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 사랑, 은혜, 경외

8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으시다. 9 두고두고 꾸짖지 않으시며, 노를 끝없이 품지 않으신다. 10 우리 죄를, 지은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 잘못을, 저지른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 11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랑도 크시다. 12 동이 서에서부터 먼 것처럼, 우리의 반역을 우리에게서 멀리 치우시며 (시103:8-12, 새번역)

시편 103편은 죄인을 향한 한없고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한다. 이 사랑에는 차별도 구별도 없다. 모든 인간을 향한 사랑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사랑을 누리고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11절을 보면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fear)’하는 사람에게 그 사랑이 적용되고 경험된다는 것이다.

그럼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죄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 하나님의 의와 정의(심판), 하나님의 거룩을 발견하고 그 앞에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처절하게 깨닫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상태에서 자신의 노력으론 벗어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팔복에서는 이런 상태를 ‘가난한 심령’(마 5:3)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곧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의 놀랍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 부어진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 죄 가운데 있던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함 가운데 옮겨지게 된다(시편은 이것을 서쪽에 있던 사람을 동쪽으로 옮겨 놓았다고 표현한다, 시 103:12). 또한 하나님의 용서와 질병에서의 고침을(103:3), 하나님의 구속과 그 분의 사랑과 자비로 관을 씌우시는 은혜를(103:4), 좋은 것으로 채우시고 독수리와 같이 새롭게 하심을(103:5)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기초는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이다. 그리고 거룩과 사랑이 함께 역사할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benefits)라고 부른다. 거룩이 없는 사랑은 방종이지 은혜가 아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는 거룩은 엄격함이지 은혜가 아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기초가 되는 두 가지 성품(거룩과 사랑)이 함께 일하는 것이다. 7절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가 갈 길(his ways)을 알려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분이 행하신 일들(his deeds)을 보여주셨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길들(성품)을 알리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은혜들)을 보이셨다. 은혜를 누리는 것도 너무나 소중하다. 하지만 그 은혜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을 아는 것이 더 소중하다. 성경은 그 은혜를 아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볼뿐 아니라 그분의 성품도 알게 되는가?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다.

시 100편을 다른 시각으로 묵상하기

1 온 땅이여, 여호와께 기뻐 외치라, 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고 노래하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라. 3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줄 알라. 그분이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백성들이고 그 목장의 양들이다. 4 감사하면서 그 문으로 들어가고 찬양하면서 그 뜰로 들어가라. 그분께 감사하고 그 이름을 찬양하라. 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주의 진리가 온 세대에 걸쳐 지속될 것이다.

시편 100편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라고 말씀하신다. 특히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이 기쁨이다. 그렇다면 시편이 강조하는 기쁨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그냥 기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긍정의 힘이 아니다). 시편 100편은 기쁨의 근원을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5절을 보면 여호와의 선하심(good)과 인자하심(love), 성실하심(faithfulness)을 언급하고 있다. 둘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철저하게 언약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고(he who made us),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고, 그 분의 목장의 양들이다(we are his people, the sheep of his pasture).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고, 좋아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우리를 향해서 항상 성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을 확신할 때 기뻐할 수 있다(하나님의 성품). 또한 성실한 목자로서 양들을 돌보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경험하고 누릴 때 기뻐할 수 있다(햐나님의 일하심과 흔들림 없는 견고한 관계). 그렇다! 시편이 말씀하시는 기쁨은 철저하게 관계적인 것이며, 관계를 통해서 경험되는 감정이며,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는 성품이다. 웃음 치료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그냥 웃어라, 그냥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어떤 일들을 행하고 계시며, 그 분과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기뻐할 수 있을 때 감사가 가능하다. 왜냐하면 감사란 상대방의 호의가 전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나에게 베푼 호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감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 하려면 먼저 그 대상에 대한 기쁨이 있어야 한다. 기쁨이 없는 감사는 진정한 감사일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감사는 찬양으로 연결된다. 찬양도 감사와 비슷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할 때 전제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이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행하셨기 때문에 그 행하심을 기억하며 그 분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사와 찬양은 동의어이다. 감사하는 자가 찬양하게 되고, 찬양하는 자가 감사하게 된다.

정리하면 하나님의 성품과 그 분의 일하심과 그 분과의 관계(창조주-백성, 목자-양)을 알고 누리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적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 분과의 관계 안에서 그 분을 기뻐하는 것이며, 그 기쁨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께 합당한 찬양을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목사를 따르는 양의 본분이고 삶의 태도이고 반응이다.

P.S)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쁨을 자주 상실하는가? 왜 기뻐하지 못하는가? 기뻐하는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평안’(평강, 평화, peace)이다. 평안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한 가지로 풀어서 설명한다면, 하나님 안에서 잠잠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 평안을 깨는 가장 치명적인 적이 두려움(염려와 걱정, 불안)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요한복음 20장 19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다. 또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도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이다(21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평화가 깨어지고, 평화가 깨어진 상태에선 기뻐할 수 없으며, 기뻐하지 못하면 감사와 찬양은 불가능하다.

[말씀묵상] 시편 96편

오늘은 시편 96편을 묵상했습니다. 시편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그 분에게 합당한 영광과 노래, 경배, 찬양을 돌리라고 말합니다(1~9절). 특히 96편에서는 열방 가운데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The LORD reigns, 10절)라고 선포하며, 그 여호와가 오셔서(he comes) 이 땅을 심판하신다(he comes to judge the earth)고 선언합니다(10절). 그리고 그 심판은 의로우며(righteousness), 그 분의 진리(his faithfulness)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13절).

여기서 사용 되는 단어들과 표현들은 신약으로 넘어가면 예수님과 초대교회(특히 사도 바울)가 선포한 복음의 핵심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복음은 구약의 이야기와 신앙, 신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의 복음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골고다 언덕으로 직행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중간에 많은 구약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본질과 구원 행위(일하심)와 신앙 고백과 신학들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에서 그대로 물려받아 하나님의 왕국(나라, 통치, 다스림)과 제자도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구원, 성령의 오심과 교회의 탄생과 복음 전파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우리는 같은 복음(구원의 이야기)과 같은 신앙과 같은 신학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을 함께 공유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구약의 성도들은 다스리고 계시고 심판하시기 위해 오실 여호와를 기다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시기 위해 이미 오셨고(예수님의 초림), 다시 오실 것(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는 차이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동안 전한 복음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 성도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복음의 한 부분만을 전부인 것처럼 강조 했으며, 하나님의 왕국(통치, 다스림)을 그저 죽어서 가는 천당으로만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 성도들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의 왕국(통치, 다스림)은 미래적인 측면 보다는 (상대적으로) 현재적인 측면이 더 강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지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며,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 모든 것을 (지금, 현재)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론 심판하시기 위해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을 온 삶과 몸으로 직접 성취하셨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을 새롭게 하셨으며,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물려 받으셔서 모든 만물의 주님(주인, 왕)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것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 안에서, 이 땅의 모든 열방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다”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왕이신 주님을 기뻐하고 찬양하고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죽어서 가는 천국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온 삶을 통해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드러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왕(King), 열방(Nations), 예배(Worship)

묵상한 말씀 : 시편 47:1~9
나에게 주시는 말씀 :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시니 찬양의 시로 노래하라.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들을 통치하신다.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옥좌에 앉으셨다.” (6~8절)

1. 시편 47편은 1~5절 그리고 6~9절로 나눌 수 있다. 1~5절은 열방을 이스라엘 민족의 발 아래에 복종케 하시는 분임을 고백하고 있다. 6~9절은 하나님은 열방의 왕이심을 고백하며 그에 합당한 찬양을 돌린다. 그리고 47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왕이신 하나님’이다.

2. 저자는 먼저 하나님이 온 땅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왕이심을 고백하며 그 분을 향해서 손뼉을 치고 승리의 소리를 외치라고 말한다(1~2절). 또한 환호 소리와 나팔 소리 가운데 하나님이 보좌에 오르신다고 고백한다(5절). 그런 후에 하나님은 이방 나라들을 복종 시키셔서 이스라엘 민족의 발 아래에 두시며(3절), 그들에게 유산(땅)을 선택해 주시고 그것이 야곱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하신다(4절).

3.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이집트와 가나안 입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셔서 출이집트 과정과 가나안 입성 가운데 놀라운 능력과 역사를 베푸셔서 가나안 땅을 그들의 유산으로 주셨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만을 사랑하시고 특별하게 여기셔서 그들을 통해 이방 나라들을 정복케 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4.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들과의 특별한 관계 안에서 왕이 되시길 원하셨으며, 그들의 순종을 통해서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원하시며, 온 열방이 왕되심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하고 경배하길 원하신다. 6절 이하가 그것을 명백하게 고백하고 있다. 6절 이하를 연결해서 살펴보자.

5. 시편 저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왕이심을 고백하고 있다(6, 7절). 그런데 그 왕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왕이라고 고백하지 않고 온 땅의 왕이심을 고백한다(7절). 8절은 이것을 확장한다. 왕이신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을 통치하시며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다. 그때 온 열방의 지도자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온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한다(9절).

6. 구약은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그들만을 축복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열방의 하나님이시다. 열방을 통치하시는 왕이시며, 그들을 통해 예배와 경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온 열방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신 목적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만이 왕이심을 드러나고, 그것을 통해 온 열방 안에서 합당한 경배를 받으시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7. 그렇다면 구약이나 신약은 같은 패턴과 주제를 갖는다.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이다. 구약이 ‘하나님 – 이스라엘 민족 – 열방’이라는 도식이라면,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 – 교회 – 열방’이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셔서 온 열방에 하나님의 왕국(통치)을 이루어 가시기 원하셨다. 신약에서는 교회를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온 열방에 복음(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시길 원하셨다.

8. 그것의 최종적인 결과는, 하나님이 온 열방 가운데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다. 성경은 계속해서 이것이 최종적인 회복의 결과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요한계시록을 보라. 구원의 최종적인 그림은 온 열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합당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고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이자 뜻이다.

9. 적용 질문
하나님의 왕국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왕국 개념으로 구약을 읽어낼 수 있는가? 이스라엘의 부르심과 교회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그 부르심의 최종 목적이 예배라는 것에 동의하는가?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가 이스라엘 민족이 저질렀던 실수를 똑같이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회가 하나님의 왕국이 아닌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