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의 비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성경이 개인의 삶에 대해서 디테일 하게 말씀하고 있고,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개인의 스페셜한 부분까지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성경은 개인의 스페셜한 부분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다(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대학이나 직장에 가야 하는지,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이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저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대신 하나님의 스페셜한 뜻과 계획,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스페셜한 행위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성경은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 분이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며, 그 뜻을 어떤 내용과 방법으로 계시하시고 성취해 가시는지를 이야기함으로 그 이야기를 읽는 독자를 초청하는 책이다.

이것을 또 다시 쉽게 푼다면, 성경은 개인의 이야기엔 별로 관심이 없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계신다. 그뿐 아니라 개인의 이야기에 초점 맞추어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이야기에 각 개인들을 초청하신다. 그러니까 각 개인의 이야기에 하나님을 영접하고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이야기에 개인들을 초청하고 계신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이야기에 자신을 드리고 순종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명확해져야 한다. 그래야 개인의 이야기,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준비가 된 것이다. 이것이 명확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 할 때 심각한 오류가 발생하고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다. 하나님이 마치 한 개인의 계획과 야망과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램프의 요정 지니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영접한다, 거듭났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 왕국의 복음 이야기를 바르게 인지하고, 그 이야기에 자신의 모든 삶을 드렸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 분을 따른다는 것도 동일하다. 자신의 온 삶을 드려 하나님 왕국의 복음 이야기를 성취하신 예수님처럼, 이제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를 위해 자신의 온 삶을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도이고 성경이 말씀하는 성경적인 신앙생활이다.

이것이 명확해지면 개인의 취업이나 진로, 결혼 등등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음 이야기에 자신의 삶을 드린 자를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개입하셔서 인도하시고 성령과 기록된 말씀으로, 기도 가운데, 교회 공동체와 환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어떤 이야기로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나의 이야기로 살 것인지, 하나님의 이야기로 살 것인지!

하나님의 음성과 일과 성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때 가장 큰 오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니 잘 될거야, 성공할거야, 어떤 기적과 능력이 나타날거야, 재정적인 어려움들이 금방 해결될거야 등등 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그런 것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인도해 가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성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주 그 사람의 성품을 테스트 해 보십니다. 그 사람의 믿음을, 그 사람의 충성을, 그 사람의 사랑과 그 사람의 온유를,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태도와 반응을 살펴보십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결과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과에 집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을 따르고 섬기려는 마음보다는 그 결과를 통해 나의 어떠함을 드러내고 싶고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그 분의 음성에 대해서 말하지만 사실은 그 하나님을 통해서 자신의 명성과 성공과 안락함을 유지하고 성취하고 싶은 것입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지만, 더 깊은 동기는 하나님 보다는 자신이 더 주목받고 드러나길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비난하는 글이 아니라 제 자신이 그러했다는 것을 고백하는 글입니다. 교회 개척을 제안 받고 1년 가까이 하나님의 음성과 인도하심에 대해서 여러 채널을 통해 확인함으로 교회 개척으로 이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작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큰 시련이 닥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하나님께 매일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개척을 했는데 왜 이런 일들이 저에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하나님의 침묵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시작한 개척이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려워야 하는지, 왜 통제되지 않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길이니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매일 경험되는 현실에서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분과 같았습니다. 그때 저에게 조금씩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배와 기도와 말씀 묵상하는 삶이 무너져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배워갈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시선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환경,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그 분의 성품과 본질을 더 알아가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더 집중하고 묵상하는 삶을 쉬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가 기대하는 결과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면 예배나 기도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멈추어 버리고,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음성을 바르게 들었는지 의심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과 우리는 관점이 참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나 벌어지는 상황, 사람들의 평가나 말에 예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성품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대신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멋있는 사역을 하는지, 우리의 설교에 사람들이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헌신들을 하고 있는지 별 관심이 없으십니다. 진짜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성품입니다. 왜냐하면 그 성품이 사역의 질과 결과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쉽고 빠르게 결과를 보기 원하고, 그 결과로 존경과 명성과 권력을 가지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환경과 사람이라는 도구로 우리의 성품을 다루시고 만지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시길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사역이 시작되고, 그것을 통해 사역의 열매가 맺혀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확장하면, 많은 사람들은 일을 위해, 사역을 위해, 어떤 탁월한 결정을 위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과 관계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 그리고 사람을 섬기기 위해 그 분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관계 한다는 것이고, 관계 한다는 것은 인격체와 인격체 사이에서 교류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하나님은 지정의를 가지신 인격체이십니다. 물론 인간과는 본질 자체가 다른 분이시지만). 바로 그때 성품의 개발되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성품은 관계를 통해서만 개발되고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 분의 성품을 경험하게 되며, 그 분의 성품을 배우고 닮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길(방법)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역사에 동참하게 됩니다. 사역이란 개념은 이때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사역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그 분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의 성품이 다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직통 계시가 뭐 어째서!

계시(Revelation) :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을 직접 드러내시거나 알리시는 것을 말한다(마 16:17; 롬 16:25~26). 헬라어로는 ‘아포칼립시스’(apokalypsis)로 원뜻은 감추어져 있고 덮여 있던 것을 직접 열어보거나 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비전성경사전, p.36).

1. 쉽게 말하면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 등을 알려주시는 것을 ‘계시’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의 마음 안에 있는 생각과 의지, 뜻과 감정들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시기와 장소와 방법을 결정하셔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계시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모든 행위를 통칭하는 신학적인 용어이다.

2.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선택된 특별한 사람들을 통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계시하신다. 또한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방인을 통해서도 계시하시고 심지어 당나귀 같은 동물을 통해서도 계시하신다. 신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시며, 또 다른 보헤사로 오신 성령님님을 통해서 성도들 안에서 계시하신다.

3. 특히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차별(구별) 없이 모든 성도들 안에 계시하신다. 그것을 명확하게 약속한 말씀이 사도행전 2장 17절과 18절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4. 예언과 환상과 꿈은 구약에서 특별하게 선택된 하나님의 종들에게 계시하실 때 사용된 방법들이다. 하지만 신약에 와서는 그것이 일반화 되었다. 이제는 모든 육체에게 – 자녀들, 젊은이들, 늙은이들, 남종과 여종들에게 – 그런 계시의 사건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특별’에서 ‘일반’으로 옮겨가는 역사라는 것이다.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만이 계시의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뜻을 알 수 있었다면,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이다.

5. 그러나 신학자들은 성경의 정경화 과정이 종료되면서 모든 계시도 함께 끝났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시지 다른 방법을 통해서는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계시’라는 단어를 매우 협소하고 조심스럽게 사용하라고 종용한다. 아무나 계시를 운운할 수 없다고, 그런 사람들은 소위 ‘직통 계시’를 받는 자들이라고 비난한다.

6. 직통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두 지점 사이에 중계가 없이 바로 통함”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 3자의 도움 없이 당사자들이 바로 연결되어 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구약에서는 직통이 없었다. 가끔 모세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과 직통으로 대화하긴 했지만, 대부분이 중계자(제사장, 선지자)의 도움을 받았다.

7. 신약으로 오면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난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과의 직통 계시를 말씀하신다. 그것을 들은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한다. 또한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을 받은 사도들의 삶과 사역을 통해 직통 계시의 역사들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하나님이 계신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완전한 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가능하다. 지금은 비록 거울을 보는 것 같지만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은 계속해서 계시하신다.

8. 이것은 성경의 권위와 상반되지 않는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는다. 성령의 성경의 저자들 가운데 역사하셔서(영감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하셨음과 살아계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그 성경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계심을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경을 정경(正經)이라고 부른다. 정경이란 라틴어로 ‘Canon’인데, 이 단어는 헬라어 ‘카논’이란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막대기’,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리하면, 정경이란 기준이 된다는 의미이다.

9.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 분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떤 일들을 행하셨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현재 우리의 삶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신 구원을 어떻게 완성해 가시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된 이유는 그 안에 갇혀서 문자에만 매달리는 자들이 되라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의 역사 가운데 일하신 하나님, 자신을 열심히 계시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성도들의 삶 가운데 계시하시며 일하시고 계시므로, 성경을 통해 그 하나님을 찾아가고 발견하고 교제하고 동행하라는 것이다.

10. 지금까지 ‘직통 계시’라는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하였다. 하지만 신약의 역사가 직통 계시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 것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누구든지 하나님이 계신 보좌 가운데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던 죄인이, 하나님의 임재를 감당할 수 없는 죄인이 십자가의 은혜로 죄 용서함을 받아 거룩하신 영 –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그 분의 성전이 되지 않았나! 제발 ‘계시’라는 단어를 특별한 단어로 만들지 말자.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을 기쁘게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지금도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Prayer Walking (1) : 기업과 경계

3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4 너희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들의 기업에 따라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수18:3-4)

1. 어제 말씀 묵상 시간에 주시는 마음이 있어서, 오늘 공동체 지체들과 오랜만에 ‘Prayer Walking’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어느 분에게 불편한 표현이겠죠? 그렇다고 저를 신사도주의자라고 비난하진 마세요).

#Prayer Walking : 우리 말로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요? 많이들 ‘땅밟기 기도’라고 하시는데, 그것은 올바른 번역이 아닙니다(제가 속해 있던 선교단체에서 그렇게 번역을 했는데, 지난 실수를 인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가길 바랍니다). 그것으로 인해 많은 오해와 오류가 있었지요. ‘기도 산책’, ‘기도하며 걷기’ 정도가 좋을 것 같습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는대신 기도가 필요한 현장에서 오감을 동원해 보고 듣고 느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신 밟기’와 같은 샤머니즘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안타까운 것은 외국에선 참 좋은(건강한) 동기와 목적으로 시작된 사역들이, 한국에만 들어오면 이상하게 변질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사역들 안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한국 사람들의 심성 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2. 성령님과 함께 걸으며,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끼며, 제주와 복음자리 공동체를 위해 중보기도 하고, 축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3. 그러면서 다시 한번 하나님이 저희들 안에 어떤 일들을 행하고 계시는지 확인하고, 믿음의 발걸음을 어디로 내딛어야 하는지 조사하고, 성령님의 내적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4. 8월 한달 동안 이런 시간을 자주 가지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자리 공동체가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여호수아를 묵상할 때마다 주시는 마음(질문) 중에 하나는, 각 지파 별로 기업을 주셨으며, 그 경계를 명확하게 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계속 질문을 던졌습니다. “복음자리교회에게 주시는 기업과 그 경계는 어디이며 무엇일까?”

5. 오늘 제주시 이곳 저곳을 직접 발로 밟으며, 그곳에서 기도하며, 지난 3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광야가 끝났으니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 “믿음으로 나아가서 개척하라!”, “주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나아가라!”

6. 주님은 복음자리 공동체에게 새로운 시즌을 허락하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일어나 취하고 믿음으로 싸워야 하는 시간들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머뭇거리지 말고, 지체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두려워 하지말고, 주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