ‘온전한 복음(whole gospel)’의 요청이다. 즉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영적이기만 한 복음도 아니고 사회 정의적인 복음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복음은 영육의 문제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복음’이란 의미이다. 예수님의 이 선언 안에서 복음주의와 사회주의가 함께 가며, 성령운동과 사회운동이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명 선언은 ‘총체적인 복음(holistic gospel)’의 선언이다.

성경은 빈곤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게으름이 아니라 불공평과 압제의 구조라고 밝힌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불공평의 희생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역사 속에 일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서 태어나서 가난한 자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셨고 고통 받는 자를 치유하셨으며 귀신들린 자를 해방시키셨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가난한 자 중에서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하셨다. 예수님은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의 불공평과 위선 그리고 가난한 자에 대한 그들의 종교적 및 경제적 압제를 문제 삼으셨다(마 23:1~36; 막 12:38~40; 눅 20:45~47).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정의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삶에 개입하셨다. 참으로 의로운 교회라면 가난한 자의 정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하나님의 백성은 가난한 자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교회는 가난한 자들 속에 있을 때에 그들을 진정 위할 수 있다. 교회의 전도와 사회 참여와 생활 방식을 통해서 가난한 자를 특별 관심사로 삼아야 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들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교회가 할 일은 다음과 같다.

1) 교회는 스스로를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해야 하고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가난한 자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2) 교회는 가난한 자의 권리를 변호해야 한다(사 1:17; 58:6~7; 암 5:14~15, 24). 가난한 자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그들을 구제하고 그들에게 생업의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 자신의 생활방식을 점검하고 더욱 검소하고 책임 있는 생활방식을 추구해 나간다.

3) 교회는 가난한 자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해야 한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구주와 해방자로 선포하고 알려야 한다. 단순히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삶을 통해서 복음을 살아내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가난한 자와 삶을 함께하면서 복음을 제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고통 당하는 이웃과 더불어 함께하는 나눔의 삶은 대개의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들이 지향하고 있는 요소이다. 교회가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 한다면, 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충성의 확실한 표지이며, 대개의 경우 근본적인 갱신의 징조가 된다.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가 될 대에 사회 정의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며 이를 통하여 온전한 복음이 더욱 구현될 것이다.

사회 정의 문제와 함께 생태 운동도 부가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생태학과 환경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생태학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아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환경을 조성하는 분야를 다룬다. 생태학은 조화로운 지구촌 가족의 삶을 위해서 물질적,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영적 모든 요소들이 밀접하게 상호 관계되어야 한다고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생태학적 요청에 따라 근자 한국에 생태 공동체들이 매우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생태 공동체들이 비기독교 공동체들이며 혼합주의와 종교 다원주의 사상에 접목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들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유기체성을 더욱 함양하기 위한 기독교 생태공동체 운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가야 한다.

5. 선 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러 이 땅에 오셨다. 선교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부과하신 지상 명령이며(마28:18~20; 막 16:15), 교회가 감당해야 할 최종적인 사역이다. 에밀 부르너가 말한 대로 “불이 타는 불길 때문에 존재하듯이 교회는 선교 때문에 존재한다.” 선교에는 하나된 사랑의 공동체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심적 선교(와 보라)와 나가서 불신자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는 원심적 선교(가서 전하라)가 있다. 선교의 출발점은 나가서 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서로 사랑하는 것에 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라고 말씀하셨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진실 되게 사랑하는 한 몸의 삶을 보여주면 불신자들도 그러한 사랑의 공동체 삶에 이끌리게 되고 또한 어떻게 그러한 삶이 가능한지 호기심을 갖게 된다. 바로 그때 사랑의 공동체 삶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줌으로서 예수님을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보이는 사랑의 몸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공동체 삶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사랑의 삶을 통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구심적 선교의 삶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들이 구심적 선교를 이룰 정도의 수준은 아직 미미하다.

또한 나가서 직접 불신자에게 복음을 외치며 전하는 원심적 선교도 병행해야 한다.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고 하면서 이웃 주민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도 균형을 잃는 것이다.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고상하고, 입으로 복음을 외치는 전도는 저급한 행위라는 편견도 버려야 한다. 미국의 베다니 공동체(Bethany Fellowship)는 희생적인 공동체 삶으로 350여명의 해외 선교사를 파송 하지만, 인근 지역에 나가서 거리 전도와 축호 전도도 실행하고 있다. 120여 년 전 미개함과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조선에 토마스, 언더우드, 아펜셀러 등의 선교사들이 조선이라는 먼 나라까지 와서 복음을 입으로 직접 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고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겠는가? 현재 선교사들을 통한 복음의 서진 운동은 70년대의 중국, 80년대의 러시아, 90년대의 중앙아시아, 2000년대의 페르시아, 현재 아랍 등의 지역들을 강타하고 있으며 유대인 복음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한국교회가 특히 해외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세계복음화에 앞장서는 선교대국이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다. 해외선교를 통한 주님의 지상 명령에 한국 교회가 적극 참여 해야 한다. 그러나 보다 온전한 선교가 되기 위해서는 구심적 선교와 원심적 선교를 균형 있게 실행하여 ‘온전한 선교’를 펼치는 한국 교회가 되어야 한다.

종합적으로 진단해 볼 때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초는 건강한 편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중생과 성화를 강조하는 성령의 내적 역사에 치우쳐 있다. 공동체에 관해서는 셀 교회 운동이 일어나 교회 공동체성 향상에 약진이 있었으나 셀 교회 운동은 대게 교회 성장의 방편에 기울어져 있다. 기독교 공동체 운동은 일부 생활 공동체의 양식에 치우쳐 있어 한국의 기존교회에 깊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가난한 자와 함께하는 사회 정의의 추구 역시 취약한 단계이다. 선교는 원심적 선교인 해외선교는 강점을 보이나 구심적 선교는 미미한 단계이다. 말씀, 성령의 능력, 사랑의 공동체, 사회 정의, 세계 선교라는 요소로 이루어진 온전한 영성에 비추어 보면 한국의 교회는 아직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는 말씀은 강조하나 성령의 능력은 외면한다. 선교에는 적극적이지만 사회정의 사역에는 소홀하다. 구제는 강조하나 전도와 선교에는 소극적이다. 이러한 현상은 각 교파와 교단의 신학적 경향에 기인한 것이다. 예수원의 고 대천덕 신부는 이를 두고 ‘분열된 복음의 재난(Disaster of the Fragmented Gospel)’ 이라고 표현했다. 서로 교파의 상이한 신학적 노선이 온전한 복음의 추구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에 자신의 선교 사역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복음 전파 사역이 예루살렘에서 일루이곤(현재의 알바니아) 지방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말(word)과 행동(work)과 표적과 이적(wonder)으로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방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시켜서 이룩하신 것 밖에는, 아무 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표적과 이적의 능력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이룩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하였습니다.”(롬 15:18~19)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전파하는 것이며, 행동은 이웃을 섬기는 다양한 일이며, 표적과 이적은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기적적 사역을 말한다. 바울이 바로 총체적인 복음의 내용으로 사역했음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총체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서 발칸 반도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총체적인 복음으로 사역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교회에 복음의 본질을 보여주고 한국 교회를 이끌고 나가야할 사명을 지닌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들이 온전한 복음의 영성으로 균형 잡혀있을 때에 한국교회 갱신에 바람직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레바 플레이스 공동체(Reba Place Fellowship)는 말씀을 순수히 믿으며, 관상기도와 함께 방언, 예언 등 성령의 능력을 통한 체험적인 신앙을 추구하면서, 도시에서 공동소유, 공동생활의 공동체와 지역 교회의 역할을 겸하는 공동체 교회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나아가 교회 주변의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한 다양한 구제와 인권 신장을 위한 사역들을 활발히 펼침으로서 사회 정의적인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또한 해외 7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계 선교 사역에 동참한다. 이로서 레바 플레이스 공동체는 균형 잡힌 영성을 추구하는 온전한 공동체의 모델로서 미국과 전 세계의 공동체운동을 선도하고 있다. 1992년 제 2회 공동체 세미나 시 레바 플레이스 공동체의 대표 버질 보트(Vergil Vogt) 목사를 주강사로 초청하여 온전한 복음을 실천하는 공동체의 풍미를 접할 수 있었다.

이 시대는 말씀 운동과 성령 운동이 만나고, 내향적인 영성 운동과 외향적인 성령 운동이 소통하며, 사회정의 운동과 오순절 운동이 합력하며, 구심적 선교와 원심적 선교 방식이 함께 시행되는 균형 잡힌 ‘온전한 복음(whole gospel)’이 형성되는 영적 호기이다. 현대는 교파와 교단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제도 교회와 선교단체와 기독교 공동체들이 서로 융합하여 본질적 교회가 출현될 수 있는 2,000년 교회사 사상 교회의 봄날을 구가할 수 있는 카이로스의 때이다. 이것은 바로 주님의 재림 전에 있을 성령의 늦은 비의 역사의 때가 세계 복음화 운동과 함께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 안에 개체주의와 편협하고 배타적인 영성, 생존 지향적 태도를 깨고 균형 잡힌 온전한 복음으로 회복된 공동체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할 때에 한국 교회에 희망이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힘 있게 이 땅 위에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맺는 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적 중보기도를 드리면서 예수님은 네 번이나 ‘일치’를 위해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즉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하나이듯이 제자들과 앞으로 예수 믿을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거하도록 기도하셨다.

기독교 공동체는 갈라진 교단과 교파들이 서로 화해하고 일치할 수 있는 열린 만남의 장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일치 사역의 중재자이며 매개체 역할을 한다.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는 기독교 공동체는 교회 갱신의 샘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 운동은 한국 교회의 영적 나침판과 희망이 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 한국 교회는 어디서 교회의 소망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와 타인을 위해 나누고 섬기는 기독교 공동체들이 서로 하나 됨을 이룰 때 진정한 교회갱신 사역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들이 예수님이 피를 토하며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의 중보기도에 부응하여 서로 하나 되는 ‘기독교 공동체들의 일치’ 사역에 힘써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 공동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회복을 위한 일이다.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들이 온전한 영성을 기반으로 하여 하나 된 모습을 이룰 때, 혼란한 한국 교회는 교회와 복음의 본질인 일치된 공동체 운동을 주목하고 올바른 방향을 잡게 될 것이다.

온전한 복음의 온전한 공동체 운동은 인간의 노력으로 될 수 없다. 1700년대의 진젠도르프의 헤른후트(Herrnhut) 공동체가 경건주의 운동의 요람이 되고 근대 세계 선교운동의 효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선교를 위한 ‘100년 연쇄중보기도 운동’ 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헤른후트 공동체에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 공동생활의 공동생활, 자체 셀 모임, 교회갱신, 지역 구제사역, 해외선교 등 총체적인 복음의 요소를 거의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24시간 쉬지 않고 100년 동안 한 중보기도에 그 비밀이 있다. 우리가 일할 때에는 우리가 일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When we work, we work. When we pray, God works.).

한국교회가 바울이 말한 ‘영광스러운 교회’(엡 3장)가 회복될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쉬지 못하시게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사 62:7).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도 금식 기도로 시작되었고, 매일 기도로 사역을 온전히 수행하시고. 최종적 십자가 사역도 겟세마네의 기도로 완수하셨다. 성령의 강림과 교회 탄생도 제자들과 성도들의 합심 기도 모임으로 이루어졌고, 안디옥 교회를 통한 세계 선교도 합심 금식기도 중 이루어졌다. 예수님도 기도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맡기신 사역을 모두 이루셨다면,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한국의 모든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들이 연합하여 중보 기도하는 기도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러할 때에 연합된 중보기도를 기반으로 하여 온전한 복음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운동이 성령의 역사로 일어날 것이다.

(Visited 1,471 times, 1 visits today)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