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왕국과 거듭남

2019년 5월 12일 주일 설교 동영상

말씀 : 요한복음 3:1~7
제목 : 하나님의 왕국과 거듭남
설교 : 이상준 목사(복음자리교회)

**이번 설교에 도움이 된 책은 짐 월리스의 ‘회심’입니다. 혹시 이 부분에 대해서 더 공부하길 원하시는 분은 리처드 피스의 ‘신약이 말하는 회심’도 함께 읽으시면 좋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만이

묵상한 말씀 : 갈라디아서 3:1~9

1. 다른 복음에 너무나 쉽게 빠진 이들을 보면서 바울은 개탄을 한다. 그들의 이런 행위들이 큰 아픔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두 가지의 명백한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이다. 둘째는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건이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후자의 사건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도 너무나 중요하지만,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건도 중요하고 확실하며 명백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2. 그런 차원에서 1~9절의 강조점은 믿음이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예로 설명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동일하게 (이방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동시에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을 함께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3. 재미 있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렇게 믿음에 대해서 강조하기 위해서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은 2절에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라고 말을 시작하며 질문들을 던진다. “여러분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5절에서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기 때문입니까?”

4.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성령 받음’은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일까? 흔히들 알고 있는 회심 이후에 2차적으로 일어난다는 ‘성령 세례’를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다시 읽어보면 그런 구조를 발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성령 받음’은 중생이나 회심의 사건과 별개로 존재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또한 몇 사람들만이 특별하게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사건으로 언급하고 있지도 않다. 복음을 듣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2, 5절).

5. 우리가 알고 있는 2차적인 사건으로서의 ‘성령 세례’가 많이 왜곡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성령을 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성령 세례’만의 문제가 아니다. ‘성령의 은사’나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통해 받는 것으로, 인간의 특별한 노력과 열심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성도가 경험하는 ‘성령 받음’이나 ‘능력 행함’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6. 바울은 이것을 확증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언급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것이 하나님께 의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으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을 동일하게 의롭다고 선포하시고 복을 주실 것이다. 이것도 어떤 종교적인 노력이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7.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믿음은 인간의 행위 자체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통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는데, 갈라디아서나 로마서 등에서 강조하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인간의 구원에 관계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당연히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순종을 강조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예를 든다면 율법의 행위라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거부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이루거나 얻으려고 하는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이다.

8. 거기에 성령의 역사도 포함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그렇고, 성령을 받는 사건도 그렇고, 이바르함의 자손이 되어 그에게 허락된 복을 누리는 것도 그렇고, 모두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인간의 행위 자체를 부정하거나 부인하지 않는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무엇인가를 더 첨가하려고 하는 모든 인간의 시도와 노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복음이고, 교회 공동체가 늘 경계해야 하는 거짓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것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묵상한 말씀 : 히브리서 4:1~11

1. 히브리서 4장은 계속해서 ‘안식’(rest)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만 안식이란 단어가 8번 사용 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럼 히브리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안식’이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왜 히브리서는 안식을 강조하고 있는가? 그것이 히브리서 원독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히브리서 저자는 안식에 대해서 강조하기 위해 계속해서 출애굽 여정을 언급하고 있다. 특히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반복 인용하면서 믿음과 순종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믿음과 순종으로 들어갈 곳이 ‘가나안 땅’이 아니라 ‘안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출애굽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원독자들에겐 새롭게 도전이 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약속을 받은 곳은 ‘가나안 땅’이었지만, 신약 백성들에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11절).

2. 그렇다면 4장에서 강조하는 안식이란 무엇인가? 1절을 보면 ‘그분의 안식’(his rest), 3절과 4절을 보면 ‘내 안식’(my rest), 그리고 10절을 보면 ‘하나님의 안식’(God’s rest)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동시에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그분의 모든 일을 쉬셨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창세기 2장 2절을 인용한 것인데, 강조점은 안식이란 창조 때부터 존재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일하셨고, 7일째 되는 날엔 쉬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안식이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안식에 ‘들어간다’(enter)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어떤 여정을 전재한 말이다. 어떤 과정을 거치고 난 다음에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출애굽 여정이다.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받고 그곳을 향해 출애굽이라는 여정을 거친 것처럼, 우리도 안식을 약속 받았고, 그 안식으로 들어가기 위해 여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3. 그럼 다시 질문해야 하는데, ‘안식’이란 무엇인가? 단순하게 말하면 모든 수고를 멈추고 쉬는 것이다. 모든 일(work)을 내려놓는 것이다. 더 나아가 누리고 즐기고 감사하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에는 그 모든 것(창조 세계와 관계)을 즐기고 누리고 기뻐하셨던 것 처럼 하나님 안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왕국을 누리고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론 완성된 하나님의 왕국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8절에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하나님께서 나중에 다른 날에 대해여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안식은 이 땅에서 완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식은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된 하나님의 왕국에서 완전하게 누리고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 있는 것은 예수의 구약적인 호칭이 여호수아이다. 구약의 여호수아를 통해선 주어지지 못한 완전한 안식이 신약의 예수(여호수아)를 통해서 주어질 것을 돌려서 말하고 있다.

4. 오늘 말씀의 강조점은 그 약속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힘쓰라는 것이다(11절). 반대로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 하라는 것이다(1절). 왜냐하면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약속의 땅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주실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절을 보면, 들은 말씀과 믿음을 연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6절과 11절을 보면 불순종에 대한 경고가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다. 복음(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하면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출애굽 여정에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과 같은 반응을 보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들이 불순종함으로 약속의 땅,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지금도 동일하게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면 결과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5. 이것을 다시 확대하면 복음(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했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넘으로 애굽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지만 그것은 반대로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약속을 받았고 이미 새로운 구원을 경험했지만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였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여행인 것이다. 우리도 동일하다.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여 구원을 받았지만 그 안식에 완전히 들어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해서 매일 오늘이라고 불리는 날을 살아가야 한다. 그 오늘을 살아가는 중요한 방법은 바로 매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겐 어제란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엔 항상 오늘만 존재한다.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오늘 그 음성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오늘도 계속해서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가? 오늘은 내일을 만들고, 내일은 안식에 들어갈 소망을 갖게 한다.

예수님의 제자도 vs. 제자들이 제자도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4:43~52

  1.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시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좇았던 열두 명의 제자들의 모습이 대비된다. 그 중에 한 명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팔아 넘기는 일에 선봉에 서 있다. 그 중에 한 명은 그래도 용감하게 칼을 뽑아 자신의 스승을 지키기 위해 대제사장 하인의 귀를 쳐 잘라버렸다. 하지만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 버린다. 그 중에 한 명은 맨몸에 홑이불 하나만 두르고 예수님을 따르다가 사람들이 붙잡아 그 홑이불 마저도 버리고 벌거벗은 채 달아나 버렸다.
  2. 자신들의 눈 앞에 벌어지는 상황 – 함께 지내던 가룟인 유다가 칼로 무장한 로마 군인들과 몽둥이로 무장한 대제사장의 종들을 이끌고 갑자기 자신들의 아지트를 급습했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고 놀라고 두려웠겠는가? 곧 메시아의 왕국을 완성할 것이라는 부픈 기대감 속에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체포라니 그들은 1도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이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저항도 하지 한번 하지 않으시고 담담하게 그들에게 체포되어 끌려 가신다는 것이다. 성전을 그렇게 뒤집어 놓으실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이렇게 무력하게 나약하게 체포되는 것이 제자들을 더욱 놀라고 당황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3. 오늘 말씀을 통해 두 가지의 제자도를 보게 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길을 답답하게 걸어가시는 예수님, 비록 그 길에 고통과 조롱과 죽음이 놓여 있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면 묵묵히 자신의 눈 앞에 벌어지는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순종하시며 계속해서 그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제자도를 발견할 수 있다. 반대로 제자들이 제자도이다. 마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 것처럼 자신있게 말들을 했지만 정작 자신의 생명과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두려움이 엄습하자 예수님을 버리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그 길에서 이탈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더 나아가 한 제자는 함께 그 길을 걷는척은 했지만 뒤로 스승을 팔아버리는 배신자의 길을 걷고 있다.
  4. 우리는 다시 한번 제자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도전 받는다. 평화롭게 안정된 상황 속에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삶에 위기가 닥치고 두려움이 찾아오고 생명의 위협을 받고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변함 없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이탈하지 않고, 배신자의 길을 걷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이 믿음이고 순종이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도의 핵심은 멋진 신앙고백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삶의 현장, 부르심의 현장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변함 없이 예수님의 뒤따르는 사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게 진짜 제자도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