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민족들이 기도하는 집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1:11~19

  1. 어린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그리고 곧바로 성전으로 들어가신다. 마치 시찰이라도 하시듯 성전의 모든 것을 둘려보시곤 다시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나가신다. 그 다음 날 베다니를 떠나시려고 하는데 배가 고프셨다. 마침 예수님의 눈에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들어왔다. 그래서 열매가 있을까 해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지만 잎만 무성할 뿐 원했던 무화과 열매는 없었다. 왜냐하면 무화과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런 나무를 저주하신다. “이제부터 어느 누구도 네 열매를 따 먹지 못할 것이다.” 그리곤 장면은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겨진다(구체적인 내용은 내일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 말씀을 읽는 독자가 눈치가 조금만 있다면 이 무화과나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곧 다시 등장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2.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것은 왜 무화과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시즌(season, 철)도 아닌데 예수님은 열매를 기대했느냐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 점을 명확히 밝힌다. 보통 무화과 열매가 맺히는 8~9월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벌어지는 때는 3월 말경이었다. 열매가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열매를 기대하셨고, 기대했던 열매가 없다고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 하셨냐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기대하셨던 열매는 8~9월에 맺히는 열매가 아니었다. 보통 8~9월에는 가장 좋은 열매가 맺히지만, 3월 경에도 작은 열매가 열린다. 예수님이 이 점을 몰랐을리가 없다. 비록 제철이 아니지만 그래서 풍성하고 맛있는 무화과 열매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맺혀야 하는 작은 열매마저도 없는 것을 보시고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것이다.
  3.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나무에 자주 비유한다. 대표적인 나무가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무화과 나무에 열매를 기대하셨고, 기대하셨던 열매가 없음으로 인해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성전 척결’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이야기이다. 그럼 무화과 나무 사건과 이어지는 ‘성전 척결’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셜펴보자.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고 곧장 성전으로 향하신다. 그리고 바로 성전(정확히 말하면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내쫓기 시작하셨다. 마가복음에서 묘사하되는 예수님의 모습은 상당히 과격하고 폭력적이다. 예수님은 돈 바꿔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어떤 사람도 장사할 물건들을 들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지 못하게 하셨다. 아마 당시 성전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멘붕에 빠지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4. 그렇게 충격과 당혹감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집은 모든 민족들이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성경에 기록돼 있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말았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왜 예수님이 분노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성전의 본질을 두 가지로 말씀하신다. 첫째는 ‘모든 민족들’이고, 둘째는 ‘기도’이다. 성전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전은 철저하게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것도 한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열방,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그곳을 장사를 하고, 그 장사를 통해서 이득을 취하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어제 성전을 둘러보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겸손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곧장 성전의 모든 부분들을 둘러보시고 확인하신다. 그것을 통해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더러운 일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신 것이다.
  5. 그리고 그 다음 날 다시 오셔서 성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더러운 일들을 금지 시키며, 성전이 존재하는 목적을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만민이 모여서 기도하는 장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한 가지를 명확히 정리해야 한다. 이 사건의 목적이 ’성전 정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러워진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건의 목적은 ‘성전 척결’ 즉 성전의 기능을 완전히 끝내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심판하셔서 이젠 건물로서의 성전의 기능을 끝내버리신 것이다. 이것을 명백하게 보여준 사건이 그 앞에 나온 무화과 나무 사건이다. 두 사건이 연결이 되는 근거는 ‘기도’이다(내일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에 기대하셨던 열매란 기도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최소한의 열매(기도)라도 기대하셨지만 그런 열매도 없었던 것처럼, 성전 곳곳을 둘려보았지만 모든 민족이 모여서 기도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고, 이방인의 뜰(그곳이 진짜 이방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장사꾼들의 소리과 짐승들의 소리들 뿐이었던 것이다.
  6. 그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처럼, 지금 성전 안에 모든 더러운 것을 둘러엎으시고 그들을 쫓아내시며 그 장소를 통해 하나님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말씀하신다. 그곳은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과 간구와 예배와 중보의 소리가 가득한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과 귀에는 최소한의 열매도 없었던 무화과 나무처럼, 최소한의 기도 소리조차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종교적인 행위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그냥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분 안에 있는 열정과 분노가 예수님 자신을 가만히 있게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의 행위를 지켜보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고 두려웠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 놀람과 두려움이 회개로 이어졌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법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7. 이것은 비단 유대인들을 향한 심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건물로서의 성전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즌을 열어놓으신 예수님은 우리들의 몸이 성전이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움직이는 성전, 살아있는 성전으로서 동일하게 기도의 열매를 기대하신다. 이것은 기도를 무조건 많이 하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한국 교회는 그것마저도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로 전락 시켜버렸고, 세속적인 성공과 명예와 부를 얻는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지만 – 그런 점에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방인의 뜰에서 물건과 동물을 사고 파는 것을 통해 이득을 얻었던 그들과 세상의 부와 성공만을 추구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이 무엇이 다른가를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하나님은 진정한 기도와 예배를 원하신다. 자신의 욕망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왕국과 열방을 향한 그리고 그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간구와 감사와 찬양, 중보의 소리가 넘치는 살아있는 성전이 되기를 바라시고 원하신다.

주기도문과 일상

1. 얼마 전에 들었던 일상에 대한 강의 중에 가장 마음에 와닿은 것은, 일상이란 매일 먹고 마시고 잠 자는 것이 보장된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 중의 가장 중요한 것이 먹는 것과 잠자리의 문제이다. 하루 세 끼를 먹고, 안식과 안전한 잠자리가 보장되어 있은 것이 일상이란 삶을 유지하는 근간이다. 만약 이것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의 일상은 고통과 불안, 위험의 연속이 될 수 밖에 없다.

2.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문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전자는 ‘당신’ 청원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 그 분의 뜻과 왕국을 구하는 것이다. 후자는 ‘우리(우리들)’ 청원으로 일용할 양식과 용서, 시험에 대하서 구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 매일을 살아가야 하는 일상과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는 부분이 ‘일용할 양식’이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양식이기 때문이다.

3. 우리가 여기서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그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자가 ‘나(I)’가 아니라 ‘우리(We)’라는 복수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혹은 우리 가정에게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양식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에서 구해야 하는 기도이고 공의인 것이다.

4.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 있는 구원 개념이 너무 내면화 되어 있고 개인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한국 기독교인들의 기도 생활이나 내용도 너무 개인화 되어 버렸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는 우리의 기도를 강조하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나의 기도로 전락 시켜버렸다. 그리곤 기도 시간의 양이나 응답 받은 양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나를 뛰어넘어 공동체뿐만 아니라 지구촌을 향한 기도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5. 매일 주어지는 일상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한다면, 동일하게 나의 이웃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에 있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도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열방 가운데 일하시고 그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매일 나를 뛰어넘어 우리의 일상을 위해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기도문을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기도이며, 예수님의 소망이시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2) : 강청의 기도

묵상한 말씀 : 누가복음 11:5~8
나에게 주시는 말씀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친구라는 이유만으로는 그가 일어나 빵을 갖다 주지 않을지라도, 끈질기게 졸라 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8)

1.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두 번째 파트를 살펴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은 먼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1~4). 그리고 연결해서 강청하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사실 우리가 이 비유에 제목을 붙일 때 ‘강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헬라어를 찾아보면 ‘아나이데이안’이란 단어로 더 정확한 의미는 ‘담대함’(boldness)과 ‘파렴치함, ‘뻔뻔함’(shamelessness)이다(다렐 보크/조호진 옮김, NIV 적용주석 시리즈 – 누가복음, (서울 : 도서출판 솔로몬, 2016), p.409).

2. 더불어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세기 문화 속에서 당시 사람들이 어떤 당연한 기대를 품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 음식은 오늘날처럼 항상 먹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24시간 편의점은 오늘날에만 있는 것이다. 빵은 매일매일 그날의 필요를 위해 구워졌다. (나) 그 당시 문화에서는 환대하는 것을 매누 높게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거의 의무처럼 여겼다. 방문객이 언제 오는지와 상관없이 환대해야만 했고 또한 섬김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 딜레마는 늦은 저녁 손님이 왔는데,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라는 딜레마다. 이럴 경우 주인은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가 또 당시 상황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할 점은, 고대의 집들에는 방이 한 개밖에 없었다는 현실적인 모습에 대해서이다. 늦은 시간에 이웃을 찾아간다는 것은 그 집안 식구들 모두 깨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주인은 늦게 자신을 찾아온 벗을 위해 다른 집을 찾아가 얼마나 강청해야만 하는가?(앞의 책, p.408)

3. 예수님의 결론은 이러하다. “친구라는 이유만으로는 그가 일어나 빵을 갖다 주지 않을지라도, 끈질기게 졸라 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8) 이것을 통해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이 비유는 두 가지의 명확한 초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자신의 필요를 위한 강청이 아니라는 것이다. 밤 늦게 찾아온 자신의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강청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그렇기 때문에 담대하게 뻔뻔하게 강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나하면 그런 손님 접대는 거의 의무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명학하게 말씀하신다. 친구됨으로는 힘들겠지만, 담대하고 뻔뻔하게 구하는 기도 때문에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4. 우리는 이런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부른다. 중보기도는 나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서 강청하는 기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중보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강청(담대하고 뻔뻔하게 구하는)이다. 얼마나 간절하게 끈질기게 기도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다. 나를 위한 기도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웃을 위한 기도는 참 어렵고 잘 안 된다.

5. 우리는 다시 기도를 배워야 한다. 이웃을 위한 강청의 기도, 곧 중보의 기도를 다시 배워야 한다. 명심하라. 예수님은 먼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고, 그 다음 이웃을 위한 강청의 기도(중보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이것이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하는 기도의 내용들이다. 우리는 다시 예수님께 기도를 배워야 한다.

내일부터 시작입니다!

저는 내일부터 강의를 시작합니다. 태국 치앙라이에서 진행되는 FCM(기초상담사역학교, YWAM)이라는 학교입니다. 강의 주제는 ‘성령과 상담’입니다. C국 사역자들이고 통역 강의이기 때문에 지혜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성령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필요합니다. 생각나실 때마다 함께 중보해 주세요.

1. 기도 제목
-강의가 잘 전달되고 이해될 수 있도록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도록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 사역 가운데 성령님의 만지심이 있도록(목, 금)

2. 강의 계획
25일(월) – 하나님의 왕국
26일(화) – 복음
27일(수) – 창조, 타락, 구속 (성령 하나님을 중심으로)
28일(목) – 성령 사역 & 기도사역
29일(금) – 성령사역 &기도사역

사랑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