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 부음 :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 예수님을 격려함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4:1~11

  1. 예루살렘에 있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체포해서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지만 유월절과 무교절이 바로 코 앞에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 소동이 일어날 수 있으니 명절에는 피하자는 자신들만의 계획을 세워 두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대로 예수님은 유월절 명절에 맞추어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세운다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지와 뜻과 계획이 있으시다. 그 뜻대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여 가신다. 이런 배경을 깔아놓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기름부음에 대한 것이다.
  2. 예수님과 그 일행들은 베다니 마음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이라는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다. 그때 갑자기 한 여인이 등장해서 값비싼 순수한 나드 향유가 든 옥합 하나를 가져와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여기서 ‘나드’란 인도산 방향 식물에서 채취한 기름을 의미하는데 매우 고가의 제품이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화를 내며 수군거렸다. 이런 여인의 행동이 값비싼 향유를 낭비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중에 어떤 사람은 차라리 그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고 그 여인을 심하게 책망하기도 했다.
  3. 어쩌면 이것이 예수님의 평소 생활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최대한 검소하게 지내고, 남은 것을 통해서 당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돌보는 일(구제하는 일)에 힘썼던 삶을 사셨을지도 모른다. 제자들이 여인의 행동에 대해서 심하게 나무란 것도 평소 예수님의 소신이나 생활 방식이 그러했기 때문에 이번 일도 당연히 그렇게 판단하실 것이라고 확신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여인을 두둔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그들 곁에 있으니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도울 수 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이 때문이다. 이 여인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 확인할 순 없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셨다.
  4. 사실 아무도 곧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예고 하셨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조차도 곧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무지 했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신에게 있는 가장 값비싼 향유(기름)을 아낌없이 부어 드렸다. 상황적으로 보면 알고 한 행동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냥 예수님을 통해 받은 은혜와 사랑에 감격해서 자신의 것을 온전히 드리는 헌신의 행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에 다른 의미, 더 놀라운 의미를 부여하신다. 여기서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메시아로서의 사명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셨고 이제 곧 그 메시아로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내어줄 것이다. 아무도 그 사실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지만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그 걸음을 멈추지 않으실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여인의 기름 부음은 예수님에게 깊은 격려와 확인이 되었을 것이다.
  5. 그래서 예수님은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한 일도 전해져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마다 이 여인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축복하신다. 곧 일어날 십자가의 사건을 위해 가장 값진 헌신을 했고, 거의 유일한 헌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가룟 유다의 이야기는 자신의 스승을 배반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 넘기려는 내용이다. 이런 정황들을 살펴보면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해서 왜 예수님이 그토록 기뻐하시고 큰 의미를 부여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지금 홀로 외로운 길을 걸어가시고 계신다. 3년이 넘게 함께 동고동락 했던 제자들마저도 관심이 없는 그 길을 혼자 쓸쓸하게 걸어가고 있고, 곧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한 여인이 기름을 부어드림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고 예수님을 축복한 것이다.
  6. 이것이 앞에서 살펴본 마음과 뜻과 힘과 생명을 다해서 하나님(예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연결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온전히 다 이해하고 준비할 순 없다. 하지만 예수님을 향한 거룩한 사랑으로 드린 헌신과 순종과 행동, 재물, 시간, 삶을 주님은 귀하게 소중하게 여기신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귀하지도 비싸지도 않은 것이지만(물론 인간 입장에서 다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셔서 감격해 하시고 기뻐하시고 놀라워 하신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다. 그 분을 향한 사랑으로 행한 것들을 너무도 소중하게 여기시며 값진 의미를 부여해 주신다. 지금도 동일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 가신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이다.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을 경외함으로 드리는 헌신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은 놀라운 일들을 성취해 가실 것이다.

종말론적 비전을 회복하라!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9:2~13

  1.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처음 언급하신 후에 제자도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6일이 지났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입으신 옷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더 이상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고 광채가 났다. 한 마디로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셨다는 말이다. 그때 구약을 대표하는 두 인물, 율법을 대하는 자로 모세가 선지자를 대표하는 자로 엘리야가 예수님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여기서 살짝 궁금한 것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하는 것이다).
  2. 이 광경을 지켜보던 베드로가 너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초막 셋을(하나는 주를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짓고 계속 머물러 있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자 구름이 그들 위를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으라!” 이 목소리와 함께 신비롭고 황홀한 체험은 끝이 난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그 자리에 예수님만 계셨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은 누구인가”이다. 마가복음은 계속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약을 완성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임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는 다시 한번 제자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약이 약속한 메시아라면 그 분을 따르는 제자들은 그 분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이런 놀라운 체험이 끝나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예수님은 다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것이 성취될 때까지 방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당부하신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중에서 이해하기 제일 어려운 부분은 ‘부활’이었다. 이것은 제자들이 ‘부활’ 자체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방금 그들은 오래 전에 죽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살아 있다는 것과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직접 목도했다. 그러니 부활 자체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당시 사두개인과 같은 사람들은 부할을 믿지 않았지만, 바리새인을 비록해서 많은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서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었다. 제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메시아가 죽은 다음에 다시 부활한다는 개념이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이기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었다.
  4. 또한 제자들은 말라기 4:5을 통해 약속된 내용을 언급한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낸다고 했는데 이것은 어찌된 것인지를 묻는다. 왜냐하면 방금 자신 앞에 나타난 엘리야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질문에 답을 하신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가르침은 틀리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엘리야가 왔다는 것이다. 이는 세례자 요한을 의미한다. 이어서 예수님은 인자(메시아)와 앞서 오는 엘리야의 공통점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것은 고통(고난)과 죽음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엘리야(세례자 요한)을 보냈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그를 죽였다. 동일하게 인자(다니엘서에 약속된 메시아)를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인자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 힘든 부분이 이것이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회복과 도래만을 기대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신다.
  5. 당시 제자들은 상당히 혼동스러웠을 것이다. 방금 자신들의 눈 앞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는데, 그렇다면 말라기의 약속처럼 엘리야가 다시 온 것이 아닌가? 그리고 왜 예수님은 계속해서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인가? 그들이 그동안 배운 성경 지식과 너무도 대치되고 충돌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제자들이 본 환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장면일 뿐이다. 예수님은 구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셨다. 이제 곧 그것을 이루실 것이다. 더 나아가 엘리야 – 세례자 요한이 와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함으로서 종말이 시작되었다. 그 종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미 심판은 시작되었고 구원은 성취되었다. 사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왕국이 무엇이고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 제자들은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어떤 일들을 행하시는지 알지 못한다.
  6. 어쩔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다 이해할 순 없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해와 불신앙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신다.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경험한 후에야 하나님 왕국의 관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종말론적 비전을 알게 된다. 안타가운 것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도 제자들과 비슷하게 여전히 무지하고 무관심한 것 같다. 성경적인 종말론과 그 비전을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그래야 바른 제자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래야 하나님 왕국 백성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도 여전히 제한된 관점으로 성경을 읽고 있고 구원과 하나님의 왕국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시는 일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의 제자도는 뒤틀어져 있고 하나님 왕국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게 되었다. 다시 성경을 통해 종말론적 비전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 사건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과 제자도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8:27~9:1

  1.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으로 가신다. 그리고 그 지역 여러 마음을 돌아다니신 후에 길에 앉으셔서 질문을 던지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동안의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 안에 퍼진 소문들과 평가들에 대해서 물으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사람들이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한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혹은 여러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신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제자들의 생각을 물으신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란 메시아 곧 그들이 그도록 기다리던 구원자를 의미한다.
  2.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런 대답을 들으신 후에 지금까지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으신 이야기(비밀)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바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받아 죽임당했다가 3일 만에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정체에 대해선 계속해서 함구할 것을 요구하셨지만 자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하고 다시 부활할 것인지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하시는 것이다. 아마 이런 예수님은 당황스러운 가르침이 제자들에게 굉장한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자 다시 베드로가 나선다. 원어적으로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박도 만만치 않다. 방금까지 신앙 고백을 하면 따뜻했던 상황은 사라지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갑분싸!’가 되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3.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어쩌면 마가복음을 통해서 소개되고 있는 이상한 예수님의 언행에 대해서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빛과 어둠이 명확하게 갈리게 된다. 누가 빛 가운데 있는지, 누가 어둠 가운데 있는지가 명확해진다. 예수님은 진리로 오셨다. 그래서 누가 진리를 따르는지, 누가 진리를 따르지 않는지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정확하게 구분된다. 지금 하나님이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시는지,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며 성취하시는지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는 자이다. 반대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는 사람의 일을 추구하는 자이다. 그가 아무리 종교적인 행위를 많이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거나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4.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신다. 그것을 우리는 제자도(discipleship)라고 부른다. 그럼 제자도의 핵심은 무엇인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어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자기 생명을 무엇과 맞바꾸겠느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일, 사람의 생각, 사람의 계획과 판단을 부인하고 버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일을 따를 수 없다. 거기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 존재한다. 이 역설은 뒤에 나오는 하나님의 왕국(나라)와 연결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이 땅에 역설로 임하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5. 마가복음은 제자도를 하나님의 왕국(나라)와 연결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제자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바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 가운데 죽기 전에 하나님 왕국(나라)가 능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이 있다.” 이것에 대한 해석은 여러 의견이 있다. 바로 뒤에 이어질 변화산 사건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는 사건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오순절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확산되는 사건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것이 맞고 틀리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사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이다. 이후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을 것과 아버지께 돌아갈 것을 계속해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후의 모든 사건을 말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6.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 왕국이 능력으로 임할 것이라는 것이다. 근데 그 왕국은 뒤집어진, 역설로 존재하는 왕국이다. 하나님의 왕국 자체가 역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 왕국의 원리와 존재 방식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을 입고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 왕국과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왕국의 백성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자는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왕국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이다. 그렇게 버릴 때 다시 얻을 수 있다. 버리지 않고 움켜쥐는 사람은 이 세상에선 부와 성공과 명예를 얻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 왕국에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삶은 부인하고 버리는 삶이다. 어리석게 보이고 미련하게 보이지만 영원한 것,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다.
  7.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제자의 삶은 이 세대의 가치와 정신, 유행을 따르지 않는 삶이다.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세대 사람들은 하나님 왕국의 가치와 진리, 삶의 방식들에 대해서 어리석다고 말하며 부끄러워할 것이다. 특히 절대자 신이란 존재가 가장 연약하고 무능력하게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정말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가 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는 방식이고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는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그런 삶의 선택들 때문에 조롱과 멸시와 핍박을 받는다해도 제자는 그런 삶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반전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하나님 왕국의 가치를 부끄럽게 여긴 사람은 하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이 말은 반대의 상황도 일어난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복음 때무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사람들은 하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명예와 칭찬과 인정, 격려와 지지를 받을 것이다.
  8. 정리하자. 예수님은 두 가지 십자가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제자들의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과 구속의 십자가이다. 하나님이 창세 때부터 세우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한 십자가이다. 제자들의 십자가를 전혀 다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their cross)라고 부르신다. 이 십자가는 대속과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우리들의(제자들의) 십자가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져야 하는 삶의 방식(하나님 왕국의 가치와 원리, 라이프 스타일)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제자도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제자도는 자신을 부인함으로 시작된다.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사람의 일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지만 여전히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죄송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사탄이라고 부른다. 진짜 제자는 자신을 온전히 부인하고 예수님 안에 이루신 그리고 이루어 가시는 구원의 역사를 위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자이다.

부활의 복음, 우리가 전할 복음

묵상한 말씀 : 고린도전서 15:1~11
나에게 주시는 말씀 :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우리가 이렇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었습니다.” (11절)

1. 요약

사도 바울은 은사에 이어 고린도 교회에게 전한 복음을 다시 되새기려고 한다. 그 복음은 성경대로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셨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며, 부활하신 후에 여러 사람에게와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 자신에게도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복음을 받은 사도 바울은 열심히 그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듣게 되었다.

2. 깨달은 것

가. 15장부터는 주제가 전환된다. 12-13-14장에서 은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이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전한 복음을 다시 전하려고 한다(1절). 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다시 되새기려고 하는가? 그 이유는 12절 이하에서 살펴볼 것이다. 오늘은 11절까지만 살펴보자.

나. 먼저 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현재 상황을 설명한다.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이 고린도 지역에 전해졌고(I preached to you), 고린도 교회는 그 복음을 받아서(you received), 그 위에 서 있다(you have taken you stand). 이것이 지금 고린도 교회의 영적인 상황이고 현 주소이다. 그들은 이미 복음을 들었고, 그 복음을 받았고(믿었다?), 그 위에 서 있다. 12절 이하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서두에서 이것을 언급한 것은 중요한 의도가 있다. 그들의 신앙과 삶은 복음 위에 서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 2절을 보면, 구원의 조건(?)을 두 가지 제시한다. 첫째는 사도 바울을 통해 전해 받은 말씀(복음)을 굳게 잡아야 한다(hold fimly to the word I preached to you). 둘째는 헛되이 믿지 않아야 한다(you have believed in vain). 여기서 ‘헛되이’ 믿는다는 것은 ‘이유, 목적, 까닭 없이’ 믿는 것을 말한다. 믿는 이유, 목적, 의미가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굳게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왜 서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까? 뒤집어 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흔들리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복음에 대해서 흔들리고 잇었다는 것이다.

라. 3절부터는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first importance), 고린도 교회에게 전했던 복음을 다시 설명한다. 그 복음의 내용은 두 가지이다. 먼저는 성경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다(that Christ died for our sins according to the Scriptures). 이것은 대속적인(구속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마. 그 다음 4절에서는 동일하게 성경의 말씀대로 3일째 되던 날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that he was raised on the third day according to the Scriptures). 그리고 5절 이하에서는 그 분의 부활의 목격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열두 제자에게, 500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동시에, 야고보에게,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시고, 마지막으론 자격이 전혀 되지 않는 자신에게도 나타나셨다고 밝힌다(5~8절). 연이어 과거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밝힌다(9절). 사실 사도라고 불리기도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격렬하게 핍박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사도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결과이다. 지금은 복음을 위해서 누구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 고생하고 있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10절).

바.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결과는 무엇인가? 사도 바울 자신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복음 전파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복음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11절). 이렇게 사도 바울이 복음 중에서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 안에 부활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12절 이하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복음이 무엇이며, 그 복음이 어떻게 그들에게까지 전해졌는지를 다시 상기시킨다(그들이 어떻게 복음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 복음 안에 굳건하게 서 있을 것을 권면한다. 헛된 믿음이 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3. 질문

가. 십자가의 죽음이 더 강조되어야 하는가? 부활이 더 강조되어야 하는가? 얼마 전에 한국 교회 안에 부활을 강조하는 목사의 이단성 조사와 함께 논란이 있었다. 어쩌면 과거 한국 교회는 십자가의 죽음만을 강조한 것 같다. 부활은 그냥 팩트라는 사실만 강조한 것 같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5장 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은 부활을 계속해서 강조한다(물론 고린도 교회의 특수한 상황이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3일만에 다시 부활하셨다. 그런 다음 여러 많은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보이셨고 교회를 열심으로 핍박하던 사도 바울에게도 나타나셨다. 그 결과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사는 것이다. 사도 바울 자신의 삶이 그러하다. 9, 10절에서 자신의 간증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핵심은 반대하고 핍박하던 사람,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복음을 전하셨고, 그 전해 받은 복음을 전하는 자가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나. 이렇게 본다면 사도 바울은 십자가도 강조하지만 부활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을 강조하고, 그 만남의 결과로 복음 전파의 삶을 살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고린도 교회가 받은 복음의 핵심이 부활에 있다는 것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위에 서 있어야 하고, 그 복음을 굳게 붙잡고 있어야 하며, 의미 없이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4. 적용

복음과 은혜는 부르심과 헌신을 낳으며, 그 부르심과 헌신의 삶은 곧 복음 전파의 삶이다. 사도 바울은 그 삶을 멈추지 않았다. 부르심 받은대로 살았다. 그렇다면 복음을 믿고 예수님을 만났다고 고백하는 나는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 복음 전파의 삶을 살고 있는가? 최근에 누구에게 복음을 전해 보았는가? 내가 전한 복음을 구원 받은 영혼이 있는가?

5. 기도

부활을 사실로 믿기만 하는 것을 넘어 부활을 누리고, 그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진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고 지금도 그 분과 동행하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