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왕국과 거듭남

2019년 5월 12일 주일 설교 동영상

말씀 : 요한복음 3:1~7
제목 : 하나님의 왕국과 거듭남
설교 : 이상준 목사(복음자리교회)

**이번 설교에 도움이 된 책은 짐 월리스의 ‘회심’입니다. 혹시 이 부분에 대해서 더 공부하길 원하시는 분은 리처드 피스의 ‘신약이 말하는 회심’도 함께 읽으시면 좋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시고, 어떤 일들을 하실 것인지를 믿는 것이 중요하다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4:53~65

  1.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계획은 명절(유월절/무교절)이 지난 후에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들(가룟인 유다의 배반)이 벌어져 명절을 앞에 두고 예수님을 급박하게 체포하게 되었다. 아마 그들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명절이 끝나면 여러 가지 음모와 계획을 세워서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예수의 제자 중의 한 명이 제 발로 찾아와서 예수를 넘기겠다고 하니 이 기회를 어찌 놓치겠는가? 그래서 급박하게 예수님을 체포하고 어설프고 엉성한, 명분 쌓기의 재판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 재판은 시작하자마자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증거도 마땅치 않고 참여한 증인들의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못했다. 적어도 율법에 의하면 두 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증인들의 증언 조차도 서로 달랐다는 말이다.
  2. 이것은 분명히 급하게 거짓 증인들을 세웠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공정한 재판에는 관심이 없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 상황들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조작하고 거짓으로 증인들을 세우고, 그냥 형식적인 절차들을 밟아갈 뿐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거짓과 미움과 증오, 자신들의 종교적 카리텔을 지키기 위한 더러운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3. 그런 억울하고 안타까운 재판의 현장 속에서 예수님은 계속 침묵을 유지하신다. 그들의 거짓 증언을 눈 앞에서 보고 듣고 있는데도, 그들의 여러 가지 고발과 질문 속에서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아무 대답도 반응도 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길을 가기로 결정하셨다. 자신을 변호할 마음이 전혀 없으시다. 다만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이다. 대제사장이 질문을 던진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인자란 다니엘서에 예언된 메시아의 호칭이다. 그 인자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을 것이며 다시 최후 심판을 위해서 오실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그들에게 던지는 예수님의 마지막 경고일지 모른다. 자신의 정체을 명확하게 드러내시고 자신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지를 정확하게 밝히심으로 말이다.
  4. 하지만 그들은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나 돌이킴이 아니라 신성모독이라고 외치며 예수를 사형 시켜야 한다고 외치며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린다.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빌미로 사용한다(왜 예수님은 그런 빌미를 제공하셨을가? 그들이 그렇게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치 못했을까?). 사형을 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도 상황을 잠잠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제공해 준 것이다. 끝까지 침묵을 지키셨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다른 질문에는 답하지 않으시다가 그 질문에 왜 그런 답을 하셔서 그들에게 그런 빌미를 제공하신 것일까? 물론 그렇다고 예수님이 거짓을 말하신 것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메시아)이시다. 다니엘이 예언한 인자로서 종말을 이 땅에 실현하실 분이시다. 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전혀 인지하지도 믿지도 않았다.
  5. 우리는 다시 예수님의 대답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구약에 약속된 그 메시아임을 인정하시곤 바로 재림과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말이다. 예수님은 종말을 실현하기 위해 오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다. 구약에 약속된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실현하고 최종적으론 그 왕국을 완성함으로 종말을 이 땅에 가져오실 것이다. 이것이 주님 앞에 가져야할 우리의 믿음이다. 이 땅의 왕국이 영원한 것 같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파국과 종말을 가지고 올 최종 심판의 주님이시다. 그것을 인식하고 주님 안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지고 온다. 지금 종교 지도자들은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 버렸다. 그들은 분명 예수님이 모든 권세를 가지고 다시 오시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때는 아무런 핑계도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이루어질 것인지를 아는 것이고 믿는 것이다. 그것이 이 땅에서의 삶을 결정짓는다.

왕국 백성의 삶, 제자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Love God, Love People Mark 12:28-34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2:28~34

  1. 율법학자들이 와서 예수님과 사두개인들이 논쟁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두개인들에게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다. “모든 계명들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신다. “첫째로 중요한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네 마음과 네 목숨과 네 뜻과 네 힘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은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계명은 없다.” 그러자 이 율법학자가 대답한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말씀이 옳습니다. 온 마음과 모든 지혜와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더 중요합니다.”
  2. 이 율법학자가 던진 질문은 계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계명(곧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두 가지로 정의하심으로 대답하신다. 많은 계명들이 존재하고 다양한 가르침들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말씀을 다시 살펴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으뜸되는 본질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강조하신다. 이것이 구약의 신앙관의 핵심이다. 창조주, 전능자, 지존자, 목자, 안식처, 거룩하신 분 등등 다양하게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지만, 그 하나님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다른 경쟁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출발하며, 모든 영광과 능력과 부와 지혜와 능력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으며, 비교할 수 없고 비교될 수 없는 가장 거룩하고 지존하신 분이시다.
  3. 그런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응과 응답은 다양할 수 있다. 예배와 기도, 찬양과 경배, 헌금과 봉사 등등.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집약하신다. 그것도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마음이란 내면 세계의 모든 것을 의미하며, 목숨은 생명을 의미하고, 뜻이란 이해와 지혜, 지성을 의미하며, 힘이란 육체가 가진 능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모든 인격과 삶, 존재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신다. 형식과 구체적인 행위는 두 번째이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을 온전히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웃 사랑으로 확대되고 전이 된다. 이것은 구분될 수 없고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 사랑이 따로 존재하고 이웃 사랑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4. 이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이런 대답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재해석과 적용을 한다. 율법에 나온 번제물이나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율법학자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를 칭찬하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하나님 왕국으로부터 멀리 있지 않구나” 정확히 말하면 아직 하나님 왕국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 입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겐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는 율법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했고 깨닫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형식과 종교성에 빠져 있을 때 그는 율법이 정말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하나님 왕국에 들어가진 못했다. 바로 코 앞까진 와 있었다. 그럼 이 사람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본문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니 추측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없다는 것이다. 이 율법학자는 예수님을 여러 선생 중의 한 분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5. 율법학자는 율법의 본질을 어느 누구보다 정확히 이해했고, 그 사람 안에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 앞에 계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이심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어떤 율법적인 행위들보다 소중하고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사랑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 자신 앞에 서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마가복음에 나오는 제자도의 모습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제자도란 하나님 왕국의 삶을 의미하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삶 가운데 실현하는 방법이 마음과 묵숨과 뜻과 힘을 다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이웃들을 사람하고 섬기는 것이다. 군림하거나 머리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 종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왕국의 삶이다. 이 왕국을 이 땅에 가져 오시는 분은 예수님이시지만, 그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그 분을 따르며 왕국 백성의 삶을 사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겸손한 만왕의 왕 예수

묵상한 말씀 : 마가복음 11:1~10

  1.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계속 강조하신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영광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이 기다린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시며 그 길을 걸어가신다. 그런 예수님이 갑자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걸음을 멈추시더니 두 제자를 가까운 마을 안으로 보내시며 말씀하신다. “저기 보이는 마을로 들어가라. 그곳에 들어가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하나가 있을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서 이리로 끌고 와라. 만약 누가 ‘왜 이러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필요하시니 쓰고 제자리에 갖도 놓겠다’고 하라.”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느 문 앞에 새끼 나귀가 매여 있었다. 그래서 주인이 허락도 없이 나귀를 풀고 있는데 거기에 서 있던 사람들이 왜 나귀를 주인의 허락도 없이 가지고 가는지를 묻는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일어준 말로 대답하자 그 사람들이 허락해 주었다.
  2. 우리가 여기서 던져야 하는 질문은, “왜 예수님은 갑자기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새끼 나귀를 타야겠다고 하시는가?” 한 가지 명확한 것은 당시 예수님의 인기는 절정을 치닫고 있었으며,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소문이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제자들은 왜 자리 다툼을 벌이는 것이며, 왜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려고 하시며, 사람들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할 수 있었단 말인가? 지금 갈릴리에서 출발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으며, 제자들은 이 결론이 메시아로서 왕위에 오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계속해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을 것과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가르치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그들이 오직 기대하는 것은 메시아로서의 영광을 얻으실 때 누가 그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것인가였다.
  3. 이 사실은 소문으로 이미 여러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있었다. 능력과 기적을 베푸셨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다? 그것은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정치적 메시아가 왕위에 등극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자신의 겉옷을 깔아 드렸고, 나뭇 가지를 꺾어 와 길에 깔기도 하였다. 이것은 왕의 즉위식과 연결된 행동들이다. 더 나아가 그들은 그런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호산나! 복이 있으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여! 복이 있도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은 명백하다. 정치적 메시사가 와서 다윗의 왕국을 회복할 것을 기대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행해서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외친다. 자신들이 처한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구원해 주시길 기대했고 소망했다. 구약의 예언과 약속이 이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다.
  4. 당시 대부분의 지도자들(왕, 장군 등등)은 몸집이 큰 노새를 탔다.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드러내고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겸손히 작은 새끼 나귀를 타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당시 자신을 환영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였다. 그들이 기대하던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권력과 부와 명예를 가져다줄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미천하고 나약한 왕으로 입성하고 계신 것이다. 그 분은 곧 종교 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이방인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너무도 무능력하게 죽을 것이다. 그것이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이유였다. 진짜 왕이시고 진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가장 겸손하게 왕의 즉위식을 시작하고 계신 것이다. 세상 지도자들과는 다른 방식의 즉위식,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자신을 따르는 열두 제자 외에는 어떤 군대도 조직도 없었다. 예수님은 지금 점령군으로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다. 섬기기 위해 자신을 목숨을 내어주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이다.
  5. 계속해서 말하지만, 하나님 왕국은 이렇게 임한다. 점령군으로 군대를 이끌고 입성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왕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계신 것이다. 그 분은 왕이시고 창조주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가장 연약하고 나약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입성하고 계시다. 오늘날 다원주의 사회, 후기 기독교 사회, 후기 포스트 모던니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기독교 국가를 이루겠다고 십자가군처럼 권력과 힘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가? 힘으로 모든 반대 세력들을 제압하고 기독교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가? 그것이 하나님 왕국인가?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고 뜻인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우리는 겸손히 섬김으로 다스리는 자이고, 낮아지고 연약해짐으로서 하나님 왕국을 임하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겸손으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어 가시는 예수님을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