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의 최후

sport112묵상한 말씀 : 사무엘상 31:1~13
나에게 주신 말씀 :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날에 함께 죽었더라”(6절)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그 가문의 몰락을 보면서 마음이 무척이나 무겁다. 그의 시작을 보면 너무나 겸손한 사람이었다. 아니 겸손을 넘어 소심하다고 느낄 정도이다. 하지만 그는 곧 변질되고 타락한다. 하나님을 겸손하게 섬기던 사울이 아니라 자신의 왕권과 인기, 명예,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교만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왕이 되어버린다. 더 가슴이 아픈 것은 사울 혼자 죽은 것이 아니라 그 가문 전체가 완전히 몰락해 버린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던 요나단으로부터 시작해서 둘째 아비나답, 셋째 말기수아까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음을 당한다. 이 장면을 살펴보면서 다시 한번 사무엘상 2장 30절의 말씀이 떠오른다.

“나를 존중하는 사람들을 내가 존중할 것이고 나를 멸시하는 사람들을 나도 멸시할 것이다.” (삼상 2:30b)

사무엘상을 살펴보면 사울 가문과 비슷한 몰락을 경험한 가정이 또 하나 등장한다. 바로 엘리 가문이다.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엘리, 그리고 그의 두 아들(홉니와 비느하스)도 사울 가문과 같이 한 날에 모두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경험하게 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이다. 바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겨야 했던 엘리도,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도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심판은 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가정 전체에 임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던 요나단까지 동일한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다시 한번 사울 가문의 몰락을 통해 하나님이 던지시는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멸시하는지,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의 인생을 하나님이 얼마나 무시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너무하신다고 말할 것이다. 신약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고, 그것은 구약의 하나님이라고 구분지을 것이다. 하지만 구약의 하나님이나 신약의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또한 사무엘상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진리이고 원리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들을 존중하신다.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을 멸시하신다.

지금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 앞에 어떤 자세와 반응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마음과 생각을 보신다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매일의 삶의 태도와 반응들을 통해서 얼마나 하나님을 존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값아주신다. 무엇을 심었든지, 심은 그대로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시다. 존중이라는 씨를 심었다면 존중이라는 열매를 맺게될 것이다. 멸시라는 씨를 심었다면 멸시라는 씨를 맺게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변함없는 영적인 원리인 것이다. 나는 지금 삶의 반응과 태도, 순종을 통해서 어떤 씨를 심고 있는가? 정말 하나님을 존중하고 있는가?

은혜와 분배

Girls Sharing Chocolate Milk묵상한 말씀 : 사무엘상 30:21~31
나에게 주신 말씀 :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23~25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말렉을 크게 치고 잃었던 가족들과 (잃었던 것보다) 더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온다. 그리고 브솔 시내에서 지쳐서 함께 가지 못했던 이백 명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때 그들 가운데 있던 악한 자와 불량배들(악하고 야비한 사람들)이 다윗에게 불만을 제기한다. 그들은 함께 브솔 시내를 건너서 아말렉을 치는데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가족들만 돌려주고 다른 재산들은 돌려주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말도 안되는 주장은 아니다. 고생은 우리가 했고, 목숨을 내놓고 싸운 것도 우리들이니 그냥 돌려줄수는 없다는 것이다. 노력한만큼, 고생한만큼 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다윗의 생각은 달랐다. 나가서 싸운 자들이나 브솔 시내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나 모두 동일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24절).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진리(원리)를 배워야 한다. 그들과 다윗의 생각이 달랐던 이유를 정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그들의 생각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23절을 보면 그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다윗이 언급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그렇지 않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셔서 우리를 치러 온 군대를 우리 손에 넘겨 주셨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여호와께서 주신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23절, 우리말성경)

그들의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주어’가 누구이냐의 문제였다. 이 결과가 누구에서 왔느냐의 문제였다. 그들의 생각은 ‘자신들’이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애쓰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니,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고, 아말렉 군대를 그들의 손에 넘겨 주셔서 이기게 하셨기 때문에 그 결과는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다윗은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그들과 다른 사고와 가치를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 다시 뒤로 돌아가서 30장 전체를 읽어보면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 문제와 상황 속에서 심사숙고함으로 결정하고 행동(노력)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윗은 그저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명확하게 해야한다. 분명히 그들의 노력과 결단이 있었다. 힘을 다해 추격하고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인 것은 분명히 그들이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약속하셨지만 그들의 애씀과 땀과 피가 있었다.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이다. 다윗도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400명 가운데 있었던 악한 자와 불량배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교만하게 자신들의 노력으로 성취했고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악한 자들의 문제이고 한계이다. 그들은 마음이 교만해져 있고 높아져 있어서 자신의 행동만 본다. 자신의 애씀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에 맞는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다윗은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 도우심을 보았고 경험했다. 겸손하게 자신이 이룬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로 얻은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거기에 참여해서 애쓴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동일하게 그 은혜와 축복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유다의 장로들에게 그리고 그동안 도움을 베풀었던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을 볼 수 있다(26~31절).

그것이 은혜를 알고 경험한 사람의 자세이고 반응인 것이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하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것 같다. 사람들과 나누어야할 것은 나누어야 한다. 함께 고생하고 수고한 사람들, 돌봐주고 사랑와 애정을 베풀어준 사람들을 기억하고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리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자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이 공동체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 그 공동체가 교회이건 선교단체이건 하나님이 주신 것을 공평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부익부 빈익빈’은 하나님의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노력과 애씀만을 생각하는 이 세상의 원리이다. 우리가 무엇을 얻었고 가졌다면 그것은 공평하게 분배하고 나누어야 한다. 그것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공동체가 세워지게 된다.

용기

cliff-jump4묵상한 말씀 : 사무엘상 30:1~20
나에게 주신 말씀 :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가 시작되고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를 따라 전쟁터로 나아갔다가 블레셋 여러 장수들의 반대로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온다. 다윗에게는 커다란 위기를 잘 넘긴 것이다. 잘못했으면 이스라엘 군대와 전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을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더욱 큰 시련과 위기가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아말렉이 다윗과 그 용사들이 없는 틈을 타서 시글락에 있는 모든 가족들과 재산들을 탈취해 갔기 때문이다.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너무나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사울의 추격을 피하며 지금까지 가족들과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렇게 고생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던 가족들, 자녀들 그리고 모든 재산이 아말렉에 의해 한 순간에 다 사라진 것이다. 이들에게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그동안 그렇게 따랐던 다윗을 돌로 쳐서 죽이자는 말까지 나온다(6절). 이 일로 다윗의 마음은 너무나 괴롭고 힘들었다. 자신의 가족들도 모두 빼앗기고, 공동체 전체가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힘들게 지키고 인도해 왔던 모든 고생과 노력이 물거품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다윗은 거기에서 주저 앉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용기를 얻었다고, 용기를 내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지금 다윗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용기이다. 눈 앞에 닥친 상황과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 바로 용기인 것이다. 그리고 그 용기는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긍정적인 사고나 심리학적인 접근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인 것이다. 어디까지, 어느만큼 알고 있으며 신뢰하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 다급한 상황, 위급한 상황 속에서 다윗은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신뢰한다.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때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묻기로 결정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상황과 문제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듣기를 결정한 것이다. 다윗은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기를 청하고, 하나님께 질문을 한다(에봇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구했는지 궁금하다). 그러자 기다리셨다는듯 하나님은 바로 응답하신다. 아말렉 군대를 쫓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따라잡게 되고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앞에서도 계속 다루고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두려움을 잘 다루어야 한다. 염려와 근심, 걱정, 불안이라는 생각은 두려움에서 시작된다(여기서 한 가지를 명확하게 정리해야 한다. 염려와 근심, 걱정, 불안은 감정이 아니라 생각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에서 시작되는 생각들인 것이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룰 수 있는 것은 용기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현대인들을 가장 많이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두려움이다. 또한 현대인들에게 가장 결핍되어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용기이다. 두려움을 죽는 상황과 환경에 직면해서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힘 – 바로 용기가 우리들에게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그 용기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관계에서 나온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며, 역사하시는, 능력으로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용기라는 것이 우리 안에 부어진다. 그리고 진정한 용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이다. 눈 앞에 벌어진 다급한 상황을 자신의 의지와 결단, 노력으로 해결하는 것이 용기가 아니다.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이 용기인 것이다. 지금 다윗은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가족들을 포함해서 공동체의 모든 가족들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지하여 믿음으로 반응한다. 그것이 용기인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 가운데 역사하시고 일하신다. 추격하는 과정에서 아말렉 주인에게서 버려진 애굽 소년을 만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사람들은 이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신 것이다), 아말렉 군대를 물리치고, 말씀하신 그대로 모든 가족들을 되찾고(그런 상황 가운데 아무도 상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신 것이다), 더 많은 전리품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용기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고, 그 말씀에 자신의 삶을 드릴 수 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누리고 경험하는 것이다.

요즘 나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들(특히 아내에게)과 복음자리 교회 위에 그 어떤 것보다 그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가지고 벼랑 끝에 서는 모험이 필요하다. 그럴 때 하나님이 역사와 능력, 채우심과 보호하심을 누리고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자꾸 그 벼랑 끝에 서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들에게 그 벼랑 끝에 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벼랑 끝으로 나아가는 용기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매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야 한다!

Listening-Ear묵상한 말씀 : 사무엘상 28:15~25
나에게 주신 말씀 : “사울이 갑자기 땅에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20절)

사울은 신접하는 여인을 통해 사무엘의 영을 불러 올린다. 특별히 이 장면에 대해서는 논란도 많고 해석의 차이도 많다. 크게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째는 진짜 사무엘의 영이라는 입장과 둘째는 진짜 사무엘의 영이 아니라 거짓의 영에 속고 있다는 입장이다. 성경 전체적인 맥락으로 살펴보면 전자보다는 후자의 해석이 더 지지를 받는다. 성경은 죽은 사람의 영이 떠돌아 다닌다거나 현실세계로 다시 불러올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일들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러한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신 18:10~12)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19:31)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레 20:6)

어떤 영적인 현상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되었든지, 사단으로부터 기인되었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것이다(사람에 의한 심리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무엘의 영은 진짜 사무엘이라기 보다는 거짓의 영인 것이다. 하지만 사단과 귀신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충분히 알고 전달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거짓 사무엘의 영이 사울에게 전한 메세지는 이미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행하고 계신 일들이지 어떤 미래적인 사건은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왕으로 사울의 역할과 책임은 분명하고 명확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아말렉과 같은 이방 민족을 심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울은 그런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망각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다. 그 결과는 왕권이 다윗에게 옮겨지고 그의 가정엔 하나님의 무거운 심판이 임하게 된다. 성경은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대상 10:13~14)

오늘 본문의 사건이 사울이 파멸하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제도 살펴보았지만 사울의 문제는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묻지 아니한 것이다. 매일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아니한 것이다. 평소에는 자신의 위치와 왕권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대로 살다가 위급한 일이 생기고, 자신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인도와 음성을 구했다. 하지만 이미 그때는 하나님이 떠난 후이다. 얼굴을 돌리신 이후였다.

관계는 그런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어떤 문제와 상황이 발생함으로 관계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평소에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대화도 없고, 무시하고 살다가 정작 자신에게 필요할 때 찾아와서 도와 달라면 아는 척을 하는 것은 무례하고 이기적인 행동일 뿐이다. 관계는 매일 지속적으로 개발시켜야 한다. 자주 만나서 대화하고 마음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울 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자신에게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자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고 싫어하는 일들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매일, 아니 매순간 당신의 얼굴을 구하고, 하늘 아버지의 품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라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그런 면에서 사울의 가장 반대되는 인물이 바로 다윗이었던 것이다. 그 안에 분명히 연약한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기를 원하는 마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인정하신다. 우리는 정직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하나님만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느냐?”고 말이다. “매순간 그 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고 있느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