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이 사역하다가 기꺼이 잊혀지게 하소서

지역교회의 일반적이고 평범한 목회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와 제주도 교회를 섬기고 싶다는 거창한 소망으로 북 카페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속도가 너무 더디다. 뭘하든 다 돈이기 때문이다. 두둑한 잔고를 통장에 쌓아 놓고 시작하는 것이라면 마음이라도 편할텐데 없는 돈을 짜내어 진행하다보니 속도가 너무 너무 더디고 힘들다. 거기에 걱정하시는 부모님과 지인들 –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걱정 하시는지 나도 잘 안다. 돌다리도 두드리는 성격인데 나인들 수 백번 계산해 보고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제주도에 넘쳐나는 것이 카페이고 펜션이고 망해 나가는 것이 카페이고 펜션인데, 또 하나의 카페를 시작한다고 하니 다들 걱정을 하시는 것이 당연하다. 나도 내가 걱정스럽다.

또 다른 반응은 과거에 다 해 보았다는 것이다. 뭐 제주도에서 이런 저런 사역들 다 시도해 보았는데 거의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것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부분이다. 기독교인 숫자도 작고, 교회들도 미자립 교회가 수두룩하고, 어떤 강사를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와도 사람들이 안 모인다. 아카데미 사역을 고민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잘 배우려고 하지 않는데 뭐가 되겠는가? 이렇게 저렇게 막막할 뿐이다. 요 며칠 동안 머리가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하나님 왕국, 선교적 교회, 북카페, 아카데미 사역, 네트워크, 공동체… 참 멋있는 단어들이지만 현실에서는 너무도 형이상학적 단어들이다. 진행하면 할수록 참 현실과는 동떨어진 개념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가야 한다. 망해도 실패해도 가야 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이 되고, 실패자라는 주홍글씨가 붙여져도 어쩔 수 없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가는 것이 맞다. 불확실한 것이 가득하고,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 주님이 가자고 하면 따라가야 한다. 그것이 제자의 본분이다. 환경이 불안함을 증폭 시키지만 주님의 샬롬을 구하며 계속 주님께 발걸음을 맞추어야 한다. 은행의 잔고도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묵묵히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길에 서 있느냐는 것이다. 사역의 열매, 성공의 유무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 오늘도 주님을 따라 하나님 왕국을 위한 모험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가?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

예수님의 제자도 vs. 제자들이 제자도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4:43~52

  1.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시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좇았던 열두 명의 제자들의 모습이 대비된다. 그 중에 한 명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팔아 넘기는 일에 선봉에 서 있다. 그 중에 한 명은 그래도 용감하게 칼을 뽑아 자신의 스승을 지키기 위해 대제사장 하인의 귀를 쳐 잘라버렸다. 하지만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 버린다. 그 중에 한 명은 맨몸에 홑이불 하나만 두르고 예수님을 따르다가 사람들이 붙잡아 그 홑이불 마저도 버리고 벌거벗은 채 달아나 버렸다.
  2. 자신들의 눈 앞에 벌어지는 상황 – 함께 지내던 가룟인 유다가 칼로 무장한 로마 군인들과 몽둥이로 무장한 대제사장의 종들을 이끌고 갑자기 자신들의 아지트를 급습했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고 놀라고 두려웠겠는가? 곧 메시아의 왕국을 완성할 것이라는 부픈 기대감 속에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체포라니 그들은 1도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이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저항도 하지 한번 하지 않으시고 담담하게 그들에게 체포되어 끌려 가신다는 것이다. 성전을 그렇게 뒤집어 놓으실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이렇게 무력하게 나약하게 체포되는 것이 제자들을 더욱 놀라고 당황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3. 오늘 말씀을 통해 두 가지의 제자도를 보게 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길을 답답하게 걸어가시는 예수님, 비록 그 길에 고통과 조롱과 죽음이 놓여 있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면 묵묵히 자신의 눈 앞에 벌어지는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순종하시며 계속해서 그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제자도를 발견할 수 있다. 반대로 제자들이 제자도이다. 마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 것처럼 자신있게 말들을 했지만 정작 자신의 생명과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두려움이 엄습하자 예수님을 버리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그 길에서 이탈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더 나아가 한 제자는 함께 그 길을 걷는척은 했지만 뒤로 스승을 팔아버리는 배신자의 길을 걷고 있다.
  4. 우리는 다시 한번 제자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도전 받는다. 평화롭게 안정된 상황 속에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삶에 위기가 닥치고 두려움이 찾아오고 생명의 위협을 받고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변함 없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이탈하지 않고, 배신자의 길을 걷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이 믿음이고 순종이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도의 핵심은 멋진 신앙고백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삶의 현장, 부르심의 현장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변함 없이 예수님의 뒤따르는 사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게 진짜 제자도의 삶이다.

믿음의 경주(복음을 전하는 삶)를 마쳐야 구원이 완성된다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3:1~13

  1. 성전에서 가르치는 사역에 집중하시다가 이제 그곳을 떠나려고 하시는데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웅장한 돌들을 쌓아서 만든 성전 건물을 보며 감탄을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제자에게 말씀하신다. “이 훌륭한 건물들을 보느냐? 여기 있는 돌 하나도 그냥 쌓여 있지 않고 하나같이 모두 무너질 것이다.” 이 말씀은 당시 제자들에게(당연히 유대인 전부에게) 상당히 충격적이고 도전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에게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일뿐 아니라 그들의 신앙생활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성전을 보고 곧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너무도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2. 예수님은 성전이 보이는 맞은편 올리브산에 가서 앉으셨다. 그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따로 나아와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는데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며, 그런 일이 일어날 때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냐고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1)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일어나서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2) 전쟁과 분쟁의 소식과 소문이 많이 들려올 것이며, 더불어 자연재해(지진, 기근)에 대한 소식도 많이 들려올 것이다. (3) 예수님으로 인해 법정에 넘겨지고 회당에서 매질을 당할 것이며, 왕과 총독들 앞에 서서 증언하게 될 것이다. (4) 하지만 끝이 오려면 먼저 복음이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해져야 한다. (5)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3.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놓고 많은 신학적 논쟁이 있어 왔다. 핵심은 두 가지이다. 이 말씀이 이미 실현되었는가? 아니면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말씀인가? 전통적으론 후자가 더 많은 지지를 얻었다.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해 왔다. 하지만 예수님의 예언과 종말에 대한 말씀을 꼼꼼히 살펴보면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이라기 보다는 주후 70년에 일어날 성전 파괴와 관련된 예언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그리고 앞뒤로 일어날 많은 핍박과 박해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법정에 넘겨지고 회당에서 매질당할 것이고 왕과 총독 앞에서 증언(변증 혹은 변호)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을 보아도 금방 확인이 가능하다.
  4. 그러나 단순히 성전의 파괴(예루살렘 파괴), 그리고 로마와 유대교에 의한 핍박과 박해만을 말씀하신다고 보아선 안 될 것이다. 구약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오심(단순히 성육신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까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령의 오심(오순절)으로 종말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미 임박한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당시 예수님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전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험했고, 그로 인해 많은 핍박과 박해의 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명확하게 진정한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져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그리고 재판의 자리에 선다 있다할지라도 걸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성령께서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5. 우리는 그때가 언제인지 어떤 징조가 일어날 것인지 궁금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초점을 맞추고 따라야할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그 분의 증인으로 예수님을 전하고(복음을 전하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대로 살아가야 한다. 그런 삶 가운데 핍박과 박해가 있다하더라도 우리의 걸음을 멈추지 말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구원을 받을 것이다. 구원은 한 번의 영접 기도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교회에 적을 두는 것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삶 속에서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따르며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삶의 경주를 완주하게 될 때에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그 경주는 우리의 힘만으로 하는 경주가 아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도움을 약속하신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내면에 임재하신 분이 성령님이시다.

섬김과 무능력함으로 세워지는 하나님 왕국

마가복음 10:32~45

  1.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따로 불러 놓으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이유와 그곳에 올라가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예수님을 결박해서 이방 사람들(로마군인들)에게 넘겨줄 것이고,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린 뒤에 죽일 것이다. 하지만 3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주시길 요청한다. 그들의 소원은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자신들을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혀 달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눈치가 없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올라가 종교 지도자와 이방인들에 의해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제자라는 사람들은 누가 더 높은가에 대해서 논쟁을 하더니 이제는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혀 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책망하기 보다는 다른 차원의 질문을 새롭게 던지신다.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예수님이 받으시려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 이것은 앞으로 벌어질 고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죽음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죽음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이다. 두 제자는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조차 알지 못하면서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을 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마시는 잔을 그들도 마실 것이고, 자신이 받는 세례를 그들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이것은 단순히 두 제자만의 운명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의 운명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 분을 따르는 자들은 그 분이 마신 잔을 동일하게 마셔야 하고, 그 분이 받은 세례를 동일하게 받아야 한다. 그것이 모든 제자의 운명이다. 대신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누가 앉을 것인가는 예수님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밝히신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정하실 일이고 하나님의 소관이시다.
  3. 이런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은 모두 분개했다. 얼마 전까지 이 문제를 놓고 서로 논쟁을 벌였는데, 이렇게 갑자기 자신들 앞에서 대놓고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 자리를 자신들에게 달라고 하는 부탁을 뻔뻔하게 하고 있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아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놓고 다시 하나님 왕국의 리더십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이 세상의 리더돌은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력을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제자들은 그런 방식을 동일하게 취해서 안 된다. 오히려 큰 사람이 되고 싶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려고 한다면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리를 삶으로 살아내시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섬김을 받으러 하시지 않고 섬기시고 계신다. 또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몸값을 치루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주려고 하신다.
  4. 예수님은 계속해서 역설을 말씀하신다. 제자도의 삶의 본질도 역설이지만, 리더십의 본질도 역설이다. 그 역설은 세상의 방식과 모습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고 명령하고 군림하고 지배하지만, 하나님 왕국의 리더들은 그것과는 완전히 반대된 삶을 살아야 한다. 낮아지고 무능력해지고 나약해져서 섬겨야 하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왕국을 위해 헌신된 리더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영광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추앙과 권력을 챙취하기 위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생명을 내주기 위함이다. 세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무능력해지고 나약함으로 체포되어 고문과 조롱을 받고 십자가에 죽기 위함이다. 하나님 왕국의 리더는 그런 자리이다. 야고보와 요한이 정말 그것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런 자리를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잔과 세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5. 하나님의 왕국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이다. 강력한 권력과 힘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능력해지고 나약해지는 것이다. 군림하여 조정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 왕국은 이 땅에 임한다. 역설로 임하고 역설로 세워지는 왕국이다. 제자도에도 역설이고 리더십에도 역설이다. 전부 뒤집어지고 전복된 왕국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그 전복된 왕국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많은 성도들도 그런 역설과 전복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날 교회는 자꾸 더 높이, 더 많이, 더 크게만을 부를짖고 있다. 얼마 전 새롭게 선출된 한기총 회장은 취임식에서 기독교 국가를 회복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마치 예수님께 오른편과 왼편의 자리를 구한 세베대의 아들들과 같은 어리석은 외침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그렇게 임하지 않는다. 그렇게 세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낮아지고 섬기고 나약해지고 무능력해져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왕국이 임하는 방식이고 세워지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