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제사

묵상한 말씀 : 히브리서 10:1~10

1. 히븨리서 저자는 율법의 한계를 명확히 말한다. 율법은 앞으로 다가올 것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실체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율법은 그 실체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마다(때마다) 끊이지 않고 똑같은 방식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제사에 참여하는 자들을 결코 온전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율법으로 온전해질 수 있다면 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리겠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율법으로는(정확히 말하면 율법이 제시하는 제사 방법으로는) 단번에 정결하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문제를 ’기억’으로 설명한다. 해마다 대속죄일에 드리는 대제사장의 제사 – 모든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 제물의 피를 뿌리는 행위 자체가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며, 그것을 통해 다시 죄를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다. 결론은 황소나 염소의 피가 죄를 온전하게(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한적이다.

2.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시편 40:6~8을 인용한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다윗의 고백일뿐 아니라 예수님의 직접적인 고백이며 결단이다. 그 내용은 두 가지이다. (1) 하나님은 동물의 제사 – 그것이 번제이든 속죄제이든 – 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2) 그렇기 때문에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직접 오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에 정해진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한 가지를 명확하게 정리해야 한다. 하나님이 뜻은 ‘순종’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죄는 불순종이다. 불순종은 단지 무엇을 행하였느냐 행하지 않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멀어졌기 때문에 불순종하게 되었다.

3. 그러므로 시편 40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강조하는 포인트는 바로 ‘순종’이다. 하나님이 제물과 헌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도 않으시고 기뻐하지도 않으신다. 대신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그 분의 뜻을 행하는 것,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불완전한 첫 번째 것을 폐기하고, 완전한 두 번째 것을 세우시기 위해 오셨다. 그것을 성취하고 완성하시기 위해서 친히 육체로 오셔서 자기의 몸을 드리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거룩이란 어떤 상태만을 말하는 형용사가 아니다. 거룩이란 순종을 동반하는 동사이다. 소극적으로 죄를 용서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적극적으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몸을 온전히 드리는 순종을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드려 그것을 이루셨다면, 우리는 그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자로서 다시 우리의 몸을 드려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그저 예수님의 희생을 볼모 삼아 우리의 죄만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절대 아니다.

4. 다시 말하지만 죄의 용서와 해결이 최종 목적이 아니다. 그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단지 죄의 용서만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진짜 목적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삶을 선택하고 결정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원하시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비난하며 죄를 드러내고 고발하지만, 그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죄의 문제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 십자가가 단순히 사죄와 용서의 메시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완벽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묵상한 말씀 : 히브리서 7:23~28

1. 히브리서 저자는 계속해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과 멜기세덱의 계통으로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있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음 때문에 그 직책을 계속(영원히)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수가 많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사시는 분이시므로 제사장직을 영원히 누리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인간의 유한함을 가지고 있다면, 영원히 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변함없이 언제나 그리고 끝까지 제사장직을 누리고 계시다는 것이다.

2. 이것은 엄청난 결과로 연결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온전히 구언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언제나 살아 계셔서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실 수 있고, 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분이시기에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존재하시고, 중보하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3.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흠이 없고 죄인들과 구별되시며 하늘보다 높은 곳으로 오르신 –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처럼 자신의 죄를 위해서 그 다음에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날마다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자신을 드려 속죄의 문제를 완전히 이루셨다. 율법은 이렇게 완전하지 못하다. 이것은 율법 자체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말이 아니라 율법을 받은 인간이 완전하지 못한,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4. 하지만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심으로 세워진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영원히 존재하시고, 거룩하시며, 죄가 없으시고,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분으로, 자신의 몸으로 제사를 드려 속죄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신 분이시다. 그렇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약점이 없는, 부족함이 전혀 없는, 완벽한 구원자이시며 대제사장이시고 중보자이시며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오직 그 분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 보좌 앞에 나아감으로 놀라운 은혜와 도움과 긍휼을 맛볼 수 있다. 그래서 핍박 가운데서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중보하시고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5.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다. 그 분이 진짜 누구신지를 아는 깊은 성경적 지식과 이해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그것이 바탕이 되어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도우심, 그 분의 임재 가운데 나아가 연약한 인간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시는 그 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 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 믿음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누구나 그 분의 보좌 앞으로 설 수 있다. 그런 특별한 은혜를 맛보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 은혜가 있어야 매일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있다. 만약 우리에게 그런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금방 탈선하게 된다.

영원한 왕,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묵상한 말씀 : 히브리서 7:1~10

1. 7장부터는 본격적으로 멜기세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앞에서 이미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밝혔는데, 그 이유를 성경적/신학적으로 풀어주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가장 먼저 멜기세렉의 정체에 대해서 설명한다. 멜기세덱은 살렘 왕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또한 창세기 14:17 이하를 인용하면서 이방 다섯 왕들의 연합군을 쳐부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축복했고, 그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고 ‘평화의 왕’으로서,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다는 것이다. 생애의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항상 제사장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2. 여기서 강조점은 멜기세덱과 예수 그리스도의 유사점이다. 멜기세덱은 영원한 존재라는 것이다. 누구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어떤 가문이나 혈통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생의 존재가 바로 멜기세덱인데, 예수 그리스도도 그런 존재이다. 또한 누구에게서 임명을 받아 세워진 제사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제사장으로 존재했고 변함이 없는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도 동일하다. 아론의 계열을 따라 제사장이 되는 자들은 처음부터 제사장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임명을 받아 세워진 제사장이다. 하지만 멜기세덱과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 마지막으로 이름의 유사점이 있다. 멜기세덱이란 이름에 ‘의의 왕’, ‘평화의 왕’이란 의미가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도 의의 왕이시며, 평화의 왕이시다.

3. 4절부터는 본격적으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과 멜기세덱을 비교한다. 그 내용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십일조와 둘째는 축복이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입조를 드렸다. 더불어 율법을 보면 레위 자손도 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받게 되어 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이것이다. 레위 자손들은 율법을 통해서 제사장으로 세워졌고 그것으로 인해 십일조를 받게 되어 있지만, 멜기세덱은 그런 율법이 존재하지도 않은 때에 제사장으로 존재했고 십일조를 받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는데, 레위 지파의 조상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그렇게 보면 레위(지파)도 아브라함을 통해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4. 멜기세덱은 십일조만 받은 것이 아니다. 십일조를 받기 전에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었다. 누가 누구를 축복한다는 것은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했다는 것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 보다 윗 사람(권위자)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 바로 앞에서 언급한 원리가 다시 적용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다. 그 후손 중에 레위와 레위 지파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했다는 것은,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뒤에 세워진 레위 지파 제사장들보다 훨씬 윗 사람이라는 것이다.

5. 이것을 다시 종합하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멜기세덱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계통을 이어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이다. 더불어 제사장이실 뿐만 아니라 왕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의 왕이며 평화의 왕이시다. 명예와 영광과 권위와 능력을 지니신, 변함이 없으신, 시작도 끝도 없으신 영원한 왕이시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우리가 믿고 섬기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시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약속과 위로와 소망

묵상한 말씀 : 히브리서 6:13~20

1.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공동체를 계속해서 격려하기 위해 구약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예로 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없기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아브라함에게 맹세(약속)을 했다. “내가 반드시 네게 복을 주고 또한 너를 번성케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약속은 금방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과정들이 필요했다. 아브라함은 그런 시간들을 오래 참고 견딘 후에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했다.

2. 동일하게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존재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쟁을 그치고 그 약속이 확실하고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일하게 하나님도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도 약속을 상속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불변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냥 약속만 하신 것이 아니라 맹세까지 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세상에서 피하여 나온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3. 그렇다! 성도들에겐 이런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은 안정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은 것이다. 닻이란 무엇인가? 배가 한 곳에 머물게 하기 위하여 줄을 매어 물 밑바닥으로 가라앉히는 갈고리가 달린 제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엉뚱한 곳으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성도에게 소망은 닻과 같은 역할을 한다. 또한 소망은 성도들을 휘장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여기서 휘장이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커튼을 의미한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으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오직 1년에 1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성도들 앞서서 달려가신 예수님은 멜시세덱의 계열을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성도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4. 정리하자. 성도들은 구원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다. 그 약속은 단순히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그런 차원의 약속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걸고 맹세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성취된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성도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 소망을 주고 위로를 준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위로를 얻고 소망을 가질 수 있다. 특히 성도들에게 있어 소망이 중요하다. 소망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기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그것이 성도들에게 가능한 이유는 앞서 달려가신 예수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

5.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기에 히브리서가 계속해서 다시 설명할 것이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은 단순히 중보적인 역할만을 하신다는 의미 이상이다. 소극적으론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는 것이지만, 적극적으론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임재 안에 거할 때 진정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앞서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다른 말로 하면 붙잡는 것이다). 그 분을 좇을 때에만 약속의 성취를 경험할 수 있고, 큰 위로와 소망을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