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자녀답게 자유를 누리라

묵상한 말씀 : 갈라디아서 4:21~31

1. 바울은 율법으로 사는 삶과 복음으로 사는 삶을 비교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비유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는 여종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이고, 둘째는 부인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 이삭이다. 둘 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커다란 차이점도 있다. 하갈을 통해 얻은 아들 이스마엘은 육신의 자녀이고, 사라를 통해 낳은 아들 이삭은 약속의 자녀라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의 방법으로 얻은 아들이고,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얻은 아들이라는 것이다.

2. 바울은 이것을 상징이라고 말한다. 두 여인과 두 아들은 두 가지 언약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종의 아들이고 육신으로 얻은 아들로서 율법을 상징하고, 사라와 이삭은 자유인의 아들이고 약속의 아들로서 복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길 중의 하나를 가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을 따라 종의 자녀로 살 것인지, 복음을 따라 자유인의 자녀로서 살 것인지, 또한 육신을 따라 살 것인지, 약속(성령)을 따라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처음에는 육신을 따라 종의 자녀로 살 수 밖에 없다. 마치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육신의 방법으로 자녀를 얻으려고 함으로 이스마엘을 낳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얻은 다음에는 두 아들이 한 집에 공존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육신의 자녀가 약속의 자녀를 핍박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육신의 자녀를 집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이 공존할 수 없고, 종과 자유가 함께 거할 수 없으며, 육신을 따라 사는 삶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한 몸 안에 함께 할 수 없다.

4. 약속의 길과 육신의 길은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이다. 종의 자녀로 사는 삶과 자유인의 자녀로 사는 삶도 그러하다. 하루 중에 반은 종의 자녀로 살고, 나머지 반은 자유인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완전히 종의 자녀로만 살든지, 아니면 완전히 자유인의 자녀로만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좋은 소식)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의 자녀이었던 자가 자유인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의 지배 아래 있던 자가 은혜의 지배, 성령의 지배 아래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5.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종의 자녀로 살아갈 필요가 없다. 육신을 따라 살아서도 안 된다. 그런 삶에서 우리는 완전히 해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케 되었고 해방되었으며 새롭게 되었다. 새로운 신분이 주어졌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오직 그 길로만 가면 된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되고, 돌아가서도 안 된다.

6.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유인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자들이 있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아니다. 복음의 핵심은 자유다. 더 이상 종의 자녀가 아니다. 우리는 본처의 자녀로서 자유롭게 되었다. 다시 말한다. 복음의 핵심은 자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어떤 것도 우리를 얽매이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救贖)을 받은 자들이다. 죄와 율법의 구속([拘束)을 받은 자들이 아니다.

7. 그렇다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 그것은 바로 자유를 누리는 삶이다. 사실 이 점에 대해선 할 말이 많고, 하고싶은 말이 많다. 한국 교회가 복음을 강조하고 복음을 선포했지만(물론 그 복음도 반쪽짜리 복음이긴 하지만) 그 복음으로 인한 자유에 대해선 대단히 무지하다. 오히려 신앙생활은 매우 율법적이고 유교적이다. 죄의 종들을 복음을 자유케 하여 교회의 종으로 다시 전락 시키는 일들을 하고 있다. 아니다! 복음의 핵심은 자유케 되는 것이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다

묵상한 말씀 : 고린도전서 5:1~13
나에게 주시는 말씀 :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판단해야 할 사람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 악한 사람을 여러분 가운데서 내쫓으십시오.” (12~13절)

1. 요약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죄(성적 타락)에 대해서 책망한다. 방관하거나 방치하지 말고 자랑하지도 말라고 말하면서 그런 사람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말한다. 교회는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묵은 누룩이 없는 새 반죽 덩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단절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으면서 그들과 관계해야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죄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하고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2. 깨달아지는 것

2-1.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성적인 문제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심지어 아버지의 아내와 동거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동시에 그런 일들이 공동체 안에서 행하여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만해 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슬퍼하고 아파하면서 그런 짓을 행하는 사람을 공동체 밖으로 내좇아야 한다고 말한다(1~2절).

2-2. 그 이유를 유월절 사건을 통해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어린 양을 잡고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겐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거룩한 삶으로 연결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룩이 없는 새 반죽 덩어리가 된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묵은 누룩(죄)을 새 반죽 덩어리에 넣지 말아야 한다(6~8절).

2-3. 9절 이하에서는 이것이 실제 삶에서는 어떻게 적용이 되어야 하는지를 다룬다. 새 반죽 덩어리가 된 교회는 더 이상 죄악을 행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면 안 된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해야 한다면 교회는 세상 밖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9~10절). 이것은 교회 공동체 안을 향한 말씀이다. 그래서 11절에서는 “형제라 불리는 어떤 사람이” 여러 가지 종류의 죄를 범하면 그런 사람들과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 말한다.

2-4. 교회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판단은 하나님의 몫이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가 아니라 공동체 안을 향해서 거룩한 기준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단호하게 공동체 안에서 여전히 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을 공동체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12~13절). 그것이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는 방법이다. 모호한 태도와 기준으로 그들을 방치하면 안 된다. 잘못하면 그것이 적은 누룩이 되어 새 반죽 덩어리를 변질 시킨다.

3. 질문

3-1. 신약의 난해 본문 중에 하나가 5절이다. “그런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십시오. 이는 그 육신은 멸망하더라도 그 영은 주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가? 사탄에게 넘겨준다? 육신은 멸망하지만 영은 구원을 얻는다?

3-2. 이 본문이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이유 중의 하나는 3절과 4절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3, 4절에서 영과 육신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몸으로는 고린도 교회를 떠나 있지만 영으로는 계속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동체 안에서 죄를 지속적으로 짓고 있는 사람들의 육신은 사탄에게 넘겨주라고, 그러면 영이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3-3. 이것은 육과 영의 이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육은 별로 소중하지 않고 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사도 바울은 6장 19절에서 우리의 육신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육과 영을 구별하거나,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3-4. 그럼 무슨 의미인가? 5절을 이해하려면 9절 이하의 내용과 연결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세 가지를 요구한다. 만일 형제라 불리는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면, (가) 어울리지 말라. (나) 함께 먹지도 말라. (다) 그 사람을 공동체 밖으로 내쫓으라. 다시 말하면 주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교회 공동체 밖으로, 사탄이 왕 노릇하는 곳으로 내쫓으라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회개와 각성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날(재림의 날)에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이끌라는 것이다.

4. 적용

4-1. 동성애와 세금 문제로 시끄럽다. 특히 동성애에 대한 복잡한 상황 때문에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분명한 원칙을 제시한다. 동성애는 죄다! 그것은 명확하다. 그것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명확히 해야한다. 하지만 세상에 대해서까지 그 잣대를 가지고 정죄와 심판자의 자세로 나아가선 안 된다.

4-2. 교회 공동체는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단호하게 반응해야 한다. 지금 한국 교회 안에서는 행해지는 여러 가지 죄악에 대해선 바른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면 자신에 대해서 은혜롭고 세상에 대해선 날카롭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세습과 횡령과 배임과 각종 범죄에 대해선 너그럽게 대하면서 세상의 죄에 대해선 공격적인 자세로 혐와 비난을 쏟아내선 안 된다.

4-3. 교회는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 그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 양으로 희생하셨다. 적은 누룩을 수용하거나 인정해선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세상 속에서 존재해야 한다. 그 경계선을 잘 지켜야 한다. 이게 쉽지 않다. 그 경계선을 치우치지 않고 잘 지킨다는 것이 참 어렵다. 여러 적은 누룩으로 거룩해야 하는 주님의 몸된 공동체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5. 기도

주님! 지혜가 필요합니다. 단호하게 행동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또한 세상을 향해선 긍휼과 사랑으로, 자신을 향해서 거룩과 진리로 반응할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지 않기

묵상한 말씀 : 이사야 14:12~23
나에게 주시는 말씀 : “내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별들보다 더 높은 곳에 내 보좌를 높이 세우겠다. 북쪽 끝에 있는 신들의 회의 장소인 산꼭대기에 내가 앉겠다. 내가 구름 꼭대기 위로 올라가서 가장 높으신 분과 같아지겠다.”(13~14절)

1. 바벨론 왕에 대한 조롱의 노래는 계속되고 있다. 특히 그가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동시에 그 교만함으로 얼마나 낮은 곳으로 추락할 수 있는지도 동시에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2, 13절을 누가복음 10장과 요한계시록 12장과 연결 시켜서 사탄의 타락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14장이라는 문맥적 흐름으로 보면 ‘샛별’(morning star)은 사탄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샛별은 바벨론 왕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천사의 타락을 언급하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의 초점은 바벨론 왕의 교만이다. 그는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했다.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다.

2. 하지만 여전히 샛별을 사탄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1번의 해석을 받아들이면서도 바벨론 왕이 타락한 것처럼, 사탄도 똑같은 과정과 모습으로 타락했다고, 그래서 사탄의 타락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말씀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어떤 영적인 존재가 타락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신이 앉으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교만이라고 말하며, 죄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한다. 죄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앉으셔야 하는 자리에 인간이 앉아서 자신이 주인이 되려고 하는 모든 시도와 태도들을 말한다.

3. 그 결과는 무엇인가? 15절 이하가 교만한 죄의 최후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결국에 저 아래 무덤으로, 구덩이의 맨 밑으로 내려가게 된다. 스스로 교만해져서 가장 높은 곳(하나님의 보좌)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그는 죽음의 가장 깊은 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 그런 장면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이 사람이 과연 땅을 뒤흔들고 여러 나라를 떨게 하던 그 사람인가? 세상을 황무지로 만들고 성읍들을 무너뜨리며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않던 그 사람인가?”(16~17절) 어제 살펴본 것처럼, 많은 사람들을 스올의 구덩이에 던지던 그 사람이 자신도 같은 처지가 되어 스올의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을 보면서 이런 질문들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벨론 왕의 처참함과 굴욕을 다른 왕들의 죽음과 비교하게 된다는 것이다(18~21절). 엄청난 부와 영광을 누렸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그 앞에선 두려워 떨 수 밖에 없었는데 그의 죽음은 처참하고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4. 그렇게 잘 나가던 바벨론 왕이 왜 이렇게 비참해졌을까? 22, 23절이 그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교만한 바벨론 왕(한 개인의 왕 뿐만 아니라 바벨론이라는 나라 전체에 대해서 말씀하신다)을 대적하시고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22절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일어나 그들을 치겠다.” 그렇다. 교만해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선포를 하나님이 들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를 다른 왕들 중에서도 가장 비천하고 치욕스럽게 만드시겠다고 선언하신다. 멸망의 빗자루로 완전히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핫니다.

5. 이것이 교만의 결과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창세기 3장의 사건이 떠오른다. 뱀이 하와에게 와서 선악과를 먹으라며 이렇게 유혹한다. “너희가 결고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4, 5절) 이것이 죄의 본질이고 시작이다. 죄가 무엇인가? 죄란 하나님이 앉으신 자리에 인간이 앉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신의 그 삶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죄(교만)을 제일 싫어하신다. 그래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던져버리신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 하신다. 하나님은 절대 그것을 허용 하시지 않으신다.

6. 목회를 하면서 가장 큰 유혹은 돈도 성(sex)도 명예나 성공도 아니다. 짧은 목회의 경험이지만 제일 큰 유혹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얼마나 자주 그런 유혹이 찾아오는지 모른다. 목사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자주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는 영광을 가로채고, 하나님이 앉으셔야 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제일 싫어하신다. 당신의 영광을 누구에게 나누어주시지 않는다. 인간은 철저하게 인간이 되어야 한다. 반대로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

죄와 율법의 관계

묵상한 말씀 : 로마서 7:1~13
나에게 주시는 말씀 : “그러나 지금은, 우리를 옭아맸던 것에 대하여 죽어서, 율법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에 얽매인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6절)

1. 7장 1절부터는 다시 율법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앞에서 다룬 율법의 문제는 의롭다함을 받는 것 – 구원 받는 것 – 과 율법과의 관계성을 살펴보았다면, 7장에서는 구원 받은 자의 삶과 율법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로마교회 안에 있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나는 율법을 아는 사람들에게 말을 합니다.”).

2. 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이다(1절). 가장 비슷한 예가 결혼인데, 어떤 여자가 결혼하여 남편이 있다면,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법적으로 그 남편에게 매여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풀려나게 된다는 것이다(2절). 이것을 다시 설명하면, 남편이 있는 여자가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에게로 가면 간음을 범한 것이다(간음죄).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간음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3절).

3. 율법과의 관계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전엔 율법에 속해 있었지만(그래서 율법의 지배를 받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됨으로 율법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4절).

4. 율법의 지배를 받았을 때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없었던 이유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육신 안에 있는 죄의 욕정이 죄된 몸 안에서 작용해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이다(5절). 여기서 사도 바울은 매우 인상적인 설명을 한다. 율법이 죄의 욕정(sinful passions)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이다(더 자세한 것은 7절 이하에서 살펴보자).

5.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옭아맸던)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문자에 얽매이는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 안에 있는 자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다(6절). 이것이 율법 안에 있는 자와 복음 안에 있는 자의 차이점이다. 문자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그것을 인간의 힘으로 지키려고 하는 것이 낡은 정신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내주하시며, 그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6. 7절에서는 율법과 죄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율법에 대한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반발하고 반대할 것이다. “율법이 죄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이 죄는 아니다. 그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율법의 기능이다.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았다면,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율법에서 “탐 내지 말아라”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탐심이 죄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7. 문제는 율법에 있지 않고, 인간의 타락한 마음에 있다. 더불어 율법에는 죄를 드러나게 할 뿐 해결할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죄가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인간의 타락한 마음 안에 온갖 탐욕을 일으켰다는 것이다(8절). 사도 바울은 이 이야기를 1인칭으로 설명하고 있다.

8. 율법이 없을 때는 내가 살아 있었지만, 율법이 들어온 이후로 죄가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 율법이 주어진 목적은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는데, 도리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것은 율법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죄에 있다. 죄가 율법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나를 속이고, 나를 죽였다(9~11절).

9.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12절).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다.” 율법 그 자체는 선하고 거룩하다. 율법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진짜 문제는 타락한 인간에게 있고, 그 타락한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죄에게 있다. 율법은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할 뿐, 그 죄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진 못한다. 그 결과 죄를 더욱 활성화 시키는 일들이 벌어진다.

10. 13절은 이 문제를 다시 설명하고 있다. 율법은 좋은 것인데, 그 좋은 것이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왔다는 말은 아니다. 이것을 정확히 말한다면, 죄가 그 좋은 것(율법)을 매개로 해서 인간에게 죽음을 가지고 왔다. 율법은 그저 그 죄가 얼마나 악하고 독한 것인지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11. 그래서 성경은 육신을 따라 사는 삶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구분한다. 구원 받았다. 예수님을 믿는다. 교회를 다닌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육신의 힘으로)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원리들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것으로 참다운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다. 오직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8장에 가서 이 점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지만, 7장에서는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 왜 필패 할 수 밖에 없는지를 사도 바울의 간증과 경험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진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다시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