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주님의 손에서 일어난다!

7878묵상한 말씀 : 요한복음 6:1~13
나에게 주신 말씀 : “예수께서는 빌립이 어떻게 하나 보시려고 이렇게 질문하신 것일 뿐, 사실 자기가 하실 일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6절)

예수님의 수 많은 기적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올 정도로 열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른다. 그 숫자가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었다. 적은 숫자가 아니다. 지금도 오천 명이라고 하면 상당히 많은 숫자이다. 교통이나 사회적 인프라가 거의 없던 당시를 생각해 보면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동했다고 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계신 곳은 아무것도 없는 산이었다. 사람들은 그곳까지 예수님을 따라온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필요를 아신다는 것이다. 비록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서 예수님을 좇아온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배고픔이나 먹지 못해 고단해 있는 상태를 아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상황을 아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것도 빌립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이것을 통해서 확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관점은 무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들을 통해서 제자들을 다루시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훈련 방식은 현장 중심이다. 교실에서 이론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역의 현장, 삶의 현장에서 질문을 던지신다.

몰라서 질문을 던지시는 것이 아니다. 인원이 얼마나 되고, 그들을 먹이려면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한지를 모르시기에 던지시는 질문이 아니다. 빌립보다 더 정확하게 아신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 제자들을 다루시고 훈련하시기 원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반응을 보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하시길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신다.

아마 빌립에게 질문을 던지신 이유는, 빌립이 제자들 중에 계산이나 숫적인 영역에서 빨랐던 것 같다. 상황 파악이나 분석이 명확하고 명석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계산이나 판단보다 위에 계시는 분이시다. 그것을 뛰어넘어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분이시다. 계산하고 분석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틀린 것도 아니다. 주님은 그것 때문에 빌립을 책망하시지 않으신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길 원하셨다. 다시 기억하자. 상황 파악이나 방법을 모르셔서 않으신다. 다 아신다. 다 하실 수 있으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 주님이 가르치시길 원하셨고, 다루시길 원하셨다는 것이다.

그때 안드레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나온다.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부족한 양이다. 안드레는 무엇을 기대하고, 무슨 생각으로 그것을 예수님에게 가지고 왔을까? 9절을 보면, 안드레는 별 기대가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을 통해 예수님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충분히 먹이고도 남길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예수님 앞으로 가지고 왔다. 이 사건을 보면 예수님은 꼭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시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별 생각이나 기대도 없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주님 발 앞에 드렸다는 것이다.

그렇다! 역사와 기적은 주님의 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나에게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 재능, 물질… 그것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한계가 명확하다. 그것을 가지고 계산을 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발 앞에 가져다 드리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꼭 기억하자. 기적은 주님의 손에서 일어난다. 나에게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감사의 기도(축사)를 드리신다. 그리고 그것을 원하는 만큼 나누어 주신다. 이 장면을 상상만 해도 놀랍다. 나누면 또 생기고, 나누면 또 생기고… 주님의 손에서 무한대로 재생산되는 것이다. 없어지고 사라져야 하는 빵과 물고기가 또 생기고 또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풍성하게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을 정도였다. 이것이 주님의 역사이고 능력이다. 주님은 풍성하게 주시는 분이시다. 채우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이 되는 것은, 초점은 무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있게 있다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들은 바로 제자들이었다. 무리들은 제자들이 가져다 주는 것을 먹었을 뿐이다. 그 빵과 물고기가 어디서 생겼는지 무리들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과정들을 바로 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면 또 생기고, 다시 가져다 주면 또 생기는 놀라운 기적을 제자들을 생생하게 목도한 것이다.

지도자의 섬김

washing-feet1오늘 주일예배 설교 때 섬김에 대해서 나누었다. 설교를 준비하며서 “담임목사로서 나는 어떻게 섬겨야할까?” 고민을 참 많이 했다. 그런 가운데 요즘 나의 마음을 계속해서 사로잡는 문장이 하나 떠올랐다.

“담임목사의 비전을 위해서 성도를 이용하지 말라. 담임목사라는 리더십은 성도들을 성공 시키는 것에 있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성도들을 사용하는 것에 있지 않다.” 

가장 먼저 ‘성공’에 대한 정의를 바르게 내리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 ‘성공’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의미한다.

모든 공동체마다 지도자가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권위’라는 부른다. 하나님이 지도자를 세우시고, 그들에게 권위를 주신 목적은 자신의 야망이나 비전을 위해서 공동체를 이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그들을 세우고 격려하고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 가야 한다.

하지만, 많은 지도자들이 그것을 망각한다. 특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많은 담임목사들이 자신의 비전과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동일시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이 마치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착각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것을 엄격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높은 자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지도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도자는 어떻게 섬겨야할까? 공동체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것이 지도자의 역할이고 사명이다. 이것을 잃어버릴 때 지도자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공동체 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마치 자신의 노력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하나님이 받으셔야할 영광을 자신을 가로채게 된다. 그럴 때 지도자는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우리는 그런 길을 걷는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을 보고 있다. 그런 지도자들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자신도 언젠가는 그런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위험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지도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지도자의 비전을 위해서 공동체나 따르는 자들을 이용하지 말자!” 더 나아가 “지도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신의 성공이 아닌 지체들(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을 성공시키는데 있다. 그것이 지도자가 가져야할 섬김의 자세인 것이다.” 

가정교회 세미나를 다녀와서(2)

discipleship-copy

계속해서 가정교회 세미나를 다녀온 후기를 쓰려고 한다. 두 번째는 제자훈련 사역에 대한 부분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2. 성경적인 제자훈련 사역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90년 이후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두 교회-사랑의 교회와 온누리 교회-의 영향력이 점검 사르러져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두 교회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 아니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두 분의 목사님-옥한흠 목사님과 하용조 목사님-의 소천으로 인한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사랑의 교회는 한국교회에 제자훈련 사역이 뿌리를 내리도록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옥한흠의 소천과 함께 그 영향력은 사그러져 가고 있다. 더불어 그 분의 제자훈련 사역도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필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 마태복음 7장 16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또한 누가복음 6장 43절을 보면 비슷한 내용의 말씀을 하신다.

“못된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를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두 말씀의 공통분모를 정리하면 하나이다. 나무를 알려면 그 나무가 어떤 열매를 맺느냐, 그것을 보면 된다는 것이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즉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옥한흠 목사님의 사역을 이 두 구절로 폄하하거나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필자는 정말 옥한흠 목사님을 존경한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90년대 초반 매주 월요일마다 사랑의 교회를 찾아가서 그 분의 주일설교 테잎을 구입했다(그런 테잎이 수백개 정도 되었다). 사랑의 교회에서 진행하는 거의 모든 세미나에 참여했다. 옥한흠 목사의 저서를 하나 빠짐 없이 구입했다.

그러나 지금의 사랑의 교회는 엄청난 대형교회라는 조직과 재정과 건물은 가지고 있지만, 옥한흠 목사님이 살아계실 때만큼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사역은 열매를 통해서 증명된다. 열매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고 사역이다. 사역이 승계 되어야 하고, 주님의 제자들이 계속해서 세워져야 한다. 성경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 2:2)

이 말씀은 제자훈련 사역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구절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비전의 4세대’라고 부른다. 제 1세대는 이 권면을 하고 있는 ‘바울’이다. 그 다음 제 2세대는 그 권면을 듣고 있는 ‘디모데’이다. 그리고 제 3세대는 ‘충성된 사람들’이다. 마지막 제 4세대는 ‘또 다른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가지고 제자훈련 사역의 열매는 적어도 4대까지 봐야 한다는 말한다. 그 사역이 정말 건강했는지, 그렇지 못했는지 알려면 그 다음 세대가 아닌  그 다음 다음 세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제자훈련의 원리들을 다시 사랑의 교회에 적용해 본다면, 그 결과는 너무나 명백하다. 계속해서 건강한 열매를 맺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이미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드러나고 말았다. 대형교회는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건강한 제자들을 재생산하는 것에는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옥한흠 목사님의 사역을 평가절하 하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부분은 이것이다. “왜 그런 실패를 했는가?”, “제자를 만드는 것에 목표를 둔 제자훈련 사역이 왜 실패했는가?”, “옥한흠 목사님은 무엇을 놓쳤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여러 가지 요인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두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첫 번째는 목회자 중심의 제자훈련이다. 두 번째는 지식 전달 중심의 제자훈련이다.

2-1. 목회자 중심의 제자훈련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의 사역을 평가할 때 제일 커다란 공로는 선교단체 중심의 제자훈련 사역을 지역교회라는 현장으로 옮겨 놓았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제자훈련은 철저하게 선교단체의 사역이었다. 네비게이토 선교회를 필두로 해서 수 많은 선교단체들이 제자훈련 사역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여겨왔다. 하지만 옥한흠 목사님은 그것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 결과 90년대 이후로 한국교회 안에 제자훈련 사역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과 같이 일어났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공헌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제자훈련 사역을 너무 목회자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마치 제자훈련 사역은 목회자만의 고유한 사역인 것처럼 한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목회자만이 제자를 만들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제자가 되어야 하고, 제자를 만드는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승천하시면서 모든 교회들에게 주신 사명이자 명령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그런데 지금까지의 지역교회 제자훈련 사역을 점검해 보면, 목회자 중심으로 그 사역들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평신도’를 깨운다는 목표 아래 제자훈련 사역들이 시작되었지만, 정작 그 평신도들이 사역의 주체가 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이렇게까지 비평한다. “평신도를 깨우기 깨웠는데… 깨운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 알려주지 못했다!”

2-2. 지식 전달 중심의 제자훈련

이것은 두 번째 요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제자훈련 사역이 목회자 중심으로 흘러가다보니 자연스럽게 지식 전달과 강의식 제자훈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훈련 방식을 살펴보면 강의식이나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삶으로(공동체로) 제자훈련을 하셨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예수님에게 커리큘럼이나 지식 전달이 전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드러나 있지 않지만 예수님에게도 분명 커리큘럼을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다루어야 하는지, 무엇을 훈련해야 하는지 분명한 계획과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강의실 안에서만 다루시지 않으셨다. 지식의 전달으로만 가르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삶으로 가르치셨고, 열두 명의 제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셨다. 행동, 모범, 실천, 관계, 반복, 기다림, 교정, 격려, 지지 등을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그들을 훈련 시키셨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삼년 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훈련 시키셨지만 실패했다고까지 말한다. 결국 제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성령님의 임재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예수님이 체포되자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그러하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사도행전 전체를 보면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사역을 그대로 계승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임재를 몸소 경험한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나타났던 가르침과 기적, 능력, 치유가 그대로 나타난다. 예수님의 사역과 초대교회의 사역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님도 그러하다. 성령님이 오셔서 새로운 사역들을 일으키시느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그대로 나타나도록 역사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할 수 있었을까? 두 가지가 필요했다. 삶을 통한 제자훈련과 성령 충만함이다. 어느 한 가지만 있으면 안 된다.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 삶을 통해서 훈련된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실 때 놀라운 복음의 역사, 십자가의 역사가 드러나고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그것을 너무 체계화 시켰다는 것이다. 역동적인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예배당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 묶어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인 지식을 많이 알고, 교회에 필요한 사역들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만들어 놓았다.  성서신학적(혹은 조직신학적)으로 잘 짜여진 교재 몇 권을 마쳤다고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몇 십 개의 성경구절을 암송한다고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제자반과 사역반을 마쳤다고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제자는 지식으로 만들어지거나 강의실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자는 관계를 통한 삶과 공동체 안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필자도 오랜 시간동안 제자훈련에 심취해서 다양한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사역들을 진행했고, 한국에서 유명한 선교단체에서 잘 알려진 제자훈련학교도 섬겨 보았다. 그런 가운데 내린 결론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 잘 훈련된 사람들도 많았다. 보람도 느꼈고, 목회자로 이 길을 잘 선택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평가해 보면 성경적인 제자훈련 사역에는 실패했다고 판단된다. 교회 혹은 선교단체에 필요한 일꾼들은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지만,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들을 만드는 일에는 철저하게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성경적인 제자훈련 사역을 회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 부분은 다음에 또 정리해 보도록 하자.

제로 베이스 교회 개척

iStock_000011038062XSmall-300x253오늘은 복음자리교회가 소속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주직할지방회에서 교회 개척을 위한 성결인대회를 가졌다. 총회장 목사님이 직접 내려오셔서 설교를 하셨는데… 제로베이스(Zero-Base)에서 시작하는 교회 개척에 대한 도전을 주셨다. 이것 저것 다 갖추고 마련해서 교회 개척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지만 복음에 사로잡힌 한 사람(혹은 한 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다. 이것을 ‘제로베이스 교회 개척’이라고 하셨다.

설교를 들으면서 다시 정리가 되는 것은, 그것이 바로 가정교회이고, 신약성경의 전도와 선교 그리고 교회 개척의 모델인 것이다. 어떤 건물에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고 성령을 받은 사람이 국내이건 해외이건 상관 없이 있는 곳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역들을 할 때 교회 공동체가 세워진다는 것이다. 구지 많은 돈을 들여서 건물을 얻어 리모델링이나 인테리어를 하거나 예배당을 근사하게 건축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삶과 관계를 통해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고 훈련하며,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섬김으로 인해 삶의 놀라운 변화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을 통해 복음의 영향력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행 16:31). 그래서 자연스럽게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고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가정교회이다. 사도행전과 서신서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조직과 행정, 프로그램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종교적 조직 안에 가두어 버림으로 인해 그 놀라운 역동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건물이 필요 없다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건물이 교회가 아니며, 그 건물 안에서 어떤 종교적인 행사들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과 성령의 역동성이다.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 개척 운동을 회복하려면 무엇보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성령님께 순복하는 삶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복음과 성령님이 각 사람의 마음과 삶 속에서 역사하셔서 제로 베이스 교회 개척은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질적인 숙제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성령의 역동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Zero-Base : 백지 상태로 되돌려 결정한다.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결정하다. 혹은 기존에 있던 것을 빼고 ‘0’(zero)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