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1. 최근 부흥회 중에 강사가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그래’(Yes), ‘아니야’(No), ‘기다려’(Wait), 이것이 더 좋은거야’(Another)로 응답하신다”

2. 나도 과거에 새가족 사역을 하면서 새가족들에게 기도를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 동일한 내용으로 말하곤 했다. 하지만 다시 그 내용을 들으면서 “과연 이것이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겼다. 정말 성경적인 가르침인가?

3. 기도에 대한 이런 가르침은 몇 가지 커다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첫째, 성경에서 기도를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관계’를 전제한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하거나 기계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4. 가장 비슷한 예가 ‘부부관계를 회복하는 십계명, 혹은 ‘행복한 가정을 위한 열 가지 원리’와 같은 것이다. 깨어진 부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열 가지 원리들을 정리해 놓은 것이지만, 그와 같이 한다고 깨어진 관계가 자동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수학 공식 풀듯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5.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러하다. 이런 가르침은 마치 하나님이 성도들의 모든 기도에 네 가지의 카테고리(category, 범주, 항목)를 만들어 놓고, 이 기도는 1번, 저 기도는 2번, 이 성도의 기도엔 3번, 이 문제는 4번. 뭐 이런 식으로 처리하거나 반응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기도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그렇게 단순하게 응답하시지 않으신다.

6. 둘째, 기도에는 ‘응답’이 중요하지 않다(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너무 ‘응답’에만 초점을 맞춘다. 거기엔 ‘기도’를 단순히 우리의 필요만을 요구하고 간청해서 받아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이다.

7. 가장 대표적인 예가 죠지 뮬러가 삼만 번 이상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삼만 번 이상 기도 응답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가? 죠지 뮬러는 평생 기도하며 기도제목을 적어놓은 수첩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응답을 받을 때마다 그 수첩에 체크를 했다고 한다. 죠지 뮬러가 죽은 후에 그 수첩에 적힌 것을 세어보니 삼만 번이 넘었다고 한다.

8. 하지만 죠지 뮬러가 어떻게 기도했는지에 대해선 가르치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기 위해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씨름을 했는지에 대해선 강조하지 않는다. 그냥 기도를 열심히 해서 삼만 번 이상 응답 받았다는 것만을 강조한다.

9. 사실 응답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면, 우리는 담대하게 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도엔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다. 우리의 열심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도 아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것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가 중요하다.

10. 우리의 기도엔 그 과정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과정이 우리의 기도 가운데 포함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Yes’로 응답하시든, ‘No’로 응답하시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고,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시간과 과정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1. 셋째, 샤머니즘적인 기도와 성경적인 기도의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가르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에 다양하게 반응하신다. 우리는 그것을 네 가지 – Yes, No, Wait, Another – 로 정리했다. 이런 가르침이 틀린 것은 아니다. 더욱이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기엔 아주 심플하다.

12.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전(前) 이해(pre-understanding)에 문제가 있다. 특히 우리는 기도에 대한 많은 오해와 오류들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많이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혹은 종교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기도응답을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13. 만약 성경이 기도에 대해서 그렇게 가르친다면, 불교 신자가 절에서 (부처에게) 비는 것과 기독교인이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에 다른 점이 무엇인가? 부처도, 알라도, 그 외의 수많은 신들도 그렇게 네 가지로 응답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가 그들의 기도와 다른 것은 무엇인가? 대학 입시 시즌이 되면 똑같이 백일 기도를 드린다. 똑같이 승진이나 입사, 결혼, 건강, 성공을 위해서 기도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와 저희들의 기도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14. 디모데전서 2장 1절을 보면 기도를 네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와 기도와 중보 기도와 감사 기도를 드리라고 그대에게 권합니다”(새번역)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구절을 원어적으로 더 풀어보겠지만, 일단 한 가지만 나누고 싶다. 그것은 성경은 기도를 네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1) 우리의 필요를 간청하는 ‘간구 entreaty’, (2) 교제를 강조하는 ‘기도 prayer’, (3) 다른 이들을 위한 ‘중보기도 petition’, (4)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감사 기도 thanksgiving’이다.

15.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Yes, No, Wait, Another’로 응답하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간구’ 수준의 기도에 해당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더 깊은) 차원의 기도도 배워야 한다. 단순히 우리의 필요만을 간구하는 것은 기도의 초보 수준이다. 더 깊고 풍성한 기도를 배우고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가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소망하신다. 더욱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롬 8:26).

무슬림을 위한 기도운동

라마단 기간동안 무슬림을 위해 전세계가 기도한다. 그것을 [무슬림을 위한 30일 기도]라고 부른다. 그런데 요즘 그것과 상관 없이 어느 단체에서 SNS에 올리는 기도 내용들이 있다. 궁금해서 내용들을 쭉 살펴보았다. 그런데 마음이 불편하다. [무슬림을 위한 30일 기도] 운동의 목표는 명확하다.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무슬림들을 위한 기도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무슬림들의 거짓과 잘못됨을 드러내는… 혹은 분별하기 위한… 30일 기도 운동’이라고 정의를 내리면 좋을 것 같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슬림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무슬림의 거짓에 속고 있는) 한국 기독교인들을 위한 기도라고 해야할 것 같다.

이런 식의 접근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 과연 무엇을 위해 기도하자는 말인가?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이고 필요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이슬람권을 위한 목요기도운동 http://cafe.daum.net/loveu316

무슬림을 위한 30일 기도 http://30prayer.org

기도의 단

image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개인 예배와 기도의 단이 무너졌습니다. 사람도 원망스러웠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예배와 기도생활을 등한시 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잃어버린 예배와 기도생활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기도의 단을 다시 쌓고, 예배의 자리에 서 있으려고 합니다. 감사하게도 어느 목사님의 도움으로 새벽마다 지하 드럼 연습실에서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현실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기도 시간에 하늘 아버지 앞에 서기만 하면 기쁘고 감사합니다. 자유함과 평안함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기도란 상황을 변화 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나의 마음과 태도를 변화 시키는 것이 목적인 것 같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하는 제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얼굴만을 온전히 구하는 것입니다. 복음과 성령님께 완전히 붙잡혀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예배당이 없어 불편한 것도 큰 문제가 아닙니다. 마이너스 재정이나 교인이 없어 외로운 것도 기도의 첫 번째 제목이 될 수 없습니다.

무너진 예배와 기도의 단을 다시 쌓으려고 합니다. 가난하고 애통한 심령으로, 온유하고 의에 주린 마음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합니다. 현실은 여전히 답답하지만 눈을 들어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겠습니다. 주님 품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겠습니다. 포기하거나 멈추지 말고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뻔뻔한(?) 예수님의 기도

Praying-hands묵상한 말씀 : 요한복음 17:1~8
나에게 주신 말씀 : “나는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일을 다 완성해 이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렸습니다.” (4절)

늘 읽고 묵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정말 도전이 되는 말씀이다. 과연 나의 인생에서도 예수님과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자신 있게, 뻔뻔하게… 낯짝 두껍게… 저에게 맡기신 일들을 제가 다 완성했다고, 다 성취했다고 하나님에게 고백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자신 있게 기도할 수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한 가지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확인이 되는 것은, 하늘 아버지의 뜻과 계획, 의도, 목적,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물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것은,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 분에게는 신성도 있었지만 인성도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직접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와의 연합이다. 친밀함이다. 교제이다. 그것이 핵심이다. 기도란 나의 소원이나 소망들을 간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나누고 듣고 고백하는 시간이다. 기도를 통해서 앞서 가시며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알게 되고 듣게 되고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친밀함과 기도, 그것을 통해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게 되고 보게 된다. 그래야 진정한 순종이 가능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의 노력과 열심으로 성취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 더 나아가 우리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은 더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무엇인지 기도를 통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기도(말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와 만남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추측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다.

나도… 내 인생을 마감할 때 예수님과 같이 기도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과 같이 고백할 수 있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