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1. 13 주일예배 설교

2019년 1월 13일 복음자리교회 주일예배 설교

말씀 : 마태복음 6:5~15

제목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설교 : 이상준 목사

전통의 고수냐 말씀에 순종이냐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7:1~13

  1.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온 종교 지도자들(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1장에서 시작해서 6장까지는 예수님의 사역들을(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가르치는 사역과 능력 사역이다) 주로 다루고 있다면 7장부터는 에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과 갈등을 언급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들과의 갈등의 핵심은 장로들의 전통(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뿐 아니라 구전되던 조상들의 전통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613개 조문으로 성문화했다)을 지킬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이다.
  2. 갈등의 출발점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은채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던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제자들의 행동을 문제 삼았다. 왜냐하면 당시 모든 유대 사람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따라 손 씻는 정결 의식을 행한 후에 음식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선 절대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 사용하는 잔들과 여러 그릇들도 철저하게 씻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그 규칙들을 지키는 종교 지도자들의 눈으로 볼 때는 손을 씻지도 않고 음식을 먹는 제자들의 행동이 매우 거슬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3. 그들은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께 문제 제기를 한다. 아마 그런 제자들의 행동의 근본적인 책임이 예수님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무지한 사람들이니 그럴 수 있지만, 그런 제자들의 행동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제지나 책망, 가르침을 행하지 않는 예수님에게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질문을 던진다.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해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이들은 이런 공격적인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더 본질적인 문제를 언급하신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그들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만 붙들고 있다”는 것이다.
  4. 전통과 계명. 전통은 조상들과 장로들에게서 왔다. 계명은 하나님에게서 왔다. 전통은 그 계명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각주를 달아놓은 것과 같다. 한 마디로 그 의미와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해석해 놓고 설명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전통은 계명이 아니며 계명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 계명과 전통의 문제를 달면 계명이 더 무겁고 중요하다. 그러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계명보다 전통을 더 중요하게 여겼고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명은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전통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고르반’이란 전통의 예를 통해서 그들의 문제점을 확실하게 지적하신다.
  5.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고르반’이란 단어의 의미는 ‘바쳐진 것, 바치겠다는 맹세’란 뜻이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부모님께 드려야 하는 음식이나 재물이라 할지라도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정했다면 부모님께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유권 해석을 만들었고 그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어 내려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런 전통을 악용하는 자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부모를 돌보라는 계명(책임)을 회피하는데 그 전통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예수님이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시는 것을 보면 고르반이란 전통이 당시 널리 악용되고 있었던 것 같다. 더 나아가 고르반 전통만이 아니라 당시 많은 전통들이 그렇게 계명에 불순종하는데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6. 그렇다. 이사야의 지적처럼 그들의 문제는 마음에 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언급하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순종’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작 하나님의 말씀엔 순종할 생각이 없으면서 말로만 교리와 이론과 지식을 동원하여 합리화하고 핑계를 둘러댄다. 하지만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경외 하는지, 하나님을 사랑 하는지는 삶의 열매로 드러나는 순종으로 알 수 있다. 전통을 지키는 것은 종교화된 신앙일 뿐이다. 우리의 초점은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어떤 전통을 지킨다고 해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대체할 순 없다.
  7. 오늘날 한국 교회도 양상은 비슷하다. 한국 교회는 유독 종교성이 강하고 율법화 되어 있는 부분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전통을 고수하고 강조하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그렇게 평가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본질이고 핵심이다.

큰 믿음 작은 믿음 (3)

1. 계속해서 백부장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마태복음 8장 5절에서 13절입니다. 이 사건의 내용은 워낙 유명해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로마 백부장(군인)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한 가지를 간청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집에 중풍병으로 누워 있는 하인을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흔쾌히 가시겠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백부장은 군인으로서의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 이곳에서 말씀만 하셔도 종이 치유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님을 너무도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로마 군인이고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라고 칭찬하십니다.

2.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직접적이진 않지만) ‘큰 믿음’(이스라엘 중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믿음)이란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은 백부장에게 어떻게 이런 믿음이 생겼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모든 과정들을 생략하고 예수님도 놀랄만한 고백을 하는 장면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3. 믿음이란 생각하고 고백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분명 누구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자신의 하인을 고칠 수 있는 분으로 확신했을 것입니다. 백부장은 더 나아가 그런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갔고, 예수님도 놀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백이란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군인과 주인으로서 자신이 매일 경험하는 사건들을 가지고 생각한 것입니다. 군인으로서 상관이 부하에게 명령하거나, 주인이 종에게 명령하면 그대로 행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주님으로서 명령만 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4. 백부장의 입장에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로마 사람이었고, 군대 장교인 백부장이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그 땅에 사는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수많은 민족 중의 아주 작은 민족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가족이나 같은 로마인이 아닌 질병에 걸린 종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당시 종은 재산의 일부였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 나아가 예수님의 권위와 로드십(Lordship)을 인정하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그의 고백의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5.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이 아닙니다. 믿음의 반대 쪽엔 두려움, 염려, 근심이 앉아 있습니다. 성경적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삶의 현장으로 가지고 와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이나 근심, 염려는 그런 반응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은 믿음의 반대말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이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방 여인으로서 유대 남자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두려움, 매일 귀신에게 붙들려 사는 딸을 고쳐보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고칠 수 없다는 불안, 귀신 들린 딸을 과연 예수라는 사람이 고칠 수 있을지에 대한 근심을 뚫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거절과 수치심을 일으키는 대답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확신을 예수님께 고했습니다.

6. 백부장은 어떠합니까? 자랑스러운 로마 군인이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간청할 때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대한 두려움, 또한 당시 의학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중풍병을 예수라는 사람이 고칠 수 있을지에 대한 염려, 예수가 로마 군인인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불안함을 딛고 예수님 잎에 나아가 어느 누구도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던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예수님)을 어떻게 인식 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인식하고 믿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자신의 삶의 현장 안으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두려움, 근심,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찬 삶의 현장 속으로 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7. 예수님은 그런 두 사람의 고백을 들으시고 큰 믿음이라고,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이런 믿음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칭찬하십니다. 믿음은 진공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철저하게 현실 세계 안에서 존재합니다. 그 현실 세계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매일 반복되고, 우리의 존재를 순간마다 흔들어 놓는 고통과 두려움이 엄습하는 공간입니다. 큰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현실 세계 안에서 생각하고 반응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얼어붙고,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멈추지만, 큰 믿음이란 그것을 뛰어넘어 생각하고 반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8. 오늘날 믿음이란 것은 어떤 정보에 대한 동의 정도나 인간이 스스로 갖는 큰 확신 혹은 긍정적인 사고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정보에 대해서 동의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자기 체면적인 확신이나 세뇌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발을 내딛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만나는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결정을 내리며, 어떤 행동을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 생각과 결정에 따라 예수님에게 작은 믿음이다(믿음이 없다)라고 책망을 받든지, 아니면 큰 믿음이라고 칭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큰 믿음 작은 믿음 (2)

+++ 큰 믿음이란 무엇인가? +++

*앞의 글을 보려면 < 클릭>

1. 이어서 두 번째로 ‘큰 믿음’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앞선 글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큰 믿음’ 혹은 ‘작은 믿음’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직접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표현의 정확한 의미와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장에서 사용되는 용도를 보면 많이 왜곡되어 있고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 의미를 되찾고,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크다’는 표현은 마태복음 15장 28절에 직접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15장 28절을 봅시다.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15:28)

2. 우리는 이 말씀을 읽다가 번뜩 비슷한 결말을 가지고 있는 어느 구절(사건)이 생각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8장 10, 13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8:10)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8:13)

3. 두 사건의 공통점과 차이는 무엇입니까? 먼저 공통점을 살펴보면, 첫째로 모두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8장에 등장하는 사람은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고(8:5), 15장에 등장하는 여인은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만난 가나안 여자였습니다(15:21). 둘째로 모두 예수님께 그 믿음이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읽은 말씀처럼 백부장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 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라는 칭찬을 받았고, 가나안 여인은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셋째로 모두 예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멀리 떨어져 있는 하인과 딸이 인간의 방법으로는 나을 수 없는 질병과 문제로부터 온전한 나음과 해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4. 차이점을 정리해 봅시다. 서로 다른 사건이니 차이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점을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백부장은 예수님을 ‘주’(퀴리오스)라고 부릅니다(5:6, 8).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그리고 ‘주’라고 부릅니다(15:22, 25, 27). 둘째로 예수님은 백부장의 요청에 흔쾌하게 응하십니다. 하지만 가나안 여인의 요청엔 민망할 정도로 거부 의사를 확실하게 밝히십니다. 셋째로는 백부장의 하인은 중풍병의 문제였고 가나안 여인의 딸은 귀신 들림의 문제였습니다.

5. 자! 이젠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믿음이 되었을까요? 다시 말하면 큰 믿음이라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믿음이라고 칭찬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가나안 여인의 경우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것은 한 번도 보이신 적이 없는 까칠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복음서 어디를 봐도 그렇게 무례하게 거절하시거나 사람들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도록 말씀하신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가나안 여인에게는 그렇게 반응하셨습니다(심지어 개라는 표현까지 사용하십니다).

6.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그런 예수님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개와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며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요점 한 가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개는 양과 대비되는 존재로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밖에 있는 비천한 존재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인은 주인의 돌봄과 배려의 관계 안에 있는 개(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는)를 말하고 있습니다.

7. 그렇다면 이 여인은 어떻게 이런 발직한 상상(사고)를 할 수 있었을까요? 주변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개와 같은 존재로 취급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그런 놀라운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에 힌트가 되는 단어가 다윗의 자손’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메시아 전승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구약이 약속한 메시아임을 알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그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구원에 이방인들도 포함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8. 그렇다면 이 여인은 이런 지식과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요? 해당 본문에 그것에 대해서 어떤 설명도 힌트도 없습니다. 어떤 과정, 어떤 루트를 통해서 알게 되었으며, 어떻게 그것을 믿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는 메시아를 알고 있었고, 그 메시아가 예수님임을 믿었으며,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예수님 앞에 나아가 메시아가 베푸시는 해방과 구원을 요청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믿었다는 것이다.

9. 그렇다면 예수님은 여인의 무엇을 보시고 큰 믿음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고백 그리고 자신의 삶의 문제를 연결하여 생각하는 마음이다. 믿음은 어떤 지식이나 신앙체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믿기 때문에 고백할 수 있지만, 고백 자체가 믿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큰 믿음이라고 칭찬을 받았던 것은 자신의 처지와 상황 속으로 신앙적 앎과 고백을 가지고 왔을뿐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생각과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10. 저는 여기서 생각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백부장의 사건을 통해서도 확인할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과 상황 속에서 좌절하고 포기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더 나아가 그 생각을 마음 속에만 품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에게서 그것을 보시고 큰 믿음이라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삶의 현장 속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작은 믿음이란 예수님보다 자신의 환경과 문제가 더 크게 보이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