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

묵상한 말씀 : 고린도후서 1:1~11
나에게 주시는 말씀 : “우리는 마음에 사항 선고를 내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9절)

1. 요약

사도 바울과 디모데는 고린도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쓴다.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겪은 환난(고난)을 언급하며, 그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경험 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동일하게 어려움을 경험하는 자들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고 고백한다. 또한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의 고난을 겪었는데,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아닌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고 고백한다.

2. 깨달은 말씀

가. 1~2절을 보면 먼저 이 편지를 보낸 사람들과 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바울과 디모데가 고린도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나. 3절부터는 환난(고난)과 위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일행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환난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환난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었는지는 알 수 있다. 8절을 보면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질 지경”이 되었으며, “우리는 마음에 사형 선고를 내려야”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한 마디로 죽음의 위기 앞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냥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극심한 고난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 하지만 그런 상황 가운데 사도 바울 일행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이것도 구체적으로 어떤 위로인지를 밝히지 않는다. 영적이며 내적인 위로인지, 관계적인 위로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위로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자비의 하나님, 모든 위로의 하나님”(the Father of compasssion and the God of all comfort, 3절)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께 받는 위로”(4절), “그리스도를 통해서 넘치는 위로”(5절)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라.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로를 통해서 지금 고난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고린도 교회)을 위로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4절). 그렇다면 이 위로는 다른 차원의 위로이다. 사도 바울과 그 동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1차적인 위로를 받았다면, 두 번째 언급되는 위로는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에 나누어지는 2차적인 위로인 것이다. 이 2차적인 위로는 매우 중요하다. 6절을 보면 그것이 하는 역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 위로가 여러분 가운데 역사함으로 여러분이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고난을 당할 때도 잘 견뎌 내게 된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들이 나누는 위로는, 다른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격려와 에너지가 된다는 것이다.

마. 고린도와 아가야 교회들이 지금 어떤 고난을 겪고 있는지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교회 공동체들도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이 경험한 고난과 위로에 동일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7절). 이것을 통해 사도 바울의 일행이나 고린도와 아가야 교회들이 같은 고난을 경험했고, 그것을 통해서 같은 위로를 경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 8절과 9절을에는 사도 바울 일행들이 경험한 고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고백이 나온다. 그들에게 닥친 환난은 그들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얼마나 어려웠는지 살아야겠다는 소망이 끊어질 정도였으며, 스스로 마음에 사형 선고를 내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통해서 그들은 중요한 한 가지를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유한함이다. 인간은 고난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자각하게 된다. 이것은 동시에 진정으로 의지하고 신뢰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오직 하나님만이 의지하고 신뢰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유익 중의 하나이다.

사. 이것은 과거 경험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지난 고난의 시간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일하시고 역사하셔서 큰 죽음의 고비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보호하셨다. 사도 바울은 그런 과거의 경험들을 통해서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동일앟게 건져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소망한다(10절).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함께 기도로 협력해 주기를 고린도와 아가야 교회들에게 요청한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서 사도 바울의 일행들에게 부어진 은사들이 사용됨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들이 일어나길 소망하고 있다(11절).

3. 적용

고난을 겪어보고, 그 시간을 통과해 본 사람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만이 다른 고난 받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동일한 마음으로 그들을 위로할 수 있다. 또한 고난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 인간은 교만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인생이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과 인생 가운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를 알게 되면 겸손하게 된다. 개척하고 지난 4년이 나에겐 이런 시간들이었다. 주변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절실하게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젠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위로를 가지고 고난 받는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4. 기도

이제 눈을 들어 하늘 아버지를 보게 하소서.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주시는 위로를 누리게 하소서. 그것을 통해 고난 받는 사람들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소서. 나의 고통, 나의 아픔만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주변의 사람들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소서.

영적 아비의 마음

CathPT_RefFathersHeart_1묵상한 말씀 : 고린도후서 12:11~21
나에게 주신 말씀 :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아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14절)

다시 한번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그 마음을 두 단어로 정리하면 ‘아버지의 마음’ 혹은 ‘아버지의 사랑’이다. 지금 사도 바울은 어떤 조직의 리더나 사도로서(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강조하긴 하지만) 고린도 교회 공동체를 향해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다. 영적 아비, 영적 목자로서 깨어지고 상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저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글을 적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천천히 읽다보면 사도 바울 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되어지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느껴진다. 답답함, 안타까움, 대적자들을 향한 분노, 사랑, 상하고 깨어진 마음, 두려움, 머뭇거림, 근심, 불안 등등… 어찌보면 잘 이해가 되지않는 상황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세운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 자신이기 때문이다. 어떤 수고와 노력과 헌신과 애씀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어떤 성령의 역사들이 있었는지 누구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쉽게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과 유혹에 넘어가서 공동체 전체가 분열될 정도로 흔들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교회 공동체를 향해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호소하고 자신의 마음을 나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상황을 해결하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길 원한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위해 사람들을 보내기도 하고 편지를 직접 쓰기도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신이 직접 고린도를 방문하려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런 모든 행동의 동기는 오해받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또한 어떤 도움을 좀 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전적으로 고린도 교회 공동체를 위한 것이고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14절).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고린도 교회 공동체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영적 아비의 마음이다. 더 넓게 확대하면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고 마음인 것이다. 자신의 어떤 이득이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이 섬겼던 공동체를 위한 마음… 그래서 어찌해서든지 그들을 다시 진리 안에, 하나님 안에서 바로 세우려고 하는 깨어진 목자의 마음인 것이다(19절). 그 마음으로 계속 고린도 교회 공동체에 호소한다. 또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서 두렵지만 사도 바울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멈추지 않고 호소하고 또 호소한다.

어떻게 보면 이런 사도 바울의 모습이 매우 어색하다.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사람이니 충분히 그 공동체를 향해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단호함과 강력함으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을 징계하거나 공동체 밖으로 출교 시킬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가지고 계속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과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런 카드를 꺼내어 들지 않는다. 끝까지 설득하고 인내하고 기다린다.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준다.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그들 안에 있는 죄들을 지적한다. 심판자의 마음이 아니라 아비의 마음으로 말한다. 강한 자로 그들에게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사도 바울의 모습이 매우 어색하다. 왜냐하면 내가 만난 많은 리더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영적 리더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쉽게 징계하고 심판했으며, 기다려 주거나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 차이를 만드는 원인은 명확하다. 아비의 마음이 있으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조직의 리더, 책임자는 존재했지만 아비는 없었다는 것이다. 조직의 리더는 명령하고 굴복시키고 정죄하고 심판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쉽게 잘라 버린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을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자식을 이용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을 온전히 드려 자식의 필요를 채우고 돕고 인도한다. 죄를 지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인내함으로 기다린다.

요즘 한 공동체를 이끈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배운다. 한 두번의 설교로 사람들이 변화되고 새로운 사역들이 시작된다면 목회처럼 쉬운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란 존재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자주 실망하게 되고 낙심하게 될 때가 많다. 어느 때는 무엇인가 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또 다른 때는 아무 것도 된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 자주 불안하고 두렵다. 답답하다. 하지만 다시 아비의 마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섬기고 진리로 세우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관계를 깨지 않고 사랑으로 계속 호소해야 한다. 내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며 섬겨야 한다.

이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은 하늘 아버지가 하실 일이다. 나는 진리로 사랑하고 섬기고 인내하며 돕고 섬기는 일이다. 계속해서 아비의 마음을 배우자. 다른 사람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깨뜨리자. 겸손함과 낮은 마음으로 영혼들을 대하자. 이것이 내가 하늘 아버지 안에서 그리고 영적 아비로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약함의 영성 VS 강함의 영성

10059322묵상한 말씀 : 고린도후서 12:1~10
나에게 주신 말씀 :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10절)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도 육신적으로 자랑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사실 누구보다 놀라운 신앙 체험을 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다. 그는 셋째 하늘까지 올라갔으며, 그곳 낙원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것들에 대해서 들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런 것들을 더 이상 자랑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대신 자신에게 있는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 가지 개인적인 간증을 이야기한다.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는데(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안질이나 간질이 아니겠느냐고 말하지만 그것도 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위해서 세 번이나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으로부터 온 대답은 의외였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왜냐하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약함이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고난과 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하겠다고 결단한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과 사역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러 있게 하겠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얼마전 페북을 통해 어느 목사님이 친구 요청을 하셨다. 전혀 알지 못하는 분이라서 어떤 분이신가 궁금해서 그 분의 페북을 잠깐 살펴보았다. 영성과 은사를 강조하시면서 예언 사역과 치유 사역을 하신다고, 어려움이 있다면 자신에게 상담을 요청하라는 내용의 글이 여러 차례 올려져 있었다. 나는 예언이나 치유 사역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강조하고 교회 안에 이런 은사들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자신에게 어떤 은사가 있는지를 드러내면서 와서 상담을 받으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인 가치는 아니라고 본다.

더불어 최근에는 천국에 갔다 왔다는 간증을 듣거나 책이 출판되어 나온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실로 놀라운 체험을 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그런 체험 자체를 너무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인 가치는 아니라고 본다. 사도 바울도 그런 체험을 했지만 구지 그것에 대해서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잘못하면 자신을 드러내는 자랑거리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학력이나 외모, 건물의 사이즈와 교인들의 숫자,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은사들을 통해 자신이 유능하고 대단한 사람으로 대중 앞에서 인정받기를 원한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드러내고 나타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것과는 정반대의 원리를 가르쳐 주신다. 오히려 약할 때 강해진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나약하고 연약해져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과 강함이 드러나고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약함의 영성’이라고 부른다. 세상은 더 강해져야 하고, 더 많이 소유해야 하고, 더 많이 배워야 하고, 더 많은 은사들이 있어야 하고,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해야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속삭인다. 하지만 하나님은 반대로 일하신다. 인간이 약해져 있어야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난다. 신앙생활은 인간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어떤 일들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행하심으로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연약함과 나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능하심을 드러낼 수 없다. 철저하게 낮아지고 연약해지고 무력해져야 한다. 그래서 “할 수 없다”는 진정한 고백이 나와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이즈의 일들을 시작하신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하신다는 것이다.

내 삶속에 강함과 성공만을 강조하는 세상 속에서 약함의 영성을 다시 회복하는 사람이 되길 기도한다. 더 나약한 자로 발견되어지길 기대한다. 믿음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날마다 고백하자. 그런 다음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기회와 시간을 내어 드리자.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What-Is-the-Gospel

묵상한 말씀 : 고린도후서 11:1~5
나에게 주신 말씀 :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또 내가 너희와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고 또 조심하리라”(고후 11:4, 9)

아침에 말씀을 묵상하며 회개합니다!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결국 조국 교회의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온전한 복음에서 떠나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전하고, 다른 영을 받게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더불어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하겠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 목회자들(사역자들) 안에 필요한 것은 아닌가? 값없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빈곤과 싸우면서도 고린도 교회 앞에 당당하기 위해 수고하는 사도 바울의 삶을 배워야 하지 않는가?

이것은 누구를 비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이다. 매 주일마다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나이기 때문이고,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도 나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 원초적인 복음을 잃어버린 나의 문제이다. 복음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나의 문제이다. 복음을 위해 대가을 지불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있는 나의 문제이다.

한국 교회의 타락은 강단의 타락이고, 강단의 타락은 바로 나와 같은 목사들의 타락이다. 복음과 말씀을 맡은 자로 합당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나의 죄가 문제인 것이다. 세상의 가치와 타협하고 물질적인 가치를 버리지 못한 나의 죄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아침 회개하고 또 회개한다. 나의 죄라고… 나의 문제라고… 복음의 가치를 내가 훼손 시켰다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매일 머뭇거리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