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의 비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성경이 개인의 삶에 대해서 디테일 하게 말씀하고 있고,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개인의 스페셜한 부분까지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성경은 개인의 스페셜한 부분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다(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대학이나 직장에 가야 하는지,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이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저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대신 하나님의 스페셜한 뜻과 계획,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스페셜한 행위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성경은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 분이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며, 그 뜻을 어떤 내용과 방법으로 계시하시고 성취해 가시는지를 이야기함으로 그 이야기를 읽는 독자를 초청하는 책이다.

이것을 또 다시 쉽게 푼다면, 성경은 개인의 이야기엔 별로 관심이 없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계신다. 그뿐 아니라 개인의 이야기에 초점 맞추어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이야기에 각 개인들을 초청하신다. 그러니까 각 개인의 이야기에 하나님을 영접하고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이야기에 개인들을 초청하고 계신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이야기에 자신을 드리고 순종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명확해져야 한다. 그래야 개인의 이야기,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준비가 된 것이다. 이것이 명확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 할 때 심각한 오류가 발생하고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다. 하나님이 마치 한 개인의 계획과 야망과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램프의 요정 지니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영접한다, 거듭났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 왕국의 복음 이야기를 바르게 인지하고, 그 이야기에 자신의 모든 삶을 드렸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 분을 따른다는 것도 동일하다. 자신의 온 삶을 드려 하나님 왕국의 복음 이야기를 성취하신 예수님처럼, 이제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를 위해 자신의 온 삶을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도이고 성경이 말씀하는 성경적인 신앙생활이다.

이것이 명확해지면 개인의 취업이나 진로, 결혼 등등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음 이야기에 자신의 삶을 드린 자를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개입하셔서 인도하시고 성령과 기록된 말씀으로, 기도 가운데, 교회 공동체와 환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어떤 이야기로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나의 이야기로 살 것인지, 하나님의 이야기로 살 것인지!

승리가 약속된 자의 삶

묵상한 말씀 : 고린도전서 15:50~58
나에게 주시는 말씀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알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58절)

1. 요약

부활이 필요한 것은 썩을 몸으로는 하나님의 왕국을 이어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나팔 소리가 나면 우리는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때 죽음과 죄는 심판을 것이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2. 깨달아지는 것

가. 50절부터 사도 바울은 부활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왜 부활해야 하는가? 왜 부활이 필요한가?” 그것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살과 피로는 완성되는 하나님의 왕국을 이어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왕국은 영원한 왕국(썩지 않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썩어서 없어질 몸이다. 유한하고 제한된 몸으로는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을 이어받을 수 벗다.

나. 51절 이하에서는 한 가지 비밀을 말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 드러났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새롭게 변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확인했기 때문이다(첫 열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그때 죽은 사람들이 썩지 않을 새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고, 아직 살아있는 자들은 변화될 것이다(52절). 그 변화는 놀라운 것이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으로 변화되는 것이다(53절).

다. 이런 변화는 한 가지 더 놀라운 사건을 동반한다. 그것은 사망은 삼켜지고(사라지고) 승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54절). 썩을 몸을 입고 있을 때 역사하던 사망의 권세가 완전히 깨어지고 끝났다는 것이다. 더불어 사망의 독침이었던 죄와, 죄의 힘이었던 율법마저도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재림의 주로 다시 오심으로서 주님을 믿고 따르면 성도들이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고 변화 되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승리라고 말한다. 사망과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성도들도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55~57절).

라. 58절은 이러한 승리를 보장받고 약속받은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언급한다. 부활과 승리를 약속받은 성도들은, 첫째로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stand firm, let nothing move you). 둘째로 자신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알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 먼저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과 부활, 하나님 왕국의 완성에 대한 진리 가운데 확신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을 부인하고 공격하는 자들이 있겠지만 그것 때문에 진리에 대한 확신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주의 일’이란 무엇인가?(3-가 참조)

3. 질문

가. 58절은 교회 안에서 자주 듣게 되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주의 일’(the work of the Lord)이란 무엇인가? 교회 건물 안에서 봉사하는 것이 주의 일인가? 어쩌면 우리는 그런 인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문에 어디에도 교회 건물 안에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주의 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조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항상 문맥과 상관 없이 그 구절을 독립 시키고 우리가 원하는 개념을 그 안에 집어넣어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나. 그렇다면 주의 일이란 무엇인가? 한 가지 명확히 구분해야 하는 것은 ‘주를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주의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그 일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주의 일이란 어떤 특정한 봉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복음의 전파(하나님 왕국의 완성), 그 결과로 세워진 신앙 공동체를 돌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 일들을 지금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지금도 성령을 통해 일하고 계시는 그 일에 우리의 삶을 드려 동참하는 것이다.

4. 적용

부활은 복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이다. 주님은 그것을 직접 완성하셨고, 지금도 다스림으로 이루어 가고 계신다. 그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부활할 것은 확신하고 소망하는 신자는 그 구원 사역, 하나님 왕국의 완성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리는 자이다. 그것이 주님의 일이다. 썩을 몸으로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그 분의 왕국을 위해 온전히 드려야 한다. 그것이 부활을 살아내는 삶이고 주의 일에 힘쓰는 삶이다.

5. 기도

주님의 최종적인 승리를 확인하고 확신하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삶이 되게 하소서! 썩을 육체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복음과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이 썩을 육체를 온전히 사용하게 하소서!

부활에 대한 바른 이해

묵상한 말씀 : 고린도전서 15:35~49
나에게 주시는 말씀 : “우리가 흙에 속한 사람의 형상을 입은 것처럼 또한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49절)

1. 요약

고린도 교회 성도 가운데 어떤 이들은 부활의 몸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 사도 바울은 부활을 씨에 비유하며 설명한다. 또한 이 땅에 속한 육체가 있다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육체가 있다고 말한다. 아담은 흙에서 왔지만 예수님은 하늘에서 와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하늘에 속한 새로운 형상을 입혀줄 것이다.

2. 깨달은 것

가. 35절부터는 부활의 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부활의 몸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옵니까?” 사도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씨’(혹은 파종)에 비유하며 설명한다(36~41절). 씨와 그 씨에서 나오는 곡식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면 사과의 씨와 사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처음에는 사과 씨를 심는다. 하지만 그 씨를 통해 얻게 되는 사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그 씨가 심겨져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지 않고서 새로운 모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각각의 씨를 통해 얻게 되는 열매가 다른 것처럼 육체의 모양도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의 육체가 있고, 짐승의 육체가 있고 새의 육체가 있고. 더 나아가 하늘에 속한 몸이 있고 땅에 속한 몸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몸들이 가지고 있는 영광도 다르다는 것이다. 마치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이 서로 다른 것처럼.

나. 부활도 이와 같다. 씨앗과 같이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난다(42절). 비천한 몸으로 묻히지만 영광 가운데 살아나며 약한 사람으로 묻히지만 강한 사람으로 살아난다(43절). 자연의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살아난다(44절). 이런 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첫 사람 아담은 생명이 있는 영으로 창조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는 영으로 오셨다. 그래서 먼저 아담을 통해 자연에 속한 몸을 얻게 되고, 그 다음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영적인 몸을 얻게 되는 것이다(45~46절).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태어났고, 우리도 그 아담을 통해서 땅에 속한 몸을 받았다. 그러나 둘째 사람이신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고 하늘에 속한 몸을 입으셨다. 마지막 날에/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에 속한 새로운 형상을 입게 될 것이다(47~49절).

다. 우리는 지금은 첫째 아담을 통해 받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언제가는 죽을 것이고, 땅에 묻혀 썩을 것이다. 그리고 이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병들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제약과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어느 누구도 육체가 가진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몸을 부여 받는다. 그 몸은 썩지 않고, 영광스러울 것이며, 강하고 영적인 몸이다. 그러나 그것도 몸이라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우리는 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몸을 입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정해 놓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하나님의 왕국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라. 성경은 그것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표현에서도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새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 땅도 있다. 우리는 새 하늘에 가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새 땅에서 새 몸을 입고 살 것이다. 우리는 늘 두 가지 극단을 조심해야 한다. 부활이 없고 육체로만 살다가 죽으면 끝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몸은 없고 영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영으로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하셨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새로운 몸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정해 놓으신 한계이다. 마치 아담을 지으실 때 육체와 영을 가진 존재로 정해 놓으신 것처럼.

3. 적용

부활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올바른 것이 아니며, 반대로 부활이 영의 부활만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몸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가진 육체와 비교하면 놀라운 것이고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몸이라는 것을 가진 존재로 다시 부활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이다. 우리는 새로운 부활의 몸을 입고 새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4. 기도

부활의 가치를 다시 깨닫게 하소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소서! 영적인 것은 몸이라는 한계를 가져야 한다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한계 앞에 늘 겸손하게 하소서! 착각하지 않게 하소서!

부활의 신앙은 날마다 죽는 삶으로 드러난다

묵상한 말씀 : 고린도전서 15:20~34
나에게 주시는 말씀 : “형제들이여,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내 자랑인 여러분을 두고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31절)

1. 요약

부활의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한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아담 때문에 죽음이 왔다면, 예수님으로 인해 생명과 부활이 왔다. 이 부활은 차례대로 될 것인데, 먼저 예수님의 부활이고 그 다음은 주님에게 속한 자들이고 그 다음엔 세상의 마지막이 올 것이다. 그때 주님은 모든 권세들을 멸하시고 통치하실 것이다. 만약 이러한 부활의 소망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고 있고, 정신을 차리고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

2. 깨달은 말씀

가. 20절부터는 부활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한다. 앞에서 부활의 가치와 중요성을 다루었다면, 이제부터는 구체적으로 부활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한다(더불어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설명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소망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firstftruits)가 되셨기 때문이다. 첫 열매란 앞으로 계속해서 열매(=부활)가 맺힐 것인데, 그것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시작/출발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시작으로 해서 부활의 열매가 맺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나. 21~22절은 첫 사람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한다. 한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지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표성의 원리이다. 아담이라는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 그런데 이런 일은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23~25절을 보면, 먼저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어야 하고(이미 있었고) 그 다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 분에게 속한 사람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 가서야 세상의 마지막(종말)이 오게 된다. 그 종말이 오면 세상에 있는 모든 권력과 권세와 권능을 멸하시고 그 분의 왕국을 하나님께 바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두실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때까지 다스리실 것이다.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서 생명의 주(LORD)가 되셨다. 즉 왕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오실 때까지 통치하고 다스릴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왕국’이라고 부른다.

라. 그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때가 되면 다시 오실 것이다. 성경은 그때를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세상의 마지막 때가 되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는 성도들의 부활이고, 둘째는 세상의 모든 권력과 권세와 권능이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26절에서는 그 권력과 권세와 권능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멸망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죽음을 의인화 하는 표현인데, 그 죽음이란 바로 죄(Sin)를 말하는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예수님의 발 아래에 두실 것이다. 발 아래에 둔다는 것은 ‘복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온전히 통치, 완전한 다스림을 의미하는 것이다(27절). 그리고 예수님도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실 것이다. 이것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이 ‘만유의 주’가 되실 것이다(28절).

마.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이것이 창조 세계를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다. 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바로 부활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고 그 이후에 일들이 일어날 수 없다. 부활을 부인한다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부인하는 것이다. 부활은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만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 부활을 통해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다.

바. 29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해석하기가 어렵다는 난해 구절 중의 최고봉이다. 죽은 사람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는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3-가를 참조하라.

사. 31절 이하에서는 그런 부활을 정말 믿는다면 어떤 삶으로 응답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부활을 믿는 자의 삶은 날마다 자신을 죽어야 한다(I face death every day). 사도 바울은 이런 삶을 검투사에 비교를 한다(32절). 고대 로마 시대에 잘 훈련된 검투사들은 원형 경기장에서 다른 검투사들과 혹은 사나운 맹수들과 결투를 벌였다. 32절에서 말하는 것은, 만약 부활이 없다면 그런 검투사들처럼 맹수들과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들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묻는 것이다. 어차피 죽고 끝나는 인생이라면 그냥 그 인생을 신나게 즐기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부활의 소망이 있다면 죽음으로 끝난다 해도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검투사들 처럼) 싸우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 그러므로 좋은 습관을 망쳐 놓는 나쁜 친구들을 경계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좋은 습관이란 부활 신앙을 말한다. 나쁜 친구들이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교회 공동체 안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경계하고 그들과 같이 어리석은 말,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이처럼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계속 말하지만 단순히 죽은 자의 부활 정도만을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을 믿는 신앙 안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가 함께 담겨져 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확신하는 삶 가운데 날마자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신자의 삶이다.

3. 질문

가. 29절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구절을 놓고 수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기독교 전통 아니 성경 전체적인 전통을 살펴 보아도 죽은 사람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는 예식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이해를 해야 하는가?

나. 항상 강조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문맥을 놓치면 안 된다. 제일 먼저 앞뒤 문맥을 살펴보자. 20절부터 시작해서 28절까지 부활의 신학적 의미와 가치를 설명한다. 부활이 첫 열매이고, 부활을 통해 신자들의 삶, 아니 우주적인 창조 질서 안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시작되며, 그것이 어떻게 마감되는지를 설명한다.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해서 성도들의 부활을 통해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29~30절은 조건절로 시작해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1) 왜 죽은 사람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습니까? (2) 왜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까?

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다. 사도 바울도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으며, 다른 성경에서도 그런 전통이나 예식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정직하게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 다만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일들이 있었고, 그런 예식들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조점은 그런 예식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런 예식을 왜 하느냐는 것이다. 부활을 믿기 때문에 그런 예식을 행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또한 부활을 믿기 때문에 매순간 닥쳐오는 위험을 피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정말 부활이 없다면 믿는다면 자신을 그런 위험에 노출 시키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이다. 그냥 이 정도에 만족해야 한다. 더 이상 어떤 해석을 시도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여러 가지 추측이나 상상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고고학적인 발견이나 더 구체적인 자료들이 발견되지 않는한 한계가 있다.

4. 적용

진짜 죽었다면 부활할 것이다. 또한 부활을 믿기에 날마다 죽을 수 있다. 이같이 십자가와 부활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을 믿는 자들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는 부활한다. 그것을 믿는다면 신자는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죽이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활의 신앙이 없기 때문이며, 진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활을 믿는가? 그런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아라! 그것이 부활 신앙이다.

5. 기도

부활의 소망 가운데 날마다 죽는 삶을 선택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