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에 정답은 없다

개척을 하고 만난 목회 환경은
머리로만 생각했던거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웠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도 많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도 다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생기니
거의 모든 개척교회들이 어려웠다.
겉으로 보이는 문제들은 대충 비슷했지만
심층으로 들어가면 다 달랐다.
사람이 다르고, 대상이 달랐고,
그 안에서 생기는 역동이 달랐다.

누구는 하드웨어 때문에
누구는 소프트웨어 때문에
누구는 휴먼웨어 때문에
힘들고 어렵고, 실패와 도전을 반복했다.

하지만 정해진 정답은 없다.
목회에 성공한 분들이 무슨 세미나를 열고
자신의 경험들을 책으로 출판해서
마치 지니의 요술 램프처럼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될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 성공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이나 스킬이 아니다.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목회 신학과
성경이 말씀하시는 본질(핵심)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사역 가운데
풀어내는 순종과 성품과 관계가 중요하다.

그 다음 결과는 절대 사람의 몫이 아니다.
우리가 뭐라고 사람을 바꿀 수 있으며,
우리가 뭐라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다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이상의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가 부르신 곳에서, 맡기신 영혼들을
최선을 다해, 겸손히 섬기는 것이다.
보내신 곳에서 복음을 포기하지 않고 나누며,
제자 삼는 사역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사역들을
감당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당장 없어 낙심할 순 있지만
그냥 묵묵히 한 방향으로 오랜 순종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

유아 세례에 대한 추억 그리고 반대하는 이유

오늘 한 성도로부터 유아세례 요청이 왔다. 하지만 유아세례를 정중히 거절했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유아세례를 지지하지 않으며, 성경적으로도 정당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유아세례에 대한 여러 가지 입장이 있고, 그 입장들을 존중한다. 하지만 세례라는 것이 무엇인지 잠깐만 생각해 봐도 유아세례라는 용어 자체가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교회사적으론 유아세례가 오랜 전통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성경과 신앙생활에서 세례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안다면 유아세례라는 것 자체는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유아세례 반대론자가 된 계기가 있다. 98년 결혼을 해서 99년 첫 딸을 낳았다. 그때 교단에서는 유아세례를 수용한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기억으로 96년인 것 같다). 어느 날 담임목사님이 부르시더니 교회에서 세례식을 진행하는데 전도사의 자녀는 당연히 유아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사실 그때는 유아세례에 대한 관심도 그리 많지 않았고, 신학적으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더 나아가 전도사로서 담임목사님의 의견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유아세례를 받았고, 지금까지 20년이 흘렀다. 지난 20년을 지나오면서 첫째 딸을 향한 가장 큰 기도제목은 그녀의 구원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유아세례를 받은 그 딸에게 초등학교 때 복음을 전했고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인도하고 도왔다는 것이다. 사실 큰 딸은 어릴 적에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기억조차 없다.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부어져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인정할 뿐아니라, 그 죄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의지와 결단을 사용해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는 것이다.

세례라는 것은 그런 과정을 통해 구원 받은 자(구원 받은 열매가 드러나는 자)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옛 자아와 옛 삶은 완전히 죽고 끝났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을, 이제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자녀가 되었음을 확증하고 확인하는 신앙적이고 공동체적인 의식이자 선언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없는 유아에게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목회적으로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세례라는 것이 단 한 번만 주는 것이기에 더욱더 신중해야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큰 딸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의 고백을 했을 때 정말 기쁜 마음으로 세례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유아 세례를 받은 자였기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때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아!~~ 이래서 재세례파가 등장하게 되었구나!” 만약 세례가 여러 번 가능하고, 여러 번 줄 수 있다고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세례는 일생에 있어서 단 한 번만 가능한 것이기에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진중 세례, 유아 세례뿐만 아니라 교인을 확보하기 위해 남용되는 세례 의식에 대해서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고 말하고 싶다. 진짜 세례가 무엇인지, 그것이 갖는 성경적이고 신학적이며 목회적인 가치와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더 깊이 고찰하고, 지금 목회 현장에서는 벌어지는 세례가 어떻게 남용되고 있고 오용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자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교회의 타락과 신앙의 타락의 시작이 세례의 남용에 있는 것은 아닌지 같이 고민해 보자고 말하고 싶다.

[신학 실종, 성서학 실종]

신학대학에서 신학과 성서 연구는 왜 배웠나? 짧게는 3년 길게는 7(6)년을 그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 신학과 성서학을 배운 이유가 무엇인가? 학교 졸업하면 끝인가? 그 이후론 세상 학문과 지식만 배우나? 경영학, 마켓팅, 통계학, 심리학, 혹은 자기개발(계발)과 부자 되는 법만 배우나? 그렇다면 역사와 사회학, 인문학, 세계관 분야에도 관심을 좀 가지시라. 더 폭 넓게 공부 좀 하시라.

아니면 목사 되려고 배웠나?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신학 과정을 이수해야 하니까 신학대학을 다닌 것인가? 요즘 목회 현장과 강단을 보면 신학이나 성경을 가지고 씨름한 흔적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누구의 간증과 어느 책에서 봤던 관련 이야기, 본문에 몇 번 등장하는 관련 단어들만 가지고 설교하는 소리만 무성하다.

요즘 목회 현장과 강단에서 신학의 위치는 어디고 역할은 무엇인가? 아니 너무나 기본적인 성서 연구조차 하지 않는다면 뭐하러 본문을 정하며, 그것을 구지 대독자까지 세워서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말씀을 읽을 때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이란 표현은 참 공허하고 헛되게 들린다.

한국 교회가 이 지경이 되고, 성도들의 의식 수준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게 엉망이 된 가장 큰 책임은 거의 백 퍼센트 목사인 우리들에게 있다. 세상이 타락하고 혼탁해져서가 아니다. 자주 말하지만 세상은 원래 타락하고 깨어진 곳이다. 아담 이후로 더 나아지거나 더 나빠지지 않았다. 그러니 세상 탓하지 마라. 다 우리 목사들의 잘못이다.

신학대학에서 배운 신학은 쓰레기통에 다 던져버리고 오직 눈에 보이는 숫자에만 매달려 교인 수와 몸집을 키우기에만 급급했다. 그러다보니 성경을 가지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세상 지식이나 축복, 성공, 무슨 무슨 법칙들만 강단에서 나열한다. 읽은 말씀을 가지고 조금만 깊이 다루면 재미 없다 지루하다는 피드백이 바로 들어오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이 두려워 가볍고 재미 있는 설교만 하려는 우리 목사들에게 더 큰 문제가 있다.

신학이 없는 목회, 성경이 없는 강단이 한국 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 사상이나 동성애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신학이 없는 목사들과 성경이 없는 강단이 더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이다. 그것이 한국 교회를 지속적으로 좀 먹었으며 부패하게 하였다. 요즘 교회는 하급 종교로 완전히 전락해 버린 것 같다. “우리는 세상 종교와 다르다! 오직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라고 외치지만 교회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있으면 교회가 외치는 구원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가벼워도 너무 가볍다. 얕다 너무 얕다. 수준 미달이다. 그래서 아프고 슬프다. 신학이 무엇이고 성경이 왜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너무 많다. 나도 희망적인 이야기, 소망적인 간증을 나누고 싶다. 이런 부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미래의 비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요즘 현장에서 들여오는 이야기는 그런 미래적 소망과 희망을 말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 엉클어진 실 타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프다. 많이 아프다.

인고의 착각

요즘 인문학과 관련된 강의를 들으려고 노력한다. 어제 우연히 ‘어쩌다 어른’이라는 프로그램의 허태균 교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2017년 3월에 방영). 허 교수는 사회 심리학자로서 한국 사회를 예리하게 분석하며 강의를 했다. 특히 그 내용 중에 ‘인고의 착각’이란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부르심을 받은 신학도와 목사로서 살아온 삶에 대해서 여러 부분들을 다시 보게 했다.

인고의 착각… 그저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열심히 노력하면서 보내면 나중에 어떤 형태로든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사회적(혹은 종교적) 강요 속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만 하는 한국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것은 목회자의 삶에도 비슷하게 투영된다.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며 살아왔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깊은 실패와 좌절, 넘을 수 없는 현장의 높은 벽들, 압박해 오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허무함들이 쓰나미 처럼 밀려올 때 번아웃(탈진) 될 수 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하염없이 흔들리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허 교수는 이것에 대해서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리더와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닐 수 있다. 혹은 아니다.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리더와 그것을 개선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준비하고 가동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 방향으로만 열심히 뛰다 보면 1등, 2등, 3등이 결정되는데, 사방으로 뛰어가면 순위를 매길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단순히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용은 없고 그저 열심히 하면 잘 될 것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허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의 이야기를 목회와 교계의 현장에 대입해 보았다.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많은 신학생들을 선발 하기에만 급급한 신학대학과 정치적 경제적 이해 관계에 빠져 비전도 전략도 없는 교단, 행정주의 빠진 지방회, 사명이라는 구호 아래 현장에 내몰리지만 기계의 부품처럼 전락해 버린 목사들, 어쩔 수 없이(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하는 개척, 이미 정글의 법칙이 가동 중인 한국 교회의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목회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교단 행사나 세미나 같은 곳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더’ 노력하고 ‘더 헌신 하라는 것이다. 자신들은 많은 것을 누리는 위치에 있으면서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하는 목사들에게 그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사명만을 강조한다.

이젠 누군가는 멈추어서 우리가 지금까지 달려온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말해야 한다. 더 많은 헌신과 노력을 하면 목회가 나아질 것이고 성장할 것이라는, 반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목회자라는 사람이 더 많이 기도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는 것을 이제는 멈추고, 우리 안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을 수정해야 하고, 다시 어떤 방향으로 달려야 하는지를 서로 고민하고 찾아가는 시간들을 가져야 할 것이다. 더 빨리 달리면 저 언덕 너머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신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 고문’을 멈추어야 할 때가 되었다. 또한 무한 경쟁으로 치닫는 목회 현장의 문제들을 함께 고쳐나갈 수 있도록 호소하고 무엇이라도 시도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미루지 말고 함께 고민하고 씨름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