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즈미야 = 에스라 + 느헤미야

어제부터 주시는 마음이 있어서 에스라-느헤미야를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있다(이하 에즈미야). 원래 에즈미야는 두 권이 한 권의 책인데, 정경화 과정 중에서 두 권(에스라, 느헤미야)로 나뉘었다. 그렇다면 에즈미야가 말하는 핵심은 내용은 무엇인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성전 재건’이다. 느헤미야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 되었고, 에스라를 통해선 (눈에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율법이 재건되었다. 그것을 기초로 해서 두 번째 성전이 솔로몬 성전 때에 똑같은 방법,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우리는 보통 성전 재건이라고 하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그리고 솔로몬에 의해서 세워진 성전의 모양대로 다시 세우는 것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에즈미야를 통해선 그것보다 더 넓은 시각을 제시한다. 단순히 성전의 재건만이 진정한 성전 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 전체의 재건과 그 성 안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율법) 앞에 다시 거룩하게 재건되는 것까지 성전 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느헤이먀와 에스라를 사용하신다. 느헤미야는 포로생활 중에 태어나서 페르시아 제국의 고급 관료가 된 사람들이다. 소위 그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제사장 가문 출신이거나 선지자 출신이 전혀 아니다. 반대로 에스라는 서기관이면서 동시에 제사장 가문 출신이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율법)에 능통 했으며, 누구보다 그 말씀에 자신의 삶을 드려 순종 했던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무너진 성벽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재건하신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것이 하나이다. 두 사건의 공통 분모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에스라-느헤미야를 통해서 계속 강조되고 반복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경외하는 마음)과 그 분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다. 예를 들어 느헤미야서의 첫 이야기는 조카 하나니를 통해 예루살렘의 근황에 대해서 들은 느헤미야의 반응이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그 내용이 바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자 율법이었다.

그렇다면 에즈미야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1. 하나님
2. 하나님과 맺은 언약, 율법
3. 성전 재건
4. 이스라엘 공동체(정체성)
5. 예루살렘 성벽 재건

요즘 복음자리 교회(공동체)를 놓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사람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건물과 땅의 문제까지 해결하고 기도해야 할 내용들이 너무 많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고민도 깊어지고 생각도 많아진다. 감사한 것은 에즈미야를 통해서 성령님이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며,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말이다. 땅이 성전이고, 건물이 성전이며, 사람이 성전이다. 신앙의 회복은 통합적이고 총체적인 것이며, 그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진리와 그 진리에 대한 반응이다.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사람만을 말하는 것도, 건물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연결된 유기적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새로운 대안 공동체가 필요하다

어제 잠을 깊이 잘 수 없었다. 무례함을 넘어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들의 이야기가 밤새도록 맘을 무겁게 했다. 최근 동남아에서 사역하는 지인의 말이 자꾸 떠오른다. “한국은 경제 발전의 모델이 아니다.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지만 맘몬주의에 빠져 사람보다 돈이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 그렇다. 오히려 동남아가 경제적으론 못 살지만 공동체 정신과 인간미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말인가?).

한국이 그렇게 강조하던 정'(情)은 이제 교회 공동체 안에서조차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더 이상 대안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추악하고 더러운 욕망들을 투영하는 종교적 시궁창이 되어 버렸다. 세상은 자신들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지만 교회는 종교적인 가면 뒤에서 은밀하게(소위 영적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들먹거리며) 행해지기 때문에 더 추악하고 더 더럽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을 성도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모이는 단체를 교회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젠 어떤 미련도 기대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대신 새로운 대안 공동체와 삶을 찾아 나갈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왕국의 복음이라는 거대 담론을 실제 삶의 현장 속에서 실천하고 구현하고 순종하려는 몸부림이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다름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 공동체이다. 건물이나 장소가 아닌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아닌 하나님 왕국의 복음을 소유한 사람들의 공동체 말이다.

이제 그런 가치와 진리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다. “이러다가 나아지겠지, 언젠가는 하나님이 일하시겠지”라고 생각하며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다. 함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작은 발걸음이라도 내딛어야 한다. 2019년에는 그 일을 시작할 것이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도전할 것이다.

세례의 남용

어제 남긴 유아 세례에 대한 글을 읽고 우려의 글을 어느 목사님이 보내오셨다. 무엇보다 먼저 귀한 마음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하다. 하지만 요즘 교회 공동체를 돌아보면 그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유아 세례뿐만 아니라 성인 세례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본인의 생각하는 문제의 핵심은 (그것이 유아 세례이든 성인 세례이든) 세례라고 하는 본질은 망각한채 종교적인 의식만 남아서 그저 교인을 만들고 교세를 늘리는 것으로만 세례가 사용 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유아 세례에 대한 신학적인 찬반은 존중한다. 비록 유아 세례가 성경에 명확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하더라도 오랜 기독교 전통 안에서 존재해 왔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수단과 방법으로서 유아 세례의 필요성과 유익을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다(목회적인 측면에서). 그러나 목회 현장에서 본인이 경험한 세례는 (대부분) 그런 것이 아니었다.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례의 남발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신교대에서 행해지고 있는 진중 세례이다.

사실 교회 공동체와 기독교 신앙생활 안에서 세례는 독특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전체 신앙생활을 통틀어서 딱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단회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교회 공동체의 회원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아무튼 교회의 정회원이 되는 유일한 조건은 세례의 유무에 달려 있다. 이렇게 보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례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의미는 매우 크다. 문제는 이런 세례가 너무 교회 안에서 남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생의 체험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그저 교회의 멤버를 만들기 위해서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세례를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조심스럽게 나누었지만, 한국 교회의 수준이 상식 이하로 떨어진 가장 결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가 세례의 남용일 것이다. 부목사로 사역 하면서 가장 안타깝고 답답했던 것이 연중 행사로 치루어지는 세례식이었다. 많은 경우 담임목사의 눈치를 보면서 숫자를 채워야 하는 경우도 많았고, 그 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도 없었다. 그저 주일예배 참석 유무와 형식적으로 치루어지는 일련의 세례 교육에 참석만 하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안 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믿음 좋은 담임목사와 부인되는 권사들은 “목사님! 그렇게 세례라도 주면 믿음이 언제가는 생겨서 신앙생활 잘 할겁니다”라는 논리로 설득을 하곤 했다.

유아 세례도 그런 연장 선상에 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세례 자체에 무슨 신비적인 힘이 있거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신앙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도 정말 웃긴 말이다(그것이 진짜 가능하다면 면죄부는 왜 안되는가?). 유아 세례를 받았다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그 아이에게 임하거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함께 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부모가 자녀를 신앙 안에서 잘 양육하고 싶다면 유아 세례와 상관 없이 그 마음으로 매일 순종의 삶을 보여주면 된다. 그런 부모의 삶을 본 아이는 하나님을 아는 축복 가운데 성장할 것이고, 나이가 되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결국 문제 해결의 키(key)는 우리 목사들이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안에 만연해 있는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건강하고 성경적인 목회신학을 가지고 목회 현장에서 아닌 것은 아니라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복음과 신앙생활의 본질에 속한 부분은 철저하게 가르치고 그 가치를 고수하기 위해 씨름해야 한다. 선배들이 그렇게 외쳤던 것처럼, 목사로 사는 것이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진짜 아니라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관행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그것을 막아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목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기독교 세계관을 새롭게 정립하자 (2)

1. 보통 기독교 세계관을 말할 때 ‘창조’(Creation) – ‘타락’(Fall) – ‘구속’(Redemption)이라는 구조로 설명한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지만(창 1~2장), 인간의 불순종으로 타락하게 되었고(창 3장 이후), 그것을 구속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일하셨고 그것을 완성하신 분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라는 것이다(창 12장 이후).

2. 그러면서 강조하는 것이 ‘타락’이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간뿐만 아니라 피조물 전체가 완전히 타락해 버렸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전적 타락을 중요한 교리로 가르치는데,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단 1%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예수님의 구속(십자가와 부활)은 헛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3. 이것은 자연스럽게 ‘구속’의 중요성으로 연결된다. 그러면서 구속을 완전히 망가지고 깨어진 세상으로부터의 구출 개념으로 설명한다. 비유를 들면 쓰레기 소각장에서 불타서 없어질 것을 건져내어 새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의 이야기가 ‘노아 방주 사건’이다. 이 세상은 물로 완전히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 심판에서 구원 받은 존재는 오직 방주 안에 들어간 사람과 동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십자가 사건과 교회의 출현이 노아의 방주와 같다는 것이다.

4. 하지만 최근에 연구되고 소개되고 있는 ‘하나님의 왕국’(나라라는 단어보다 왕국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살펴보면,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개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심판으로 없어질 이 세상에서 믿는 자들을 구출하여 저 세상(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일하신다는 개념 자체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구속의 목적은 분리와 구출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속의 진정한 목적은 회복과 새 창조이라는 것이다.

5.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개념은 ‘창조’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유효하면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죄로 인해 망가지고 깨어졌다 할찌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창조 세계를 보존하기 원하시고 다시 회복하시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구속의 개념은 세상으로부터의 단절과 분리가 아니다. 더 나아가 그 구속의 범위가 티락한 인간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구속은 우주적이다. 타락한 창조 세계 전체가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6. 이것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공동체가 ‘교회’인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노아의 방주와 같은 공동체가 아니다. 교회는 깨어지고 상하고 망가진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통치와 회복과 치유와 구원을 이루어 가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행위도 우주적이어야 한다. 단지 죄인을 구원하여 천국 가는 티켓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인간을 통해 깨어지고 망가진 이 세상이 변화되는 것이다.

7. 이런 개념을 구속이란 단어로 다 담아내기는 어렵다. 좀 더 넓은 의미를 가진 단어가 필요하다. 구속이란 단어를 포함하는 조금 더 넓은 개념의 단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개념이 ‘새 창조’이다. ‘새 창조’는 종말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종말에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예수님의 구속(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새 창조가 완성되었고 시작되었다. 그리고 종말에 가서 그것이 완전히 완성되고 성취될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왕국과 동일한 개념이다).

8. 새 창조라는 개념이 적합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것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창조는 과거 한번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시작과 출발을 의미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의 연속을 의미한다. 이 날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도 실현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되었고 성취되었다.

9. ‘창조’ – ‘타락’ – ‘구속’보다는 ‘창조’ – ‘타락’ – ‘새 창조’로 설명하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야 복음과 구속, 교회와 신앙생활의 바른 목적과 의미를 하나님의 왕국과 연계하여 설명할 수 있다. 교회(성도)는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라고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일상의 삶을 통해서 세상을 구속하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새 창조를 성취하셨고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그 세상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쉬지않고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