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자녀답게 자유를 누리라

묵상한 말씀 : 갈라디아서 4:21~31

1. 바울은 율법으로 사는 삶과 복음으로 사는 삶을 비교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비유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는 여종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이고, 둘째는 부인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 이삭이다. 둘 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커다란 차이점도 있다. 하갈을 통해 얻은 아들 이스마엘은 육신의 자녀이고, 사라를 통해 낳은 아들 이삭은 약속의 자녀라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의 방법으로 얻은 아들이고,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얻은 아들이라는 것이다.

2. 바울은 이것을 상징이라고 말한다. 두 여인과 두 아들은 두 가지 언약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종의 아들이고 육신으로 얻은 아들로서 율법을 상징하고, 사라와 이삭은 자유인의 아들이고 약속의 아들로서 복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길 중의 하나를 가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을 따라 종의 자녀로 살 것인지, 복음을 따라 자유인의 자녀로서 살 것인지, 또한 육신을 따라 살 것인지, 약속(성령)을 따라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처음에는 육신을 따라 종의 자녀로 살 수 밖에 없다. 마치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육신의 방법으로 자녀를 얻으려고 함으로 이스마엘을 낳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얻은 다음에는 두 아들이 한 집에 공존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육신의 자녀가 약속의 자녀를 핍박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육신의 자녀를 집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이 공존할 수 없고, 종과 자유가 함께 거할 수 없으며, 육신을 따라 사는 삶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한 몸 안에 함께 할 수 없다.

4. 약속의 길과 육신의 길은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이다. 종의 자녀로 사는 삶과 자유인의 자녀로 사는 삶도 그러하다. 하루 중에 반은 종의 자녀로 살고, 나머지 반은 자유인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완전히 종의 자녀로만 살든지, 아니면 완전히 자유인의 자녀로만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좋은 소식)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의 자녀이었던 자가 자유인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의 지배 아래 있던 자가 은혜의 지배, 성령의 지배 아래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5.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종의 자녀로 살아갈 필요가 없다. 육신을 따라 살아서도 안 된다. 그런 삶에서 우리는 완전히 해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케 되었고 해방되었으며 새롭게 되었다. 새로운 신분이 주어졌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오직 그 길로만 가면 된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되고, 돌아가서도 안 된다.

6.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유인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자들이 있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아니다. 복음의 핵심은 자유다. 더 이상 종의 자녀가 아니다. 우리는 본처의 자녀로서 자유롭게 되었다. 다시 말한다. 복음의 핵심은 자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어떤 것도 우리를 얽매이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救贖)을 받은 자들이다. 죄와 율법의 구속([拘束)을 받은 자들이 아니다.

7. 그렇다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 그것은 바로 자유를 누리는 삶이다. 사실 이 점에 대해선 할 말이 많고, 하고싶은 말이 많다. 한국 교회가 복음을 강조하고 복음을 선포했지만(물론 그 복음도 반쪽짜리 복음이긴 하지만) 그 복음으로 인한 자유에 대해선 대단히 무지하다. 오히려 신앙생활은 매우 율법적이고 유교적이다. 죄의 종들을 복음을 자유케 하여 교회의 종으로 다시 전락 시키는 일들을 하고 있다. 아니다! 복음의 핵심은 자유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만이

묵상한 말씀 : 갈라디아서 3:1~9

1. 다른 복음에 너무나 쉽게 빠진 이들을 보면서 바울은 개탄을 한다. 그들의 이런 행위들이 큰 아픔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두 가지의 명백한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이다. 둘째는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건이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후자의 사건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도 너무나 중요하지만,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건도 중요하고 확실하며 명백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2. 그런 차원에서 1~9절의 강조점은 믿음이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예로 설명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동일하게 (이방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동시에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을 함께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3. 재미 있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렇게 믿음에 대해서 강조하기 위해서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은 2절에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라고 말을 시작하며 질문들을 던진다. “여러분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5절에서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기 때문입니까?”

4.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성령 받음’은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일까? 흔히들 알고 있는 회심 이후에 2차적으로 일어난다는 ‘성령 세례’를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다시 읽어보면 그런 구조를 발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성령 받음’은 중생이나 회심의 사건과 별개로 존재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또한 몇 사람들만이 특별하게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사건으로 언급하고 있지도 않다. 복음을 듣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2, 5절).

5. 우리가 알고 있는 2차적인 사건으로서의 ‘성령 세례’가 많이 왜곡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성령을 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성령 세례’만의 문제가 아니다. ‘성령의 은사’나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통해 받는 것으로, 인간의 특별한 노력과 열심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성도가 경험하는 ‘성령 받음’이나 ‘능력 행함’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6. 바울은 이것을 확증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언급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것이 하나님께 의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으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을 동일하게 의롭다고 선포하시고 복을 주실 것이다. 이것도 어떤 종교적인 노력이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7.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믿음은 인간의 행위 자체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통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는데, 갈라디아서나 로마서 등에서 강조하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인간의 구원에 관계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당연히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순종을 강조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예를 든다면 율법의 행위라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거부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이루거나 얻으려고 하는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이다.

8. 거기에 성령의 역사도 포함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그렇고, 성령을 받는 사건도 그렇고, 이바르함의 자손이 되어 그에게 허락된 복을 누리는 것도 그렇고, 모두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인간의 행위 자체를 부정하거나 부인하지 않는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무엇인가를 더 첨가하려고 하는 모든 인간의 시도와 노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복음이고, 교회 공동체가 늘 경계해야 하는 거짓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것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순종의 제사

묵상한 말씀 : 히브리서 10:1~10

1. 히븨리서 저자는 율법의 한계를 명확히 말한다. 율법은 앞으로 다가올 것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실체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율법은 그 실체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마다(때마다) 끊이지 않고 똑같은 방식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제사에 참여하는 자들을 결코 온전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율법으로 온전해질 수 있다면 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리겠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율법으로는(정확히 말하면 율법이 제시하는 제사 방법으로는) 단번에 정결하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문제를 ’기억’으로 설명한다. 해마다 대속죄일에 드리는 대제사장의 제사 – 모든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 제물의 피를 뿌리는 행위 자체가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며, 그것을 통해 다시 죄를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다. 결론은 황소나 염소의 피가 죄를 온전하게(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한적이다.

2.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시편 40:6~8을 인용한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다윗의 고백일뿐 아니라 예수님의 직접적인 고백이며 결단이다. 그 내용은 두 가지이다. (1) 하나님은 동물의 제사 – 그것이 번제이든 속죄제이든 – 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2) 그렇기 때문에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직접 오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에 정해진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한 가지를 명확하게 정리해야 한다. 하나님이 뜻은 ‘순종’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죄는 불순종이다. 불순종은 단지 무엇을 행하였느냐 행하지 않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멀어졌기 때문에 불순종하게 되었다.

3. 그러므로 시편 40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강조하는 포인트는 바로 ‘순종’이다. 하나님이 제물과 헌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도 않으시고 기뻐하지도 않으신다. 대신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그 분의 뜻을 행하는 것,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불완전한 첫 번째 것을 폐기하고, 완전한 두 번째 것을 세우시기 위해 오셨다. 그것을 성취하고 완성하시기 위해서 친히 육체로 오셔서 자기의 몸을 드리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거룩이란 어떤 상태만을 말하는 형용사가 아니다. 거룩이란 순종을 동반하는 동사이다. 소극적으로 죄를 용서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적극적으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몸을 온전히 드리는 순종을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드려 그것을 이루셨다면, 우리는 그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자로서 다시 우리의 몸을 드려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그저 예수님의 희생을 볼모 삼아 우리의 죄만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절대 아니다.

4. 다시 말하지만 죄의 용서와 해결이 최종 목적이 아니다. 그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단지 죄의 용서만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진짜 목적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삶을 선택하고 결정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원하시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비난하며 죄를 드러내고 고발하지만, 그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죄의 문제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 십자가가 단순히 사죄와 용서의 메시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십일조의 정신

1. 구약 성경에 나온 십일조의 유래 중에 하나는, 오직 하나님과 성막(성전)을 섬기기 위해 택함을 받은 레위 지파를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다른 열한 지파처럼 기업을 분배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민 18:8 이하).

2.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매우 실제적인 분이시다. 레위지파가 하나님만을 섬기니 하나님이 책임지고 먹여살리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으신다. 대신 십일조라는 제도(시스템)을 율법에 집어넣으신다.

3. 오늘날 사역의 현장은 어떠한가?(일부러 목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믿음과 헌신을 강요하면서, 하나님이 채우시고 책임지실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어느 때는 하나님이 까마귀를 통해 먹이신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람을 통해 하신다. 그리고 제도(십일조와 구제)를 만드신다.

4.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믿음과 헌신, 기도만을 말한다. 평균케 하거나 필요를 채우는 것에는 관심이 별로 없어 보인다. 페이스 미션(faith-mission)과 무보수 목사로 칠년을 살아보니, 믿음만을 강조하는 우리 안에 허구가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시지만, 하나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5. 그것을 하나님이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필요한 제도들을 만드시고, 그것을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오늘날 십일조가 존재해야 한다면, 이런 십일조의 정신과 목적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무엇을 위해?“(what) 그리고 “어떻게?”(how)라는 질문에 우리 스스로 답을 해야할 것이다.

6. 성경은 이것을 ‘공의’라고 부른다. 적어도 구약의 율법을 통해 십일조를 보면, 십일조는 공의의 문제이지 ‘복’의 문제는 아니다. 십일조만 하면 하늘의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십일조를 통해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고 필요를 채우며 평균케 하는 일을 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참된 복을 주실 것이다.

7. 본질의 정신은 사라지고, 남아 있는 껍데기만을 가지고 찬성과 반대만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십일조를 찬성한다면, 그 가치와 목적에 부합하도록 사용해야 한다. 반대로 반대한다면,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약자들을 위한 돌봄과 채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그것을 위한 성경적인 제도들을 마련해야 한다. 그저 찬성을 위한 찬성, 반대를 위한 반대는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