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기도하라!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1:20~33

  1. 성전을 척결하신 후에 그 다음 날 아침에 제자들과 함께 어제 저주한 무화과 나무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나무가 뿌리째 말라서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이 너무 신기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저주한 무화과 나무가 말라 죽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믿어라.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누구든지 저 산에서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등진 일이 있다면 그 사람을 용서해 주라. 그러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2. 먼저 이 사건이 무화과 나무에 열매를 찾으신 사건과 성전을 척결하신 사건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마가복음은 앞뒤에 무화과 나무 사건을 배치하고 그 가운데 성전을 척결하신 사건을 집어넣음으로서 의도적으로 두 사건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 이 두 사건이 하나로 연결되는 근거는 ‘기도’라는 주제가 관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모든 민족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말라 죽어있는 것을 통해서 다시 한번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기도하는 자의 두 가지 태도를 가르치신다. 첫째는 믿음이고, 둘째는 용서이다. 이것을 다시 성전 척결 사건으로 가지고 가면 그들은 단지 기도만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들에겐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없었고, 용서하는 삶을 살지도 않았다.
  3. 뿌리째 죽어있는 무화과 나무를 발견하고 신기해 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첫 마디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믿어라!” 기도의 핵심과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 없는 자들은 절대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물론 종교적인 열심으로 기도할 순 있다. 지금 예수님은 그런 종교적인 열심으로 하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절대적인 확신이다. 예수님은 이 확신을 강조하기 위해서 언어유희를 사용하신다. 이것은 산을 향해서 바다에 빠지라고 외치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 그대로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산을 옮긴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관용어인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기에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간구하고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 하나님이 이루어주신다는 것이다.
  4.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당시 유대인들이 전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너무 기도하지 않아서 기도 좀 하라고,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기도 좀 하라고 가르치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들은 하루에 몇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던 사람들이다. 누구보다 기도에 열심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믿음이 없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없었고, 어떤 기적도 능력도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전 가득하게 종교적인 언어와 소리만 가득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라고 강조하신다.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했다면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강조하신다. 더 나아가 기도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세는 용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다.
  5.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을 거닐고 계셨다. 성전을 척결하신 후에 다시 그런 일들이 성전 안에서 일어나는지 살펴보고 계신 것이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소?”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다시 질문으로 답한다. “난도 한 가지 물어보겠다. 대답해 보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느냐, 사람으로부터 왔느냐? 말해 보라.” 이 예수님의 질문은 다시 종교 지도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한다면 요한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해서 책망 받을 것 같고,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한다면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책망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잘 모르겠소”라고 대답했다. 이런 그들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도 그들에게 대답하신다. “그렇다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6.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많은 질문을 받으신다. 그 질문이 진리를 찾고 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질문이라면 진리를 계시하시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질문이라면 예수님은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어떻게 대답하든 그들은 수용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이번 권위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이다. 성전을 척결하신 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도전하신 것이다. 그들은 그런 예수님의 행동에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성전은 자신들의 나와바리(세력 범위, 세력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권위의 출처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어떻게 대답을 하든 그 대답을 통해서 예수님을 제압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해 주시지 않으신다(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마음이 1도 없다.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모든 민족들이 기도하는 집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1:11~19

  1. 어린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그리고 곧바로 성전으로 들어가신다. 마치 시찰이라도 하시듯 성전의 모든 것을 둘려보시곤 다시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나가신다. 그 다음 날 베다니를 떠나시려고 하는데 배가 고프셨다. 마침 예수님의 눈에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들어왔다. 그래서 열매가 있을까 해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지만 잎만 무성할 뿐 원했던 무화과 열매는 없었다. 왜냐하면 무화과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런 나무를 저주하신다. “이제부터 어느 누구도 네 열매를 따 먹지 못할 것이다.” 그리곤 장면은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겨진다(구체적인 내용은 내일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 말씀을 읽는 독자가 눈치가 조금만 있다면 이 무화과나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곧 다시 등장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2.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것은 왜 무화과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시즌(season, 철)도 아닌데 예수님은 열매를 기대했느냐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 점을 명확히 밝힌다. 보통 무화과 열매가 맺히는 8~9월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벌어지는 때는 3월 말경이었다. 열매가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열매를 기대하셨고, 기대했던 열매가 없다고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 하셨냐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기대하셨던 열매는 8~9월에 맺히는 열매가 아니었다. 보통 8~9월에는 가장 좋은 열매가 맺히지만, 3월 경에도 작은 열매가 열린다. 예수님이 이 점을 몰랐을리가 없다. 비록 제철이 아니지만 그래서 풍성하고 맛있는 무화과 열매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맺혀야 하는 작은 열매마저도 없는 것을 보시고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것이다.
  3.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나무에 자주 비유한다. 대표적인 나무가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무화과 나무에 열매를 기대하셨고, 기대하셨던 열매가 없음으로 인해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성전 척결’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이야기이다. 그럼 무화과 나무 사건과 이어지는 ‘성전 척결’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셜펴보자.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고 곧장 성전으로 향하신다. 그리고 바로 성전(정확히 말하면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내쫓기 시작하셨다. 마가복음에서 묘사하되는 예수님의 모습은 상당히 과격하고 폭력적이다. 예수님은 돈 바꿔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어떤 사람도 장사할 물건들을 들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지 못하게 하셨다. 아마 당시 성전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멘붕에 빠지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4. 그렇게 충격과 당혹감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집은 모든 민족들이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성경에 기록돼 있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말았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왜 예수님이 분노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성전의 본질을 두 가지로 말씀하신다. 첫째는 ‘모든 민족들’이고, 둘째는 ‘기도’이다. 성전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전은 철저하게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것도 한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열방,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그곳을 장사를 하고, 그 장사를 통해서 이득을 취하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어제 성전을 둘러보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겸손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곧장 성전의 모든 부분들을 둘러보시고 확인하신다. 그것을 통해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더러운 일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신 것이다.
  5. 그리고 그 다음 날 다시 오셔서 성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더러운 일들을 금지 시키며, 성전이 존재하는 목적을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만민이 모여서 기도하는 장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한 가지를 명확히 정리해야 한다. 이 사건의 목적이 ’성전 정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러워진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건의 목적은 ‘성전 척결’ 즉 성전의 기능을 완전히 끝내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심판하셔서 이젠 건물로서의 성전의 기능을 끝내버리신 것이다. 이것을 명백하게 보여준 사건이 그 앞에 나온 무화과 나무 사건이다. 두 사건이 연결이 되는 근거는 ‘기도’이다(내일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에 기대하셨던 열매란 기도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최소한의 열매(기도)라도 기대하셨지만 그런 열매도 없었던 것처럼, 성전 곳곳을 둘려보았지만 모든 민족이 모여서 기도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고, 이방인의 뜰(그곳이 진짜 이방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장사꾼들의 소리과 짐승들의 소리들 뿐이었던 것이다.
  6. 그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처럼, 지금 성전 안에 모든 더러운 것을 둘러엎으시고 그들을 쫓아내시며 그 장소를 통해 하나님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말씀하신다. 그곳은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과 간구와 예배와 중보의 소리가 가득한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과 귀에는 최소한의 열매도 없었던 무화과 나무처럼, 최소한의 기도 소리조차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종교적인 행위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그냥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분 안에 있는 열정과 분노가 예수님 자신을 가만히 있게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의 행위를 지켜보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고 두려웠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 놀람과 두려움이 회개로 이어졌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법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7. 이것은 비단 유대인들을 향한 심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건물로서의 성전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즌을 열어놓으신 예수님은 우리들의 몸이 성전이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움직이는 성전, 살아있는 성전으로서 동일하게 기도의 열매를 기대하신다. 이것은 기도를 무조건 많이 하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한국 교회는 그것마저도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로 전락 시켜버렸고, 세속적인 성공과 명예와 부를 얻는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지만 – 그런 점에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방인의 뜰에서 물건과 동물을 사고 파는 것을 통해 이득을 얻었던 그들과 세상의 부와 성공만을 추구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이 무엇이 다른가를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하나님은 진정한 기도와 예배를 원하신다. 자신의 욕망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왕국과 열방을 향한 그리고 그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간구와 감사와 찬양, 중보의 소리가 넘치는 살아있는 성전이 되기를 바라시고 원하신다.

2019. 01. 13 주일예배 설교

2019년 1월 13일 복음자리교회 주일예배 설교

말씀 : 마태복음 6:5~15

제목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설교 : 이상준 목사

기도와 하나님 왕국 사역의 본질

  1. 35~38절을 중심으로 앞뒤 내용은 동일하다. 특히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친다는 예수님의 사역을 똑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런 흐름 속에서 35~38절은 매우 짧은 내용이지만 많은 것들을 시사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른 새벽 시간에,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때에 사람이 없는 외딴 곳에서 기도를 하신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에게 있어 기도란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
    ✔︎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교제이다.
    ✔︎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리는 것이다.
    ✔︎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 받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갖는 것이다.
    ✔︎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 모든 사역의 시작이자 뿌리이다.
    ✔︎ 그 시간을 통해 “왜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를 발견한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다.
  2. 그렇게 기도하는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찾아온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퍼졌고,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확고하다. 그런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왜 왔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왕국의 복음(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으며, 그 부르심에 계속해서 순종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3. 기도란 나의 필요를 요청하는 시간이 전부가 되어선 안 된다.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이 하시는 일을 보는 시간이다. 그것을 통해 오늘 하루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발견하고 다시 나의 계획과 시간과 에너지를 조정하는 시간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인기를 얻기 위해 그들이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요구와 상관 없이 자신의 삶을 무엇을 위해 드려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계셨다. 하나님 왕국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자신이 모든 삶을 드리기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순종하신다.
  4. 39절부터는 예수님의 사역을 다시 소개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두 가지이다. 첫째는 가르치는 사역이다. 둘째는 귀신들을 쫓아내시는 사역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40절 이하에서는 바로 치유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앞에서는 귀신 축출에 대한 이야기와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는 장면이 소개 되었는데, 이번에는 귀신들을 쫓아내셨다는 소개와 함께 어느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당시 나병은 육체적으로 불치병에 속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회에서 나병은 단지 육체적인 질병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관계적인 고통과 상실, 분리를 경험하게 하는 영적인 질병이기도 했다.
  5. 우리가 이미 잘 아는 것처럼 나병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병으로 여겨졌고, 그 전염성 때문에 공동체에서 완전히 분리되고 격리되는 삶을 살아야했다. 한 마디로 나병은 모든 면에서 부정하고 더러운 질병이었다. 그런 나병환자가 갑자기 예수님 앞에 등장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고쳐달라고 애원을 한다. 예수님은 그런 나병환자를 긍휼히 여기시어 손을 내밀어 만지시며 깨끗해지기를 선포하신다. 그러자 그 순간에 그 모든 질병이 사라지고 깨끗해졌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율법이 명한대로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고 정해진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더불어 이런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신다.
  6. 우리는 이것을 통해 치유 사역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왕국 사역은 그저 한 사람의 질병만을 치료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의 몸을 만지셨다거나 나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치유를 받은 후에 율법이 명한대로 행할 것을 말씀하시고, 그것을 통해 분리되고 단절 되었던 공동체 안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당부하신 것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좇는다(45절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떤 사람이 거품을 물고 쓰러지며 귀신을 나가나는 현상, 열이 떨어지지 않아 끙끙 앓던 사람이 한번의 안수로 고침을 받는 현상, 나병으로 온 몸이 망가졌는데 깨끗하게 회복되는 현상말이다.
  7. 치유의 목표는 낫는 것만이 아니다. 나음을 얻은 이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중요하다. 시몬의 장모는 열병에서 나음을 얻은 이후에 예수님과 그 일행들을 섬긴다(1:31). 나병 환자는 단절되고 분리된 관계와 공동체 안으로 다시 들어가도록 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 사역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사로잡혀 있고 묶여 있는 사람들, 그것이 죄악이든 질병이든 귀신이든 상관 없이 자유가 없는 이들을 해방 시켜서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들을 죽음 이후의 저 세상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 왕국의 사역인 것이다.
  8. 하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좇는다. 예수님은 그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를 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예수님의 그런 당부를 거절하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 결과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모든 사람들에게 퍼지게 되었고, 예수님은 더 이상 공개적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실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몰려 왔다. 이것은 예수님이 원하신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인기는 신기루에 불과하다는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부르심 받은 본질에만 집중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임하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