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통치

pimg_749578114784531묵상한 말씀 : 사사기 21:16~25
나에게 주신 말씀 :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항하였더라” (25절)

계속해서 이어지는 인간적인 해결책… 베냐민의 남은 600명의 남자들을 위해 400명의 처녀들을 구해 주었지만(삿 21:1~15), 아직도 200명이나 되는 처녀가 부족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생각해낸 해결책은 매년 실로에서 벌어지는 여호와의 명절(축제) 때 춤추러 나오는 실로의 여자들을 납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처녀들의 부모나 형제들이 와서 항의를 하면 장로들이 직접 나서서 그 상황을 무마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서 말도 안되는 일들이 벌이고 있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여호와의 명절(축제) 기간에 춤추러 나오는 여자들까지 납치하자는 계획까지 세웠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스라엘 지파의 지도자인 장로들의 머리속에서 나온 제안이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당시 사사시대는 왕정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런 인간적인 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당시 이스라엘 지파의 통치자, 왕은 하나님이셨다. 사사는 필요에 따라 세워지는 재판관 정도의 역할을 한 것이다. 왕과 같이 절대적인 권력을 갖거나 왕위가 세습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진정한 지도자, 통치자,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였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는 자신의 생각대로 마음대로 결정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삶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지만 –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도 하지만 –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삶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여러 문제들과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뜻을 구하고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해결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적인 방법은 온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자기 나름대로 최선의 결정을 했다고 말할 순 있지만 또 다른 죄악을 낳게 되는 악순환의 연속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매일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나뿐만 아니라 가정과 교회, 이 민족과 열방 가운데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이심을 선포하고 그 분의 실제적인 통치를 받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삶에 가능한 이유는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이 우리 심령 안에 오셨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결단과 의지만으론 불가능하다. 하지만 성령님의 능력 안에 거할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통치가 임하게 되고 이루어지게 된다.

요즘 내 안에 있는 한 가기 소망은 주님의 몸된 공동체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것이다. 죄악으로 무너지고 깨진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회복과 치유, 구원의 은혜를 흘려 보내는 것이다. 더 이상 신학적인 개념으로 머리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임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Gods55묵상할 말씀 : 사사기 21:1~15
나에게 주신 말씀 :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 (6절)

계속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분노와 인간적인 판단으로 인해 저지른 잘못으로 생긴 문제를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며 원망을 한다. “왜 이런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게 되었습니까?”(3절). 하지만 그런 일들은 하나님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들을 계획하지도 원하시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행하였다. 자신들의 감정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선택한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심지어 하나님에게 돌린다.

그 결과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열두 지파 가운데 한 지파의 대가 끊어질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일이 벌어진 다음에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뉘우친다. 하지만 연이어 또 다른 실수를 범한다. 그것은 다시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번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야베스 길르앗 주민들을 죽이고, 그 가운데 처녀 400명만을 남겨둔다. 하지만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지파 남자들은 600명이었다. 그렇게 해도 200명이나 되는 여자가 부족한 상황인 것이다. 이렇게 인간적인 방법은 온전하지 못하다. 계속되는 악순환만 있을 뿐이다. 자신들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지만 그것은 또 다른 고통과 아픔만 만들어낼 뿐이다.

방법은 하나이다.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 분 앞에 나아가 주님의 방법과 주님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 문제가 인간의 잘못된 선택과 결정에서부터 나온 것임을 고백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음을 인정하고 잘못되어진 부분으로 다시 돌아가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회복과 치유가 있게 된다.

더불어 오늘 아침 나에게 주시는 말씀 중에 하나는, 어떤 일들이 있어도 공동체를 깨뜨리는 선택과 결정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를 포함해 우리는 너무 자주 공동체를 나누고 깨뜨리는 일들을 쉽게 선택하고 결정한다. 만약 나의 행동과 선택이 공동체를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면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것까지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점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지고 있는 환경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신앙 공동체 정신과 가치가 무엇인지 배울 기회조차 없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은 공동체를 세우신 것이었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열두 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이고, 신약에서는 주님의 피로 세운 성령의 공동체 – 교회인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 존재해야 하고,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부르심 중에 하나이다. 그것을 부정하게 되면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실현한다는 것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개인이 힘과 능력은 미비하다. 하지만 공동체로 존재할 때 시너가 발생하게 되고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을 갖게 된다. 더불어 이 세상 속에서 성도의 거룩함을 지켜 나가는 방법도 공동체 안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기억하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 나가자. 요즘 내 안에 공동체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복음자리교회가 진정한 공동체로 세워지길 소망한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 가길 기대한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한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해야한다. 인간의 어떤 지혜로운 방법도 하나님의 지혜를 뛰어넘을 수 없다.

아군 사역과 적군 사역

6묵상한 말씀 : 사사기 20:35~48

나에게 주신 말씀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백 명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이날에 베냐민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가 엎드러진 것이 모두 이만 오천 명이니 다 용사였더라” (35, 46절)

어느 교회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교회에는 사역이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아군 사역과 다른 하나는 적군 사역이라고 한다. 아군 사역은 말 그대로 교회 지체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을 의미하고, 적군 사역이란 불신자와 세상을 향한 사역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이 군 출신이라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의미 있는 분류라고 생각된다.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다른 지파와 전투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1차, 2차 전투에서 패한 이스라엘 지파 연합군은 마지막 3차 전투에서 새로운 전략으로 베냐민 지파를 전멸 시켜 버린다. 따로 복병을 숨겨놓고 그들 앞에서 패하는척 도망하다가, 숨어 있던 복병들이 기브아 성읍을 공격할 때 돌이켜서 베냐민 지파 군대를 협공했던 것이다.

그 전략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고, 그 결과로 베냐민 지파 장정 이만 오천 명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모두 용감하고 씩씩한 용사였다고 말씀하고 있다(all of them valiant fighters. niv). 그런데 더 정확하게 살펴본다면 베냐민 지파 사람들만 죽은 것이 아니다. 1차와 2차 전투에서 이스라엘 지파 연합군은 사 만명 정도가 죽었다. 성경은 그들 또한 칼을 빼는 자, 곧 용사들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세 번의 전투를 통해 육만 오천명의 용사들이(칼을 빼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죽은 것이다. 이것은 사실 엄청난 손실이다. 같은 동족끼리 분열되어 싸움을 벌이다가 육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한 가지 모순(irony) 된다고 느끼는 것은 주변에 있는 가나안 족속과 그렇게 싸우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끝까지 불순종하면서 같은 동족끼리 싸우다가 육만 오천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각 지파별로 기업을 분배해 주고 이젠 그 땅을 취하라고, 그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피를 흘리며 싸우기를 멈추어 버렸다. 그런 희생과 고통을 회피한 것이다. 그냥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그 땅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서두에서 소개한 것처럼 적군과의 싸움은 멈추고 아군과의 싸움만 치열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관계가 뒤집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교회 공동체) 용사로 부르셨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모두 용사들이다. 하나님의 용사들의 임무는 세상 속에 나아가서 적군과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인 것 같다. 나가지는 않고 집안에서 싸운다. 교회 공동체가 사분오열(四分五裂) 되어서 서로를 향해 칼을 뽑아 들고 있다. 세상 속에서 싸워야 하는 용사들이 부르심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대로 교회 공동체는 유람선이 아니라 항공모함과 같다. 항공모함은 임무를 부여받은 전투기들이 무기를 탑재하고 전투지로 출격하는 곳이다. 그리고 임무를 수행한 전투기들이 다시 돌아와서 재무장하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세상과는 동떨어져 있는, 우리들만의 세상 속에서 즐기고 다투는 유람선과 같아 보인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상관 없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만 만족하면 되고, 혹은 서로 나누어져서 싸우기에 정신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우리들의 부르심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용사들이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칼을 빼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칼을 빼야 한다. 세상 속으로 나아가서 영적 전투를 벌어야 하는 하나님의 용사들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다시 한번 내 사역과 교회의 사역 그리고 에너지가 어디에 많이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또한 복음자리교회를 하나씩 세워가야 하는데 어디에 초점을 둘 것인지를 명확하게 하자.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균형을 잘 맞추도록 하자. 제주시와 제주도의 변화를 위해 부르신 주님의 음성에 반응하고 순종하자.

진정한 순종은 하나님만을 간절히 찾는 것에서 시작된다!

656556묵상한 말씀 : 사사기 20:19~34

나에게 주신 말씀 :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26~27절)

베냐민과의 전투에서 연거푸 두 번이나 패한다. 심지어 두 번째는 하나님께 베냐민 지파와 계속해서 싸워야 하는지도 물었고, 하나님의 응답도 받았는데 패하고 말았다(23절).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할까? 첫 번째는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 결정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그런데도 전투에 패한 것이다. 하남니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음에도 실패한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을까?

그것에 대한 힌트는 세 번째 전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속으로 두 번이나 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그런데 두 번째와는 다른 자세와 모습이 보인다. 26절을 보면 울면서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면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번제는 온전한 헌신을 의미하는 제사이고, 화목제는 말 그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또한 그들은 벧엘로 올라갔다. 벧엘은 어디인가? 야곱이 하나님의 비전이 담긴 꿈을 꾼 후에 베개로 삼던 돌에 기름을 부어서 그곳에 하나님의 집에 세워질 것이라고 고백했던 곳이다.

두 번의 실패, 두 번의 패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간절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 마음의 상태가 가난하게 된 것이다. 온전히 하나님의 얼굴만 구하게된 것이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 금식을 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것이다.

그렇다면 서두에서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베냐민 지파와의 전투는 하나님의 허락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변함이 없고 명확하다. 하지만 두 번째 전투를 위해 하나님께 물었을 때와 세 번째 전투를 위해 하나님께 물었을 때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 상태, 영적 상태가 전혀 달라졌다는 것이다. 첫 번의 실패 후에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절하지는 않았다. 그냥 이 전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만 한 것이다.

하지만 세 번째 전투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는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벧엘로 올라갔고 거기에서 울며 금식하며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깨어지고 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엇보다 먼저 회복하길 원했던 것이다. 두 번의 패배를 통해 자신의 영적 상태와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종한다는 것은 기계적인 관계가 아니다. 수학 문제 풀듯이 딱딱 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관계와 순종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마음을 원하신다. 그 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 자녀들이 그 분의 얼굴을 구하며 그 분 앞에 나아오기를 기다리신다.

하지만 나는 문제를 가지고, 어떤 상황들과 환경들, 고충과 고민들, 어려운 현실들을 가지고 나아간다. 그리고 묻는다.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그 분과의 관계는 어떤지 돌아보지도 않고 질문만 던진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점검도 하지 않는다. 그냥 기계적으로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려고 한다. 그러면 현실에서 무엇인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분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서 배우고 경험했다. 20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니 벌써 23년이 되었다. 그리고 예수전도단 간사로도 사역을 했다.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 분의 말씀하심을 경험했는지 모른다. 약속으로 주신 말씀도 너무도 많다. 너무도 많아서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많다. 그런 가운데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나의 삶을 보게 하신다. 내 안에 그 분의 음성을 듣기 위한 간절함이 있는가? 주님만을 구하고 엎드리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순종이 제사보다 낫지만 마음이 없는 순종, 종교적인 순종으로 반응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다시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는 시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것이 가장 우선 되어야 한다. 그렇게 나아오라고 주님은 나를 초청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