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왕국과 거듭남

2019년 5월 12일 주일 설교 동영상

말씀 : 요한복음 3:1~7
제목 : 하나님의 왕국과 거듭남
설교 : 이상준 목사(복음자리교회)

**이번 설교에 도움이 된 책은 짐 월리스의 ‘회심’입니다. 혹시 이 부분에 대해서 더 공부하길 원하시는 분은 리처드 피스의 ‘신약이 말하는 회심’도 함께 읽으시면 좋습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열심을 내라

묵상한 말씀 : 히브리서 6:1~12

1. 앞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선생(장성한 자)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어린 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히브리서 공동체를 책망하였다. 6장 1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 가르침을 넘어서서 완전한 데로 나아갑시다”라고 그들을 격려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 가르침(elementary teachings about Christ)이란 무엇인가? 여섯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1) 죽은 행실로부터 회개하는 것 the foundation of repentance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2) 하나님께 대한 믿음 the foundation of faith in God, (3) 침례에 관한 교훈 instruction about cleansing rites, (4) 안수 the laying on of hands, (5) 죽은 사람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6) 영원한 심판 eternal judgment이다. 이런 것들은 어린 아이가 배워야 하는 것들이다. 이제 더 이상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하면 안되고 온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그러면서 다시 경고를 한다. 어떤 경고인가? “한 번 비췸을 받고 하늘의 은사도 맛보고 성려님과 함께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사람들은 회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4~6절).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공개적으로 욕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이것은 분명하고 명확한 회심을 말하며, 성령님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타락했다는 것은 옛 생활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것을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이며 공개적으로 욕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행위를 한 사람들에겐 다시 회개하는 은혜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회개란 한 번만 가능한 것이지 두 번 세 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때 딱 한 번 하는 것이다.

3. 7절은 이것을 땅에 비유를 하며 설명한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해 경작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작물을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지만” 반대로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쓸모없이 돼서 저주에 가깝게 되고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어떤 열매를 맺느냐의 문제이다. 똑같은 비가 내리고, 똑같은 농부의 수고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땅은 유익한 열매를 내고, 어떤 땅은 가시와 엉겅퀴만을 내면, 그 결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유익한 열매를 내면 복을 받지만,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뽑아서 불사라 버린다는 것이다(심판). 이것은 히브리서 공동체를 향한 명확한 경고이다. 구원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구원을 받았다면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최종적인 심판은 그 열매를 통해서 결정난다는 것이다. 씨가 뿌려지고 비가 뿌려진 그 땅에 어떤 열매가 맺히느냐에 따라 최종적인 심판 – 복을 받을 것인가? 뽑혀서 불에 던져질 것인가? – 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4. 그러나 이렇게 경고만 하는 것이 히브리서를 기록한 최종적인 목적은 아니다.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만 여러분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더 좋은 것들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좋은 것을 두 가지로 언급한다. (1)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보여 준 사랑과 (2) 성도들을 섬기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구원을 받고 보여준 그 사랑(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을 향한)을 잊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동일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각자가 소망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열심을 나타내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다시 그들을 격려한다.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상속받은 사람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5. 아직 그들에게 약속된 소망이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을 때 하나님과 성도들을 향해 가졌던 열심을 계속 나타내라는 것이다. 게으르지 말라는 것이다.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받은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앞선 신앙인들의 모범을 따라 계속해서 달려가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불의하시지 않고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시고 이루실 것이다. 그 분이 완성하시고 승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동일하게 신실함으로 열정적으로 인내함으로 반응하고 계속해서 목표지를 향해서 달려나가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곳까지 잘 달려왔으니 멈추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 나가라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히브리서를 기록한 목적이고 말하고 싶은 내용이다.

함께! 오늘을 살아가라!

묵상한 말씀 : 히브리서 3:12~19

1. 오늘 말씀 중에 있는 12, 13절은 히브리서를 기록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누구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려는 악한 불신의 마음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아직 ‘오늘’이라 일컬을 수 있는 그날그날에 누구라도 죄의 속임수로 완고해지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하기” 위함이다. 즉 경고(도전)과 격려가 목적이었다. 핍박과 박해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저버리거나 신앙에서 떠나지 않도록 경고하고 도전하는 것과 공동체가 함께 서로를 격려하며 오늘을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면서 14절에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에 대해서 나눈다. 처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굳게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시간 개념이 언급되고 있다. ‘처음’과 ‘끝’이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original’과 ‘end’이다. 처음 확신, 복음을 듣고 가졌던 첫 믿음(살아 계신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을 계속해서 끝까지 굳게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늘’이다.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라 오늘이다. 13절은 이것을 “오늘이라 일컬을 수 있는 그날그날”이라고 표현한다. 과거의 확신과 신뢰가 미래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3. 15절부터는 그것을 다시 확인 시켜주기 위해서 구약의 출애굽 이야기를 또 언급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이 완고해져서 반역(불순종)한 것처럼 그렇게 반응하지 말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를 들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역하고 불순종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광야를 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문제는 ‘불순종’이었다(19절). 히브리서 저자는 그 사건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공동체에게 경고하고 도전한다. 불순종 하지말라는 것이다. 마음이 완고해져서 하나님이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그 결과는 그들이 안식에 들아기지 못한 것처럼 히브리서 공동체도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4. 이런 면에서 우리는 다시 제대로 히브리서를 읽어야 한다. 예정론과 과도한 구원의 확신을 강조함으로 인해 한번 믿으면 어떤 것으로 그 구원의 취소될 수 없는 것처럼 말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히브리서의 경고는 그렇지 않다. 처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굳게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비록 과거의 믿음으로 구원의 약속을 받았다 하더라도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면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로 약속받은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이 출애굽 이야기를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 믿음(확신, 신뢰)을 날마다 확인하며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더 나아가 그렇게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동체이다. 이 싸움은 각개 전투가 아니다. 함께 격려하며 지지하며 돌보며 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공동체가 필요하고,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한다.

5. 오늘날의 문제는 점점 그 공동체를 부인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도한 구원의 확신(예정론의 문제)과 개인주의 신앙생활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혼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함께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가족(집안)을 이룬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관계 안에서 함께 격려하고 돌봄으로서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내일 일로 너무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함께 믿음으로 오늘 주어진 하루를 믿음으로 살아내자.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분이 가신 길을 오늘 하루 또 묵묵히 걸어가자. 하늘 아버지는 신실하신 분이시고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돌보시고 도우시는 분이시다.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

묵상한 말씀 : 히브리서 2:10~18

1.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대제사장’(17절)이다. 대제사장의 역할은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구약 율법에서 대제사장은 모든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바라보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직접 대속의 제사를 드리셨다. 10절 이하에서는 그것을 ‘고난’이라고 부른다. 더 나아가 고난을 통한 순종이라고 말한다.

2.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많은 아들들(구원 받을 자녀들)을 영광(구원의 완성, 하나님 왕국의 완성)에 이르게 하시려고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예수 그리스도)를 고난을 통해 완전케 하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모양(피와 살을 가진 존재, 14절)이 되시고, 더 나아가 우리와 같이 고난을 당하신 것은 자신을 통해 구원 받을 자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시기 위함이다(11절). 이렇게 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예수 그리스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구원 받을 성도들)은 모두 한 분이신 하늘 아버지께 속하게 된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시 22:22과 사 8:17~18을 통해 우리 모두(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통해 구원 받을 자들)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분의 자녀들이며 한 공동체(회중)임을 선언한다.

3. 이렇게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과 피와 살을 함께 나눔으로 한 형제자매와 한 공동체가 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도 적용된다. 특히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피와 살을 가진 존재가 되셨다는 것은 우리와 같이 죽음의 고통(한계)를 경험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되신 것은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기 위함이었으며, 동시에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평생 마귀의 노예로 매여 사는 사람들을 해방 시키기 위함이었다(14, 15절).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천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그들과 같아지셨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서 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었다(17절).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수님은 작신의 몸으로 직접 제사를 드림으로(고난을 받으심으로) 그들의 죄를 대속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고난과 시험을 받는 자들을 도우시기 위함이다(18절).

4. 오늘 말씀은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도전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거룩하게 하고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 즉 피와 살을 가진 존재로 오셔서 인간과 동일하게 고난을 당하셨고, 심지어 죽음까지 경험하셨다는 것이다. 그저 신의 위치에 앉아서 이렇게 저렇게 명령만 하거나 최종적으로 심판만 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삶 한 가운데 들어오셨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고난을 통해 완전케 되는 길을 걸어가셨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뒤를 이어 걸어가는 자들의 모델이 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걸어가는 자들을 인도하며 도우시기 위함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권세에 붙들려 마귀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들을 해방하기 위함이다. 오늘 말씀은 그런 예수님을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