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도 vs. 제자들이 제자도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4:43~52

  1.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시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좇았던 열두 명의 제자들의 모습이 대비된다. 그 중에 한 명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팔아 넘기는 일에 선봉에 서 있다. 그 중에 한 명은 그래도 용감하게 칼을 뽑아 자신의 스승을 지키기 위해 대제사장 하인의 귀를 쳐 잘라버렸다. 하지만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 버린다. 그 중에 한 명은 맨몸에 홑이불 하나만 두르고 예수님을 따르다가 사람들이 붙잡아 그 홑이불 마저도 버리고 벌거벗은 채 달아나 버렸다.
  2. 자신들의 눈 앞에 벌어지는 상황 – 함께 지내던 가룟인 유다가 칼로 무장한 로마 군인들과 몽둥이로 무장한 대제사장의 종들을 이끌고 갑자기 자신들의 아지트를 급습했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고 놀라고 두려웠겠는가? 곧 메시아의 왕국을 완성할 것이라는 부픈 기대감 속에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체포라니 그들은 1도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이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저항도 하지 한번 하지 않으시고 담담하게 그들에게 체포되어 끌려 가신다는 것이다. 성전을 그렇게 뒤집어 놓으실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이렇게 무력하게 나약하게 체포되는 것이 제자들을 더욱 놀라고 당황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3. 오늘 말씀을 통해 두 가지의 제자도를 보게 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길을 답답하게 걸어가시는 예수님, 비록 그 길에 고통과 조롱과 죽음이 놓여 있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면 묵묵히 자신의 눈 앞에 벌어지는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순종하시며 계속해서 그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제자도를 발견할 수 있다. 반대로 제자들이 제자도이다. 마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 것처럼 자신있게 말들을 했지만 정작 자신의 생명과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두려움이 엄습하자 예수님을 버리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그 길에서 이탈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더 나아가 한 제자는 함께 그 길을 걷는척은 했지만 뒤로 스승을 팔아버리는 배신자의 길을 걷고 있다.
  4. 우리는 다시 한번 제자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도전 받는다. 평화롭게 안정된 상황 속에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삶에 위기가 닥치고 두려움이 찾아오고 생명의 위협을 받고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변함 없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이탈하지 않고, 배신자의 길을 걷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이 믿음이고 순종이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도의 핵심은 멋진 신앙고백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삶의 현장, 부르심의 현장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변함 없이 예수님의 뒤따르는 사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게 진짜 제자도의 삶이다.

향유 부음 :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 예수님을 격려함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4:1~11

  1. 예루살렘에 있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체포해서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지만 유월절과 무교절이 바로 코 앞에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 소동이 일어날 수 있으니 명절에는 피하자는 자신들만의 계획을 세워 두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대로 예수님은 유월절 명절에 맞추어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세운다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지와 뜻과 계획이 있으시다. 그 뜻대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여 가신다. 이런 배경을 깔아놓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기름부음에 대한 것이다.
  2. 예수님과 그 일행들은 베다니 마음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이라는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다. 그때 갑자기 한 여인이 등장해서 값비싼 순수한 나드 향유가 든 옥합 하나를 가져와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여기서 ‘나드’란 인도산 방향 식물에서 채취한 기름을 의미하는데 매우 고가의 제품이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화를 내며 수군거렸다. 이런 여인의 행동이 값비싼 향유를 낭비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중에 어떤 사람은 차라리 그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고 그 여인을 심하게 책망하기도 했다.
  3. 어쩌면 이것이 예수님의 평소 생활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최대한 검소하게 지내고, 남은 것을 통해서 당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돌보는 일(구제하는 일)에 힘썼던 삶을 사셨을지도 모른다. 제자들이 여인의 행동에 대해서 심하게 나무란 것도 평소 예수님의 소신이나 생활 방식이 그러했기 때문에 이번 일도 당연히 그렇게 판단하실 것이라고 확신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여인을 두둔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그들 곁에 있으니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도울 수 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이 때문이다. 이 여인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 확인할 순 없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셨다.
  4. 사실 아무도 곧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예고 하셨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조차도 곧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무지 했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신에게 있는 가장 값비싼 향유(기름)을 아낌없이 부어 드렸다. 상황적으로 보면 알고 한 행동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냥 예수님을 통해 받은 은혜와 사랑에 감격해서 자신의 것을 온전히 드리는 헌신의 행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에 다른 의미, 더 놀라운 의미를 부여하신다. 여기서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메시아로서의 사명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셨고 이제 곧 그 메시아로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내어줄 것이다. 아무도 그 사실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지만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그 걸음을 멈추지 않으실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여인의 기름 부음은 예수님에게 깊은 격려와 확인이 되었을 것이다.
  5. 그래서 예수님은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한 일도 전해져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마다 이 여인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축복하신다. 곧 일어날 십자가의 사건을 위해 가장 값진 헌신을 했고, 거의 유일한 헌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가룟 유다의 이야기는 자신의 스승을 배반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 넘기려는 내용이다. 이런 정황들을 살펴보면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해서 왜 예수님이 그토록 기뻐하시고 큰 의미를 부여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지금 홀로 외로운 길을 걸어가시고 계신다. 3년이 넘게 함께 동고동락 했던 제자들마저도 관심이 없는 그 길을 혼자 쓸쓸하게 걸어가고 있고, 곧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한 여인이 기름을 부어드림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고 예수님을 축복한 것이다.
  6. 이것이 앞에서 살펴본 마음과 뜻과 힘과 생명을 다해서 하나님(예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연결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온전히 다 이해하고 준비할 순 없다. 하지만 예수님을 향한 거룩한 사랑으로 드린 헌신과 순종과 행동, 재물, 시간, 삶을 주님은 귀하게 소중하게 여기신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귀하지도 비싸지도 않은 것이지만(물론 인간 입장에서 다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셔서 감격해 하시고 기뻐하시고 놀라워 하신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다. 그 분을 향한 사랑으로 행한 것들을 너무도 소중하게 여기시며 값진 의미를 부여해 주신다. 지금도 동일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 가신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이다.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을 경외함으로 드리는 헌신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은 놀라운 일들을 성취해 가실 것이다.

믿음의 경주(복음을 전하는 삶)를 마쳐야 구원이 완성된다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3:1~13

  1. 성전에서 가르치는 사역에 집중하시다가 이제 그곳을 떠나려고 하시는데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웅장한 돌들을 쌓아서 만든 성전 건물을 보며 감탄을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제자에게 말씀하신다. “이 훌륭한 건물들을 보느냐? 여기 있는 돌 하나도 그냥 쌓여 있지 않고 하나같이 모두 무너질 것이다.” 이 말씀은 당시 제자들에게(당연히 유대인 전부에게) 상당히 충격적이고 도전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에게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일뿐 아니라 그들의 신앙생활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성전을 보고 곧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너무도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2. 예수님은 성전이 보이는 맞은편 올리브산에 가서 앉으셨다. 그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따로 나아와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는데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며, 그런 일이 일어날 때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냐고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1)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일어나서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2) 전쟁과 분쟁의 소식과 소문이 많이 들려올 것이며, 더불어 자연재해(지진, 기근)에 대한 소식도 많이 들려올 것이다. (3) 예수님으로 인해 법정에 넘겨지고 회당에서 매질을 당할 것이며, 왕과 총독들 앞에 서서 증언하게 될 것이다. (4) 하지만 끝이 오려면 먼저 복음이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해져야 한다. (5)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3.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놓고 많은 신학적 논쟁이 있어 왔다. 핵심은 두 가지이다. 이 말씀이 이미 실현되었는가? 아니면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말씀인가? 전통적으론 후자가 더 많은 지지를 얻었다.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해 왔다. 하지만 예수님의 예언과 종말에 대한 말씀을 꼼꼼히 살펴보면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이라기 보다는 주후 70년에 일어날 성전 파괴와 관련된 예언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그리고 앞뒤로 일어날 많은 핍박과 박해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법정에 넘겨지고 회당에서 매질당할 것이고 왕과 총독 앞에서 증언(변증 혹은 변호)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을 보아도 금방 확인이 가능하다.
  4. 그러나 단순히 성전의 파괴(예루살렘 파괴), 그리고 로마와 유대교에 의한 핍박과 박해만을 말씀하신다고 보아선 안 될 것이다. 구약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오심(단순히 성육신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까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령의 오심(오순절)으로 종말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미 임박한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당시 예수님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전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험했고, 그로 인해 많은 핍박과 박해의 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명확하게 진정한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져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그리고 재판의 자리에 선다 있다할지라도 걸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성령께서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5. 우리는 그때가 언제인지 어떤 징조가 일어날 것인지 궁금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초점을 맞추고 따라야할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그 분의 증인으로 예수님을 전하고(복음을 전하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대로 살아가야 한다. 그런 삶 가운데 핍박과 박해가 있다하더라도 우리의 걸음을 멈추지 말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구원을 받을 것이다. 구원은 한 번의 영접 기도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교회에 적을 두는 것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삶 속에서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따르며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삶의 경주를 완주하게 될 때에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그 경주는 우리의 힘만으로 하는 경주가 아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도움을 약속하신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내면에 임재하신 분이 성령님이시다.

Overlap : 성전, 율법학자들을 통해 한국 교회를 본다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2:35~44

  1. 예수님은 성전을 척결하신 후에 계속 성전에 머무르시며 사람들을 가르치신다. 오늘 내용은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35~37절은 메시아(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주’(Lord)이시다. 38~40절은 사람들 앞에서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41~44절은 과부의 작은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이 모든 이야기가 성전 안에(정확히 말하면 성전 바깥뜰)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2. 예수님은 먼저 율법학자들이 메시아(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반박하신다. 그 근거로 제시하시는 것이 다윗의 시편인 110:1이다. 다윗의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네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여기서 전자의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하고, 후자의 ‘내 주’(히브리어로 ‘아도니’)는 하나님의 왕국을 완성할 메시아를 의미한다. 율법학자들은 그 분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그 분을 ‘내 주’(아도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기 보다는 다윗의 자손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박하신다.
  3. 이어서 그들의 잘못된 삶의 태도와 교만, 종교적인 권력을 쥐고선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모습에 대해서 지적하신다. 율법학자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며, 시장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 또한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잔치에 윗 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당시 옷이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다. 긴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옷을 입고 시장(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을 걸어다니면 사람들은 그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그들은 그런 것을 매우 즐겼다. 더 나아가 회당과 잔치에서 가장 높은 자리,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다. 그 자리에는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 종교적으로나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 앉는 자리이다.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고 존경을 받으며, 높임 받기를 좋아했다. 여기서 좋아했다는 것을 그것을 추구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4. 더 큰 문제는 그런 권력과 명예를 가지고 사회적인 약자들을 착취하고 탈취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과부(구약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회적인 약자)의 집을 삼킨다. 당시 집이란 전재산을 의미한다. 그것도 과부의 집이니 그렇게 좋은 집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과부의 유일한 재산인 집을 빼앗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또한 자신들이 얼마나 종교적으로 괜찮은 사람인지를 드러내기 위해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길게 기도한다. 그것을 통해서 종교적인 인기와 영향력을 얻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율법학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더 클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사람들은 속일 수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종교적인 권력을 확보하고 그것을 가지고 남이 모르게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 아신다. 하나님은 그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게 심판하신다.
  5. 그 다음 이야기는 그런 율법학자들이 무시하고 착취했던 과부의 헌금 이야기이다. 마가복음은 의도적으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집어넣음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며,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악행이 어느 정도인지를 더 확실하게 드러낸다. 예수님은 성전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 사람들이 그곳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와 신앙과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큰돈을 넣었다(큰돈 넣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아주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렙돈 동전 두 개 곧 1고드란트(가장 작은 단위의 로마 동전으로 그 가치는 1데나리온의 64분의 1에 해당, 1데나리온은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이다)를 넣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헌금을 드렸다. 그들은 모두 풍족한 가운데서 드렸지만 이 여인은 가난한 가운데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
  6.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돈의 액수가 아니다. 누가 진정한 헌금을 하나님께 드렸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돈의 액수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드리는 사람의 마음과 태도를 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예수님 당시의 성전과 그것을 배후로 종교적이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힘을 가진 세력들 – 오늘은 대표적으로 율법학자들이 등장한다 – 의 모습이 어떠했으며, 그들이 어떻게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했는지를 고발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더불어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한 가지 오늘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본문의 모습과 현재 한국 교회의 모습이 오버랩이 된다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의 모습 속에서 한국 교회 종교 지도자들(대표적으로 목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화려한 예배당과 엄청난 사역들과 헌금들, 그 가운데 종교 지도자들이 큰 권력을 소유하면서 교인들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모습들이 자꾸 오버랩 된다. 우리는 그런 것에 금방 속아 넘어가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기준과 마음은 우리와 전혀 다르다.
  7. 한국 교회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그래서 우리가 세워놓은 그 멋진 예배당에서 예수님이 거닐고 계신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그때의 그들과 지금 우리들과 다를까? 비난을 받을까 칭찬을 받을까? 더 큰 심판이 있을 것라고 말씀하실까? 과부의 헌금과 같이 격려하시고 칭찬하실까? 마음에 큰 두려움이 밀려온다. 나름 그런 시스템과 구조 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여전히 내 안에 그런 사고와 가치와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실패를 통해 낮아지고 비운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 그 자리에 앉고 싶고, 그런 대우를 받고 싶고, 그런 풍족함을 누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한 자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을 찾으시는 주님의 시선이 나를 계속 붙들어 주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