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의 확인

오늘 신학 공부를 하겠다는 분을 만났습니다. 요즘은 이런 분을 만나면 가급적이면 하지 마시라고 권면을 합니다만, 이 분과는 아직 관계 형성이 부족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곧 기회가 되면 구체적으로 나눌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대신 평소에 생각했던 ‘부르심’을 확인하는 두 가지 전통에 대해서 나누어 보겠습니다.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한다면 (1) 개인적이고 내적인 요소와 (2) 공동체적이고 외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이고 내적인 요소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개인의 경건과 기도, 결단에 맡기는 것입니다. 뭐 성경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개인적이고 내적인 사건이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그 부르심은 공동체 안에서 확인되고 점검되어야 합니다(신약의 교회론적 입장에서). 왜냐하면 그 부르심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목적지는 세상과 공동체를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의 본질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이나 헌신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부르심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고 세상을 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동체를 통해 부르심을 확인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간단하게 말하면 공동체의 동의와 지지, 확인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일정 기간의) 특별한 과정을 통해 그것이 확인되고 점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예를 든다면, 적어도 복음전도의 열매가 있어야 하며, 영혼들을 돌볼 수 있고,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로 세워지는 열매들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교회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목장을 섬길 수 있어야 하고, 그 목장이 건강하게 재생산 되어 분가하는 열매들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속한 공동체는 그런 열매들을 확인해야 하고,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지를 일정 시간을 통해 점검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공동체가 그리고 개인들이 그런 과정들을 무시하거나 점검하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부르심은 개인의 영역으로는 존재하지만 공동체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부르심은 개인의 은사나 지적 능력의 영역으로 전락해 버렸고, 사역은 공동체와 별개의 사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부르심은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먼저는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을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 확인하는 과정도 거쳐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가 속한 공동체가 그 사람을 안수하여 세워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부르심은 절대 개인의 차원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동체를 통해서 점검되고 확인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대안 공동체가 필요하다

어제 잠을 깊이 잘 수 없었다. 무례함을 넘어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들의 이야기가 밤새도록 맘을 무겁게 했다. 최근 동남아에서 사역하는 지인의 말이 자꾸 떠오른다. “한국은 경제 발전의 모델이 아니다.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지만 맘몬주의에 빠져 사람보다 돈이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 그렇다. 오히려 동남아가 경제적으론 못 살지만 공동체 정신과 인간미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말인가?).

한국이 그렇게 강조하던 정'(情)은 이제 교회 공동체 안에서조차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더 이상 대안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추악하고 더러운 욕망들을 투영하는 종교적 시궁창이 되어 버렸다. 세상은 자신들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지만 교회는 종교적인 가면 뒤에서 은밀하게(소위 영적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들먹거리며) 행해지기 때문에 더 추악하고 더 더럽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을 성도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모이는 단체를 교회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젠 어떤 미련도 기대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대신 새로운 대안 공동체와 삶을 찾아 나갈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왕국의 복음이라는 거대 담론을 실제 삶의 현장 속에서 실천하고 구현하고 순종하려는 몸부림이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다름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 공동체이다. 건물이나 장소가 아닌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아닌 하나님 왕국의 복음을 소유한 사람들의 공동체 말이다.

이제 그런 가치와 진리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다. “이러다가 나아지겠지, 언젠가는 하나님이 일하시겠지”라고 생각하며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다. 함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작은 발걸음이라도 내딛어야 한다. 2019년에는 그 일을 시작할 것이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도전할 것이다.

감정을 다루어야 회복된다

[그림 1 - 중독 나무]

[그림 1 – 중독 나무]

1. 어제 올린 글(균형 잡힌 내적 치유 사역)을 아는 지인이 읽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자신도 ‘트라우마 B’보다는 ‘트라우마 A’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래서 ’트라우마 A’에 대한 사역들을 구체적으로 시작하고 싶은데 도움이 되는 자료나 도서를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2. 결론부터 말하자면 ‘트라우마 A’를 다루고 치유하는 길은 두 가지 밖에 없을 것이다. 첫째는 건강한 가정이고, 둘째는 친밀한 소그룹이다. 이것은 어떤 기술이나 방법, 도구의 문제가 아니다. 더더욱 어떤 프로그램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이미 앞의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트라우마 A’는 관계을 통해서 받아야 하는 사랑과 돌봄과 지지와 보호와 양육이 지속적으로 결핍 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기적인 어떤 프로그램이나 사역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뜻한 사랑이 있는 공동체이다.

3. 생명이 있어야 생명을 낳는다.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관계 안에서 받아야 하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관계를 통해서 재 경험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어떤 프로그램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직 진실하고 따뜻한 관계를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고, 그것이 채워져야 ‘트라우마 A’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

4. 사실 ‘트라우마 A’(그리고 ‘트라우마 B’)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개념의 배경이 되는 중독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본인이 훈련을 받은 ABCS(중독상담사역학교)에서는 중독을 나무로 설명을 한다. 그래서 ABCS에서는 ‘중독 나무’라고 부른다. 나무에서 열매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세 가지이다. (1) 토양, (2) 뿌리, (3) 가지이다. 그림을 보면 잘 나와 있듯이, 중독 나무의 토양은 학대(트라우마)이다. 이 학대는 A형(지속적인 결핍)과 B형(나쁜 사건들)으로 나눌 수 있고, 이것은 다시 성적 학대, 신체적 학대, 영적 학대, 정서적(감정적) 학대로 구분할 수 있다. 나무에서 토양은 너무도 중요하다. 어떤 토양에 나무가 심어져 있느냐에 따라 열매가 뿌리와 열매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작업은 토양을 바꾸는 것이다.

5. 그 다음은 뿌리의 문제이다. 중독 나무에서 뿌리는 ‘감정’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있어 감정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감정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학대(토양)로부터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그림에는 네 개의 감정(수치심, 분노, 슬픔, 외로움)만 표시되어 있지만 더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사람의 내면에 존재한다(두려움, 외로움, 죄책감 등등). 우리가 보통 내면의 상처를 치유한다고 할 때 주로 다루는 것이 이 부정적인 감정의 문제이다(그래서 어떤 책의 제목은 ‘상한 감정의 치유’이다).

6. 그 다음의 문제는 가지이다. 중독 나무에서 가지는 여러 가지 중독의 행위들을 의미한다. 그림에 나와 있듯이 알코올로부터 시작해서 성, 도박, 쇼핑, 음식, 관계(혹은 사람), 일, 종교와 약물 중독이다. 최근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게임이나 스마트폰, 음란물 중독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중독들이 가지라고 하는가? 중독 나무에서 열매는 죽음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중독의 열매(최종적인 결과)는 죽음이다. 그리고 이 죽음은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뿐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죽음, 내면의 죽음, 육체의 죽음 등 모든 죽음을 의미한다. 이런 죽음의 열매는 가지에 맺힌다. 그래서 여러 중독의 행위들을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7. 마지막으로 중독 나무에서 중요한 핵심은, 아무리 가지를 제거해도 뿌리와 토양을 바꾸지 않는다면 가지는 다시 자라게 되고, 그 자라난 가지엔 죽음이라는 열매가 맺힐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가지와 열매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뿌리와 그 뿌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토양이다. 그리고 뿌리와 토양의 문제의 핵심은 감정이다. ‘트라우마 A’의 문제는 본질은 감정의 문제이다. 직접적인 학대(‘트라우마 B’)를 받았든지, 간접적인 학대(‘트라우마 A’)를 받았든지 그 학대로 인해 생기는 뿌리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8. 이제 종합해 보자. ‘트라우마 A’가 관계에서 생긴 결핍의 문제이기에 다시 관계를 통해서만 재 경험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건강한 공동체(가정이면 가장 좋겠지만)가 필요하고, 그 공동체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오랜 시간을 통해서 지지와 격려와 사랑과 보호와 양육이 재 경험되어야 한다. 그 재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감정이다. ‘트라우마 A’로 인해 생긴 부정적인 감정들이 관계와 공동체 안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관계와 공동체 안에서는 감정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자신 안에 계속 만져지고 느껴지며, 순간 순간 올라오는 감정들을 구체적으로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하고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과 관련된 책들은 중독 나무와 상반되는 개념인 양육 나무에 대해서 나누면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공동체 안에서의 제자도

묵상한 말씀 : 누가복음 17:1~10
나에게 주시는 말씀 : “너희 믿음이 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뽕나무에게 ‘뿌리채 뽑혀 바다에 심겨라!’라고 하면 그 나무가 너희에게 순종할 것이다.”(6)

1. 오늘 본문은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가) 경고(1~3a), (나) 용서(3b~4), (다) 권면(5~6), (다) 섬김(7~10). 짧은 네 개의 이야기는 제자도의 다양한 측면들과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과정 중에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2. 첫 번째 이야기는 경고이다. 특히 누군가를 죄짓게 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지만, 다른 지체를 죄짓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재앙이 있을 것이다(1). 예수님은 이런 사람에게 차라리 자기 목에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한 사람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런 죄를 아주 무섭게 다루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작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특별하게 사용하신다. 이 표현이 중요한 이유는,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약자들(예를 들어 고와와 과부, 객들)을 돌보시는 분이시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경고를 누구에게 하시는 것인가? 1절과 3절을 보면 제자들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스스로 조심하라”(현재 진행형)고 명확하게 경고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매일 신중해야 하고 조심해야 한다.

3. 3절은 곧 바로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다른 지체들(특히 약자들)을 죄짓게 하지 말아야 하지만, 다른 지체들이 죄를 지으면 꾸짖어야 하고 더불어 회개하면(그 죄에서 돌이키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관계 곧 공동체를 전제로 하는 말씀이다. 공동체 안에는 용서를 말하기 전에 먼저 공의가 있어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다른 지체가 죄를 지으면 가장 먼저 분명하게 꾸짖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를 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넘어가는 것은 신앙 공동체가 가져야할 태도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도 한 가지 중요한 원칙 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서로를 향한 진정한 위탁과 후원이다. 그것이 약속된 관계 안에서는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 반대로 위탁된 관계가 아닌데 죄를 직면하는 것은 여러 가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진정한 영적 가족은 죄를 죄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이어야 하며, 그것을 통해 다른 지체가 회개하면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 그 관계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 공동체는 서로를 세우고 지지하고 환영하며 축복하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형제가 진정으로 뉘우치고 그 죄에서 돌아셨다면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몇 번이나(얼마나 자주)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 예수님은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럼 일곱 번 이상은 안 된다는 말씀인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몇 번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신앙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가 진심으로 그렇게 하면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 공동체가 유지되는 핵심이다. 용서가 없는 공동체는 금방 무너지고 말 것이다.

5. 5절부터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부담이 되었는지 제자들은 예수님께 요청한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참 재미가 있다. “너희 믿음이 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뽕나무에게 ‘뿌리채 뽑혀 바다에 심겨라!’라고 하면 그 나무나 너희에게 순종할 것이다.” 제자들은 믿음의 분량에 대해서 말한다(믿을 더하소서). 하지만 예수님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겨자씨 한 알 크기의 믿음은 얼마나 작은가? 하지만 그 정도의 믿음만이라도 있다면 놀라운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6. 7절 이하는 섬김에 대한 비유이다(7~10). 예수님은 당시 종들의 삶에 대해서 언급하신다. 종이 밖에서 하루 종일 무슨 일을 하든지(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집으로 돌아오면 주인의 저녁상을 차리기 위해서 또 다시 수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은 그런 종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혀 표시하지 않는다. 왜? 그것은 종이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일한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시 종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그러했다. 예수님은 그런 종들의 삶을 제자도에 적용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는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제자가 당연히 해야할 의무인 것이다. 그렇게 했다고 칭찬을 받을 수 없다.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지 혹은 순종하지 않을 것인지 선택할 의무가 없다. 당연히 순종해야 하고, 그것이 제자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

7. 제자로서 사는 삶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계속 살아갈 것인가? 만약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산다고 결정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 다시 말해 제자도는 공동체 안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의 삶을 위해선 약자와의 관계, 용서, 믿음, 순종이 필요하다. 그것이 제자가 살아내야 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