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아뢰며

11223344묵상한 말씀 : 사무엘하 22:1~13

나에게 주신 말씀 : “내가 환난 주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7절)

지금까지의 삶속에서 역사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고 찬양하는 다윗의 시, 다윗의 노래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반석’, ‘요새’, ‘건지시는 자’, ‘방패’, ‘구원의 뿔’, ‘높은 망대’, ‘피난처’, ‘구원자’라고 고백하고 있다(2~3절). 한 마디로 요약하면 원수들(대적자들, 반대자들)에게서 건져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다(4절). 그렇다면 다윗은 자신의 삶속에서 그런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는가?

다윗은 삶속에서 여러 많은 위험과 고통의 시간들이 있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축복하신 왕이었지만 고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윗은 그런 시간들을 ‘사망의 물결’, ‘불의의 창수(홍수)’, ‘스올(지옥)의 줄’, ‘사망의 올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죽음이 가까왔고, 고통의 무게가 컸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삶이 끝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매일 느끼며 살아가는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런 고통 속에서 다윗이 선택한 것은 한 가지였다. 그것은 “여호와께 아뢰는(I called to the LORD, I called out to my God, 4,7절)”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상황과 문제들, 어려움들을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다. 호소하고 간구하고 아뢰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지, 어떤 고통 가운데 갇혀 있는지, 어떤 대적들의 추격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지를 상세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니 그냥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절박함과 간절함을 가지고 부르짖는 것이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이다(From his temple he heard my voice; my cry came to his ears). 부르짖는 소리, 호소하고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들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망이다.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이 소망이다(7절). 왜냐하면 그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놀라운 영광과 보좌 가운데 계신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존귀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이 미천하고 연약한 한 인간의 호소와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들으신다. 들으실 뿐만 아니라 친히 임재하시고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다윗은 수많은 고통과 고난 속에서 그런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반석, 방패와 산성, 망대, 피난처, 구원의 뿔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어떤 교리적인 고백이 아니라 삶의 경험적인 고백인 것이다. 그 고백 하나 하나에 놀라운 간증과 경험들, 사건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건을 통해서는 반석과 같은 하나님을, 다른 사건을 통해서는 방패와 같은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통틀어서 ‘구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혹은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많은 위협과 위기, 고통 속에서는 부르짖지 못하고 있다. 불안해 하고, 염려하고, 걱정하기만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다. 호소하고 간구하는 것이다.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아뢰고 고백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다윗이 경험했던 하나님을 동일하게 경험하게 된다. 반석이시고, 산성이시고, 피난처가 되시는,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을 친히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 개인적으로도 매우 불안한 상황 가운데 놓여 있다. 이사 문제, 재정 문제, 자녀들 문제, 아직도 연약하고 어려움이 많은 교회 공동체 문제, 지체들의 삶속에 있는 여러 가지 한계와 고통들… 그 앞에서 너무나 작고 연약한 가장과 목사로서 서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주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아뢰고… 간구하고… 부르짖고… 호소하라고 하신다. 걱정만 하지말고 입을 열어 주님께 간구하라고 하신다. 다시 내 삶에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길 소망한다. 다윗이 고백했던 하나님을 나도(복음자리 공동체도)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도우시고 채우시는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신다!

137657495_49a7896d9f묵상한 말씀 : 사무엘하 17:15~29
나에게 주신 말씀 :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묻되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 하니 여인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 하니 그들이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더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20, 27~29절)

오늘 말씀을 보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들을 도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첫 번째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는 한 여인의 이야기이다. 후새를 통해 예루살렘의 상황을 전해 들은 요나단과 아하마아스가 압살롬의 사람들에게 쫓기게 되자 어느 여인의 집으로 들어가 우물에 숨게 된다. 그러자 이 여인은 우물의 입구를 찧은 곡식으로 덮어 버린다. 그리고 뒤쫓아온 압살롬의 사람들에게 거짓 보고를 전해 줌으로 요나단과 아하마아스를 돕는다.

두 번째는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이다. 이 세 사람은 요단강 동편 지역에서 상당한 재력을 가진 부자들이었던 것 같다. 밤새도록 요단강을 건너온 다윗과 그 일행들을 위해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침대와 닦을 수 있는 대야, 그리고 식사를 할 수 있는 그릇과 여러 음식들을 가지고 온 것이다. 이것을 통해 광야 길에서 지치고 피곤한 다윗과 그 일행들이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위험한 고비마다, 고난의 시간을 넘어갈 때마다 하나님은 도움의 손길을 준비해 주신다. 급박한 예루살렘의 상황들을 다윗에게 전하기 위해 압살롬의 사람들에게 쫓겨야 했던 요나단과 아하마아스를 도운 여인의 손길이 그러했고, 또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온 다윗과 그 일행들을 위해 편히 쉬고 먹을 수 있도록 도운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의 손길이 그러했다. 하나님은 위기의 상황 가운데, 육체의 피곤함과 고단한 시간들 속에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 채우시고 보호하시고 쉬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신실하신 사랑이다. 죄로 인한 징계를 허락 하시지만 그것으로 인해 죽지는 않도록, 절망과 좌절하지 않도록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 고비 때마다 돕는 손길과 사람들을 보내어 주신다. 그런 사람들을 예비해 두신다. 이것은 나와 내 가정이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들을 뒤돌아 보아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곳곳에 예비해 놓으시고, 그들을 통해 연약한 나와 우리 가정의 필요를 공급해 주셨고 보호하시며 인도해 주셨다.

더불어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 신실하신 주님께서 앞으로도 동일하게 역사 하시고 앞서 가시면서 공급하시고 붙들어 주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고난과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지만 그 가운데 소망을 붙들 수 있고, 미래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어떠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보거나 내가 가진 것을 보면 불안하고 좌절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눈을 들어 모든 필요와 상황들을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진정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두렵고 무섭다.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상황들이 나를 근심케 만든다.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아침에 주님은 다시 격려하신다. 고비 때마다, 고난의 고개를 넘어갈 때마다 주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더불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함께 할 것이라고 하신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돕고 채우고 함께 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이 뜻 가운데 계속적으로 순종하고 있는가? 주님이 말씀하신 길을 믿음으로 계속해서 걸어가고 있는가? 그것이다. 그것이 명확하다면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과 길 가운데 채우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실 것이다. 나는 그런 주님을 신뢰함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면 된다.

하나님의 경영이 인간의 경영보다 뛰어납니다!

3_2묵상한 말씀 : 사무엘하 17:1~14
나에게 주신 말씀 :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14절)

압살롬에게는 아히도벨이라는 뛰어난 모략가(지략가)가 있었다. 그는 상황 판단이나 문제 해결 면에서 너무나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해 가야 하는지, 무엇이 우선적인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일만 이천 명의 정예부대를 준다면 바로 다윗을 추격하여 다윗만을 죽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모든 상황들이 다 정리되고 압살롬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아히도벨의 상황 판단은 너무나 정확한 것이었다. 구지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 단 한 방에 이 상황을 종료 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시간이 흘러갈수록 압살롬에게 유리할 것이 없기 때문에 무엇보다 빨리 다윗을 제거하는 것이 최선/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럴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라는 것이다. 다윗과 그 무리들이 가장 지치고 사기가 떨어져 있을 때 기습적으로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아히도벨은 정말 뛰어난 전략가이다. 그는 누구보다 탁월한 지혜와 많은 경험과 예리한 분석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압살롬은 이젠 그의 말대로 행하기만 하면 안정된 왕권을 세워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런 아히도벨의 지혜와 전략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미워하시고 싫어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고 생각해야 할 부분이 이것이다. 인간의 지혜와 경험, 분석이 악하다는 것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인간의 지혜와 경험, 분석들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 되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것인가?”이다.

또한 그 모든 상황들 가운데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시고 역사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와 경영대로만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선까지는 하나님이 허락하시지만, 하나님은 분명한 한계를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인간의 지혜와 경영들을 폐하시기로 결정하시면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분석과 경영이라 하더라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땅에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아히도벨의 계략을 폐하시기 위해서 압살롬과 후새를 사용하신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뛰어난 계략을 듣는다. 그것은 너무나 좋은 전략이기에 바로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압살롬은 후새도 불러 그의 계략을 들어보자고 제안한다. 후새는 압살롬에게 아히도벨이 말했던 계략과는 정반대의 말을 한다. 정예부대만 따로 뽑아서 추격할 것이 아니라 압살롬이 직접 모든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서 다윗과 그 무리들을 기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후새의 계략을 더 낫게 여긴다. 성경은 그 배후에 하나님이 일하시고 역사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번 중요한 진리를 배워야 한다. 그것은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전략, 분석이 있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나 마음에 합당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그것을 폐하시거나 물리치신다는 것이다. 더 어리석은 계획과 방법을 선택하도록 사람의 마음을 우둔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뜻과 일치하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것인가? 그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분석과 전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계획과 분석, 경영도 준비해야 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해야 할 것은 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결과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면 안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하나님의 경영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더 구하고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전략과 계획과 준비, 경영을 일치 시켜야 한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않으신다고 하면 멈추어야 한다. 인간의 경영은 하나님의 경영보다 뛰어나지 않다. 그 분이 불어 버리시면 우리의 모든 것을 먼지처럼 날아가 버릴 것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자. 구하자. 겸손히 우리의 계획과 분석, 경영들을 내려놓자.

주님을 계속해서 신뢰하기

trust묵상한 말씀 : 사무엘하 15:24~29
나에게 주신 말씀 :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25-26)

압살롬을 피해 예루살렘 성 밖으로 도망가는 다윗의 무리 앞에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나타난다. 사독을 비록해서 모든 제사장들이 법궤와 함께 다윗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당시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너무도 소중하고 중요한 물건이었다. 어쩌면 법궤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윗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압살롬에게로 넘어가는 백성들의 마음을 다시 되돌릴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거부한다. 그런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다윗은 참으로 멋있는, 그러면서 너무나 귀한 신앙 고백을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면 이대로 끝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지도 아니하시는데 법궤를 이용하면서까지 자신의 위치와 자리를 지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법궤는 그런 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윗 자신도 그런 방법으로 법궤를 이용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읫의 이런 고백과 무슬림들이 자주 말하는 ‘인살라'(신의 뜻대로 하소서)와 무엇이 다른가? 지금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윗도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이렇게 끝이 날지, 아니면 다시 돌아오게 될지 확신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 속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과 무슬림들이 ‘인살라’라고 말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분명한 차이를 몇 가지 생각해 본다면, 첫째 신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 쉬지 아니하시며 다윗의 삶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진리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시고 계신다. 둘째 하나님은 약속하신대로 일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반듯이 지키시는 분이시다. 약속과 행동을 따로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성품과 말과 행동이 서로 충돌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말씀하시는대로 역사 하시고 일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은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바램을 투사(projection)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운명론적인 사고와도 다른 것이다. 이미 정해져 있는 뜻을 따라 의미 없이 살아야 하는 인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해진 틀 속에서 기계처럼 반응하고 움직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분의 인도하심 가운데 역동적으로 반응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관계는 인격적이다. 이런 고난과 고통을 하나님이 예배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다윗의 불순종으로 일어난 사건들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겸손하게 반응하면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축복으로 바꾸시고, 그것을 통해서도 더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시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다윗은 눈에 보이는 법궤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삶 가운데 신실하게 일하시고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돌아오게 하실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해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다윗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정해 놓으시고 그런 삶을 살라고 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다윗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다윗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었다.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어느 때는 죄를 지어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을 끝까지 내려놓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인물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인 다윗이 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겪고 있는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고난과 고통 가운데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세워져 있지 않다면 헤쳐나갈 수 있는 힘도 없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분과의 관계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나의 삶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기억하도록 하자. 그것만이 진정함 힘이 되고 소망이 된다. 반대로 그것을 놓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다시 주님을 기억하자. 주님을 신뢰하자. 주님은 선하시고 신실하신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