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2015.4.8) – 연합

networking묵상한 말씀 : 열왕기상 4:1~19
나에게 주신 말씀 : “솔로몬 왕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그의 신하들은 이러하니라…”(1~2a)

솔로몬과 함께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리더들의 명단이 나온다. 제사장으로는 아사리아, 사독, 아비아달, 사붓 그리고 서기관에는 엘리호렙과 아히야, 사관에는 여호사밧, 군사령관에는 브나야, 지방 관장 두령에 아사리아, 궁내 대신에 아히살, 노동 감독관에는 아도니람 그리고 열두 지방을 다스리는 관장들이 있었다.

어찌보면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한 나라는 한 지도자가 다스릴 수 없다. 그가 아무리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선물로 받은 탁월한 리더라 할찌라도 말이다. 왕과 함께 각자의 재능과 은사와 능력을 가지고 각 파트에서 일할 수 있는 일꾼들이 필요한 것이다. 솔로몬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준비된 사람들을 괸리로 세워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렸다.

아침에 조용히 질문해 본다. “이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길 원하십니까?” 그때 조용히 나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80~90년대는 교회 성장의 시대였다. 각 지역마다 경쟁적으로 대형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사역들이 추친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슈퍼맨과 같은 영웅들로 세워지지 않는다(과거에 우리는 그렇게 착각했다). 교단이나 교파와 상관 없이 많은 지역교회가 연합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 몸은 여러 지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의 지역교회만을 말하지 않는다. 원래 주님의 교회는 하나다. 교리적으로 교단이 존재하지만, 그리고 그 교단에 따라 다양한 교회들이 존재하지만, 그 교회들은 원래 하나다. 주님의 몸이다. 그런 교회들이 연합하여 몸을 이루어야 한다. 그럴 때 지역사회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각개 전투하기에 바쁘다. 서로 연합하지 않는다. 서로 네트웍(network) 되어 있지 않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10’이라는 역량을 가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푸념만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교회가 서로 연합하며 ’50’도 되고, ‘100’도 될 수 있다. 한 나라 안에 다양한 리더들이 각자의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섬기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그러해야 한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지역교회가 서로 연합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그 지역에 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듯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역사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혼자서는 안 된다. 독불장군은 필요 없다. 함께 연합하고 연결될 때 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역사가 이 땅 가운데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

척박한 제주도 땅도 마찬가지이다. 선교단체에도 있었고, 지금은 교회를 개척해서 지역교회를 섬기고 있지만, 의외로 다양한 재능과 은사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제주도 곳곳에 살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정말 안타깝다는 생각을 할 때가 참 많다. 이런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고 연합되면, 이 척박한 제주도 땅에서도 귀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 보내주셨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네트웍 되지 않았고, 연합함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의 교회, 자신의 사역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 관점을 가지고 눈을 좀 더 크게 떠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서로 연결되어 움직일 때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을 할 때 역사가 일어난다. 제발 연합하자. 자신만 바라보지 말자. 자신의 비전만을 주장하지 말자.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자.

말씀묵상(2015.4.7) – 참된 지혜와 분별

Wisdom-of-Solomon-25묵상한 말씀 : 열왕기상 2:16~28
나에게 주신 말씀 :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28절)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분별’하는 것이다. 어느 여인이 진짜 어머니이고 어느 여인이 가짜 어머니인지를 가려내는 것이다. 지식은 정보일 뿐이다. 오늘날 ‘정보가 힘이다’라고 말하지만, 정보가 힘이 아니라 ‘지혜가 힘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지혜는 어느 것이 가짜이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를 가려낼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런 지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예배할 때 부어지는 것이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로 서 있었을 때 은사(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따진다.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가? 어떤 것이 더 옳은 것인가? 어떤 것이 더 효율적인가? 그리고 그 기준은 정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가지고 그것을 결정짓는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가지고는 삶을 더 풍요롭게 하거나 생명을 살리지는 못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선악은 정보가 아니라 지혜를 통해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바른 분별과 판단을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한다.

21세기 과학 문명과 지식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다. 그 정보가 우리를 풍요롭게 하거나 인류 사회를 발전 시킨 것은 확실하지만 진정한 행복과 풍요, 생명을 살리는 역사는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바른 판단과 분별, 선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가 필요하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어느 것이 진정 생명을 살리는 것인지,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려낼 수 있는 힘은 오직 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우리의 삶 곳곳에 적용될 수 있다. 자녀 양육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것이 진정 우리의 자녀들을 행복하게 키우는 방법인가? 말씀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성장 시키는가?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하지만 어느 것이 우리의 목회와 교회를 생명력 넘치게 할까? 연일 교회 안에 다툼과 분쟁의 소식이 들린다. 무엇이 그 분쟁과 다툼을 그치고 치유하고 회복하게 만들까?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참된 지혜가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평강! 평강!

Thomas-and-Jesus-2묵상한 말씀 : 요한복음 20:11~23
나에게 주신 말씀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21절)

1. 첫 번째 평강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공식적으로 나타나신다. 제자들은 마리아를 통해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18절).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 속에서 모인 곳의 문들을 잠그고 있었다. 두려움은 그런 것이다. 한번 그 감정에 사로잡히면 해방되기란 쉽지 않다. 또한 전염성도 강해서 금방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그곳에 몇 명의 제자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모든 제자들이 여전히 두려움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곳에 예수님이 갑자기 등장하신다. 제자들은 모두 놀랐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평강’(샬롬)을 선언하신다. 손과 옆구리를 직접 보여주신다. 믿음도 없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손과 옆구리를 직접 보여주심으로 부활하신 것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두려움(불안, 염려, 걱정)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을 선언하신다. 그렇다! 제자들에게 그 상황 속에서 정말 필요한 메시지는 ‘평강’이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바로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강 가운데 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평강은 예수님이 진짜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오셔서 말로만 ‘평강’을 선언하시지 않으셨다. 직접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심으로서 자신이 진짜 부활하였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두려움이란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신호이다. 지금 이 환경이 나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느낄 때 두려움이 찾아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시며 믿음을 갖도록 인도하신다. 그것을 통해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주신다. 그때 진정한 평안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위험과 위기 가운데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는 늘 두려움이 있다. 그런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다. 제자들처럼 그 분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 분이 진정으로 살아계시며, 인간의 생사(生死)와 화복(禍福)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확인하는 것이다. 모든 주권과 영광을 가지시고 이 땅을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2. 두 번째 평강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다시 ‘평강’을 말씀하신다. “왜?”, “또?”라는 질문이 생긴다. 앞에서 분명히 평강을 선포하셨는데 왜 똑같은 말씀을 다시 하실까? 그런데 자세히 문맥을 살펴보면 19절과 21절을 전혀 다른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19절을 무대는 ‘두려움’이다. 21절은 다른 무대가 펼쳐진다. 21절은 ‘파송’이라는 무대이다.

두려움이 가장 큰 문제는 부르심을 받은대로 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해 도전하고 순종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밭잡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예수님은 가정 먼저 제자들 안에 존재하던 두려움을 처리해 주셨다. 그 다음은 부르심을 받은대로 나아가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다시 세상 속으로 보내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21절을 또 다른 평강이다. 평강이란 내용은 동일하다.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두 번째 평강은 보냄을 받은 자에게 부어지는 평강이다. 지금 제자들은 어느 집에 모여서 문을 닫고 지내고 있다. 이젠 그들은 그 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반대하고 거부하며 심지어 핍박하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들은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평강이다. 어떠한 반대와 거절, 내적이며 외적인 압박, 핍박 속에서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평안함 가운데 거하는 것이다.

이 평강은 성령님의 임재와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째 평강을 말씀하신 후에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거절과 반대, 핍박 속에서도 평강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성령충만함이다.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내주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럴 때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이 가능하다. 참된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다. 성령 안에 거할 때 평강이 찾아오고, 평강할 때 담대함이 오는 것이다.

그럴 때 제자들은 죄의 문제를 바르게 다룰 수 있다. 자신 안에 평강이 깨어져 있고, 성령 안에 살아가는 거룩한 삶이 무너져 있는데, 어떻게 세상 속에서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참된 용서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먼저 성령 안에서 평강해야 한다.

요즘 나는 여러 가지가 두렵다. 사람이 두렵고, 환경이 두렵다. 재정의 문제, 건물의 문제, 관계의 문제가 나를 두렵게 만든다. 그뿐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비신자들 만나야 하는 두려움도 있다. 교회와 목사를 욕하는 소리들, 기독교에 대한 신뢰가 바닥인 요즘 어떻게 그들 가운데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두렵기만 하다. 어쩌면 제자들이 집의 모든 문들을 걸어 잠그고 그 안에 모여 있었던 것과 같은 느낌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두려움 가운데 사로잡혀서 보냄받은 자로서 살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두 번이나 ‘평강’을 선포하신 그 예수님의 찾아오심이다. 그 음성을 듣는 것이다. “평안하라고, 성령을 받으라고, 내가 너를 다시 세상 속으로 보낸다고…” 인자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다시 듣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야 한다.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에게로 나아가야할 것이다.

“주님 저에게도 찾아와 주십시오. 두려워하고 있는 저에게도 찾아와 주셔서 평강을 선포해 주십시오!”

주도적인 삶

360_running_joints_1209묵상한 말씀 : 요한복음 18:1~14
나에게 주신 말씀 : “그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받아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11절)

예수님의 삶을 조용히 묵상해 보면 한 가지 명확한 특징이 보인다. 그것은 ‘주도적인 삶’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도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드리고 반응하고 순종하는 삶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상황과 환경에 끌려 다니지 않으셨다. 그 문제(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으셨다. 당당하게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리셨다.

오늘 본문도 그러한 내용이다. 예수님은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 동산으로 가신다. 유다가 그곳으로 로마 군인들과 대제사장들이 보낸 경비병들을 데리고 왔다. 예수님은 그들이 왜 오는지, 곧 무슨 일들이 일어날지를 알고 계셨다. 하지만 피하지 않으신다. 당당하게 예수를 찾는 자들에게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두 번이나 대답하신다. 또한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를 향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받아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삶이나 반응들과 비교해 보면, 나는 너무 수동적이다. 나는 자주 벌어지는 상황과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 무엇을 바라시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주저하고 머뭇거린다. 혼란스러워 한다. 자주 상황에 이끌리고, 사람들의 말에 흔들린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그러하지 않으신다. 상황을 주도하신다. 지금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명확하고 정확하게 아신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의 삶과 육체를 기쁨으로 드린다.

나는 이것을 ‘주도적인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스티븐 코비의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7 Habis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에서도 이것을 강조한다. 그의 책을 보면 첫 번째 습관이 바로 ‘주도적이 되라’이다. 하지만 단순히 성공적인 삶을 사기 위한 방편으로서 ‘주도적인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주도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함이다.

그럴 때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여기서 성공이란 그저 세상적인 기준에서 잘 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성공, 성경적인 성공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도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뜻이 하루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주님이 담대하게 그리고 온전히 자신의 모든 삶을 드려 주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삶을 살 필요가 있다. 닥쳐오는 상황과 한계, 도전과 공격 속에서도 뒤로 물러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굿굿하게 전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반응하며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주도적인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