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독재? 나쁜 독재?

시간이 지나면,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좋은 독재? 나쁜 독재? 그런거 없다. 경재만 잘 살게 해주면 독재도 좋은 것이 되냐? 그것이 구 시대의 사고이다. 이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구 시대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놀랍게 변화하는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가 되어 온갖 부와 명예, 권력을 독자치하고, 적지 않은 국민들은 그저 경제적으로만 잘 살게 해주면 된다는 식의 사고에 빠져 그런 논리와 독재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이 나라가 불쌍하고 불쌍하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교계까지 이런 사고와 논리가 가득하다. 구 시대적 패러다임으로 전도를 하려고 하고, 구 시대적 사고로 교회 개척을 외치고, 구 시대적 사고로 신앙생활을 설명하려고 하니 성경도 왜곡되고,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다. 진리에 대한 탐색도 문제이고, 그 진리를 적용하는 방법에도 오류가 너무 많다.

오피니언 리더들이 너무 구닥다리다. 그들은 정말 ‘오피니언 리더’가 되지 말아야 하는데, 옛날에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여전히 기득권을 가지고 여전히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참 대한민국 불쌍하다. 사람이 이렇게 없냐? 리더가 이토록 없냐? 불쌍하다 대한민국, 불쌍하다 한국 교회!

선발이냐 청빙이냐

선발이냐? 청빙이냐?

오늘 우연히 교단신문을 보았는데, 담임목사 청빙 광고가 올라와 있었다. 근데 특이한 것이 하나 있었다. 보통 담임목사 청빙과 관련된 제출 서류엔 설교 CD나 파일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 교회는 설교 본문과 제목, 시간까지 지정해 주고 제출하라는 것이다. 같은 본문을 비교해서 들어보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물론 목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은 ‘설교자’이다. 하지만 담임목사는 ‘설교자’이기 전에, 그 교회의 영적 아비인 것이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상관 없이 그 교회의 영적 리더이며, 영적 아비로 부름을 받은 자인 것이다(딤전 4:12).

그래서 담임목사 ‘선발’이라고 하지 않는다. 담임목사 ‘청빙’이라고 부른다. 선발은 ‘여러 가운데서 어떤 대상을 가려서 뽑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청빙은 ‘부탁하여 부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러 지원자 중에서 제일 맘에 들거나 잘난(설교를 잘하는?) 목사를 선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교회를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고 이끌어줄 목사를 청빙(부탁하여 부름)하는 것이다.

선발인지, 청빙인지를 명확하게 하자. 청빙이라고 말해놓고, 과정과 절차는 선발하고 있다면, 솔직하게 ‘선발’이라고 말하자. 선발하면서 왜 청빙이라고 말하는가? 말 장난하지 말자. 정직하게 하자. 교회라는 조직을 잘 운영할 수 있는 CEO가 필요한 것인가? 교회라는 가족 공동체를 섬길 영적 아비가 필요한 것인가? 매니저가 필요한가? 목자가 필요한가? 설교만 잘하는 만담가를 찾는 것인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를 찾는 것인가?

So What?

얼마 전에 모교(S신학대학)에서 전화가 왔다. 학교 발전기금 조성을 위해서 화장품을 판매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모교를 위해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아 선뜻 구매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어제 팜플렛과 함께 남성용 화장품 세트가 택배로 도착했다. 근데 팜플렛에 있는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00신학대학를 세계적 기독교 명문대학으로!” 나는 이런 문구를 볼 때마다 질문이 생긴다. “So What?”, “그래서?”

세계적인 명문 학교로 키워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많은 후원이 들어오고, 좋은 건물들을 세우고, 첨단 장비가 들어간 강의실을 만들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석학들을 불러모으면 명문 대학이 되는건가? 단순하게 비난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짧은 그리고 제한적인 경험이지만 사람이란 것이 아무리 좋은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 준다고 헌신하고 훈련된 사람들이 배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환경의 지배를 더 많이 받고, 그것들 때문에 불평과 불만을 터뜨리고, 어려운 여건과 환경의 목회지나 선교지는 거의 가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공부하고 훈련을 받아야지 주님의 제자가 되고 헌신된 일꾼들이 된다는 말도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미 주류가 되어 있고, 주류가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더 성공하길 원하고, 더 명문(?)이 되길 원하고, 더 높아지길 원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주님이 말씀하신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좁은 길로 가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 될 것이다. 헌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힘든 시대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질문하면 좋겠다. “So What?”

예배의 간극

복음자리교회는 제주 열방대학에서 20분 정도 떨어져 있다. 그래서 주일예배 때 훈련 받으려 오신 학생 분들이 자주 방문을 한다. 지난 주에도 몇 분들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근데 예배 후에 어느 분이 피드백(feedback) 몇 가지를 나누어 주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자녀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 어려운 마음을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그 분은 예배 시간에 어린 자녀들이 돌아다니고, 약간의 소란을 피우는 것이 어려우셨던 것 같다. 예배는 항상 정중하고 조용하게 드렸는데 복음자리교회 주일 예배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커다란 오해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주일학교 시스템이 생긴지는 150년도 되지 않았다. 즉 교회 안에 어린이 부서가 생기고 자녀들이 따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지는 얼마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 오랜 시간동안(1,800년이 넘게) 어른들과 자녀들은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런 차원에서 필자는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한국교회 안에 해결 해야할 문제 중에 하나가 세대 간에 너무 크게 벌어진 예배의 간극(관계 속에서 생기는 입장이나 의견의 차이)이다.

60~70대와 그 자녀 세대인 30~40대의 예배 간극이 너무 크다. 또한 30~40대와 그들의 자녀들인 10대와의 예배 간극이 너무 크다. 심지어 주일학교도 너무 세분화 되어 있다.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청년부 등으로 세밀하게 나누어 놓았다. 더 나아가 젊은이 예배, 구도자 예배, 찬양 중심의 예배, 전통예배 등등 다양한 예배가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 교육학이나 경영학, 마케팅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전부는 아니다. 일부가 그렇다는 말이다). 발달과정 별로 구분하거나 세대 별로 구분하여 그 대상에 맞는 예배를 셋팅하고 프로그램을 돌리는 것이다.

이것도 나쁘진 않다. 어느 정도 효과도 있고 열매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든다. 그것은 가정 중심의 신앙 통합, 영적 유산(영적 축복)이 부모를 통해 자녀들에게 흘러가는 것을 끊어 놓는다는 것이다. 만약 각 가정에서 가정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20년 가까이 부모와 제대로 예배를 드려보지도 못하고 성인이 되어 버린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지난 주에 어떤 말씀을 들었는지도 모른채 10년, 15년을 보내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신앙적 공통분모가 거의 없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너무가 처참하다.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한 영적 책임감을 상실해 버린다. 그저 눈에 보이는 교회생활(주일성수, 헌금, 임원 활동, 수련회 참석 등등)만 열심히 하면 내 자녀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그들을 거의 방치한다. 또한 부모 세대에게 주신 영적 유산이 자녀들에게까지 흘러가지 않는다. 마치 여호수아 세대와 그 다음 세대 가운데 일어난 일들이 똑같이 오늘날 가정들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대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사사기 2:7~10)

이것이 너무 극단적인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곰곰하게 생각해 봐야할 것이 있다. 한국교회는 지난 30~40년 동안 주일학교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엄청난 인력과 재정을 쏟아 부었다. 주일학교를 부흥, 성장시켜야 한다는 목표 아래 엄청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혜택을 누리고 경험한 사람들이 지금의 30~50대 사람들이다. 하지만 교회 안에 가장 잃어버린 세대가 지금의 30~40대 사람들이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의 견해는 성경적인 신앙 전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지식은 전달되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되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아가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실제적으로 배울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인격적인 관계와 삶을 통해서만 전수되기 때문이다.

마치 수많은 가정과 관련된 책들을 섭렵하고 가정에 대한 다양한 세미나와 학교들을 수료했다 할지라도 육신의 부모가 보여준 그대로, 은연 중에 보고 배운 그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시간을 따로 할애한 적도 없다. 가만히 앉혀 놓고 집중적으로 가르쳐준 것도 아니다. 그냥 부모의 양육을 받고 함께 생활하면서 무의식 가운데 보고 배운 것이다. 그래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 남편과 아내가 되고, 자녀를 낳아 아빠와 엄마가 되면, 자신의 육신의 부모와 똑같이 행동하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런 것들을 왜 잘 전수가 되는데, 신앙은 부모에게서 자녀들에게 전수가 잘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필자는 그것에 대한 가장 큰 원인이 잘못된 주일학교 시스템과 너무도 벌어진 예배의 간극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책임은 벌어진 예배의 간극을 어떻게 최소화 하느냐이다. 어떻게 그것을 메우느냐이다. 우리는 지금 더 이상 방치하면 안되는 심각한 상태까지 와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무엇이라도 시작해야 한다.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다. 그것을 두려워 하면 안된다. 중요한 것은 당장 무엇이라도 계속해서 시도해 보는 것이다. 복음자리교회는 그런 차원에서 온가족 예배를 드리고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하고 시도하려고 한다. 그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고 어려운 문제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이기 때문에 타협하거나 사람들의 기분에 맞추어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지금 당장은 어떤 변화나 열매가 없는 것 같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갈 것이다. 혹시 동일하게 고민하는 분들이나 좋은 사례들(경험들)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을 통해 교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신앙의 전수가 교회 안에 있는 가정마다 일어나는 역사를 끊임없이 보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