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02-sermon-on-the-mount-1800저의 설교에 대한 피드백을 들어보면… 설교가 어렵다고들 하십니다. 가장 가까운 아내도 동일한 이야기를 합니다. 좀 쉽게 설교를 하라고 합니다. 원론적으로는 동의를 합니다. 그리고 저도 설교를 쉽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몇 번씩 문장을 고치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쉽게 전달이 될 수 있을까 고민을 합니다.

그런 가운데 한 가지 우려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설교를 조금만 어렵게 하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듣기에 편하고 좋은 설교가 한국교회의 신앙 수준을 떨어뜨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어렵고 교리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설교를 ‘죽’에 비유를 합니다. 담임목사가 한 주간 열심히 요리를 해서 성도들이 먹기에 좋은(소화하기에 무리가 없는) ‘죽’으로 만들어 떠 먹여 주는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이 정말 올바른 표현일까요? 그럼 1년 52주 동안 죽만 먹는다는 말인데… 그것이 신앙 성장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5장 12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끔쯤 선생이 돼 있어야 마땅한데 누군가 다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원리들을 가르쳐야 할 형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젖만 먹고 단단한 음식은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됐습니다. 젖을 먹는 사람은 모두 의의 말씀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성숙한 사람의 것입니다. 그들으 끊임없는 훈련으로 연단된 분별력을 지니고 있어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히 5:12~14, 우리말성경)

젖(혹은 죽)만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어린 아이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릴 때는 젖을 먹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하지만, 성장하게 되면 단단한 음식도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20~30년을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는 분들중에 대다수가 여전히 ‘죽’만 먹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재미 있는 이야기(예화)를 섞어서 듣기에 좋고 편한 설교를 해야지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요즘 설교가 점점 세속적인 ‘스피치'(웅변, 화술)를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럽습니다. 다양한 기교와 기술들로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아 움직이게 할지… 거기에만 너무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말씀(본문)보다는 설교자에게 너무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무엇’을 설교했느냐?”에는 별 관심이 없고, “‘누가’ 설교를 했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나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는 다 놓쳐 버리고, “기억에 남는(감각적인) 이야기가 무엇이었느냐?”에만 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화술이나 언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설교의 1차적인 목적은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드러나거나 앞서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말씀보다 설교자에게 더 초점을 맞춘다면 이미 그 설교는 실패한 것입니다. 설교자는 철저하게 말씀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달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강해설교’가 설교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풀어주는 것이 설교의 본분이고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쉬운 설교를 할지, 어려운 설교를 할지… 결정을 설교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하나님의 말씀)이 합니다. 격려를 할지, 위로를 할지, 축복을 할지, 책망을 하지도 설교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합니다. 설교자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회중들을 울리고 웃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이 심령에 부딪혀 왔을 때 울든지 웃든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적용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가 구체적인 적용을 제시해 줄 수도 있지만, (원론적으로 본다면) 설교자가 본문을 바르게 풀어주면 듣는 성도들의 심령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구체적으로 적용하게 하십니다.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게 하시는 분은 설교자가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적용은 설교자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는 회중들의 몫입니다. 말씀 앞에 진지하게 고민하고 반응해야 할 책임이 회중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1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어서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행 17:11, 우리말성경)

우리의 문제는 그 모든 것을 설교자가 다 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설교자 한 사람이 열심히 관찰하고 해석하고 적용해서, 소화하기에 적당한 ‘죽’으로 만들어 떠 먹여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조금만 딱딱하거나 소화하기에 불편한 음식을 주면 금방 뱉어 버리거나 불평을 합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 미성숙한 어린 아이들만 차고 넘칩니다. 다양한 직분은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어린 아이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린 아이들만 있습니다.

우리의 숙제는 명확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베뢰아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해야 합니다. 들은 말씀을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하고 묵상할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갈급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세우야 합니다. 삶 속에서 들은 말씀을 살아내기 위해 대가를 당당하게 지불할 수 있는 성도들로 훈련 시켜야 합니다. 위에 언급된 ‘베뢰아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바른 설교자로 설 수 있기를… 한국교회 공동체 안에 베뢰아 사람들처럼 진지하게 말씀 앞에서 씨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복음자리교회 창립 1주년이 되었네요!

어제는 복음자리교회가 창립 1주년이 되는 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가정들과 함께 즐거운 야외예배를 드렸습니다(제주도의 엄청난 바람을 맞으며). 지난 1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참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ㅎㅎㅎ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어제 나눈 말씀을 요약해서 올립니다.

‪#‎말씀‬ : 삼상 23:2,4; 30:8; 대상 10:13!4
‪#‎제목‬ :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따라

1. 비교

㈎ 사무엘상의 주인공은 세 사람이다. 사무엘과 사울, 그리고 다윗이다.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의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신다. 그것을 요약해 놓은 말씀이 사무엘상 2장 30절이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 사무엘상은 이 말씀을 대조되는 네 사람을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네 사람이란 엘리(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와 사무엘 그리고 사울과 다윗이다. 제사장으로 세워졌지만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한 사람이 바로 엘리와 두 아들이었다. 동일하게 왕으로 세워졌지만 하나님을 경멸하고 불순종한 사람이 사울이었다.
㈐ 하지만 무능하고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누구보다 하나님을 존중하고 섬겼던 사람이 바로 사무엘과 다윗이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며 복을 주셨다.

2.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삶

㈎ 그렇다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삶이란 무엇인가? 사무엘과 다윗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으로 다시 설명한다면 하나님께 묻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의 삶의 특징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분의 뜻대로 순종한다는 것이다.’ 사울에게 좇기는 상황에서 그일라 백성들을 돕기 위해 나아갈 때도 그러했고, 아말렉에게 가족들이 모두 잡혀갔을 때도 그러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였다.

㈐ 하지만 사울은 어떠했는가? 왜 사울과 그 가문이 파멸하게 되었는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는가? 그것을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말씀이 역대상 10장 13절가 14절의 말씀이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다. 사무엘을 통해서 아말렉의 모든 것을 전멸시키라는 말씀이 전해졌지만 자신들의 눈에 보기에 가장 좋은 것을 살려두었다. 또한 늦게 오는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율법에 명확하게 금지되어 있는 무당을 찾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다. 하지만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며 죽이지 않는다.

3.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 복음자리교회가 창립된지 1주년이 되었다. 이제 겨우 첫 돌이 된 것이다. 여러 가지로 미약하고 연약한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하심을 우리는 기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가치와 헌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결과가 어떠하든지 움직이는 것이다.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공동체의 핵심 가치가 되기를 축복한다.

㈏ 복음자리교회가 어떤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단순하고 역동적인 신앙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답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순종하고 반응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역동적인 성령의 역사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2014년 3월 23일 주일설교

제목 : 부흥의 영적 원리들

말씀 : 역대하 7:13~14

참된 설교자를 꿈꾸며

“에스라는 주님의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지켰으며,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였다.”(에스라 7:10)

설교를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느 때는 말을 논리 있게, 설득력 있게 잘하는 사람이 부러웠다. 어느 때는 재미 있게 사람들을 웃을 수 있도록 만드는 설교가 부러웠다. 또 어느 때는 스토리텔링을 잘하는 분들이 참 부러웠다. 근데 교회를 개척하여 1년 가까이 설교를 하면서 계속 느끼는 것은 말씀에 온전히 사로잡혀 말씀만을 간결하게 분명하게 명확하게 전달하는 설교를 하고 싶다. 재미 없을수도 있고, 논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담대하고 전하고 싶다.

그런데 그런 설교가 생각보다 어렵다. 이유는 내가 먼저 그 말씀 가운데 푹 잠겨야 하는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신학적으로나 성서 해석학적으로는 어렵지 않다. 본문을 분석하거나 연구하거나 적용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제일 어려운 것은 그 말씀이 먼저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것이다. 그것이 쉬운 것 같은데 안 된다. 한 주간 그 감격과 은혜와 역동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 하루 이틀 정도는 유지가 되는데 주일 강단에 설 때까지 유지가 잘 되지 않는다. 금방 꺼지고 사라진다. 그래서 더 답답하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일주일 내내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비법을 배우고 싶다.

유명한 식당을 보면 적어도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자신들만의 비법이 있다는 것과 둘째는 언제나 그 맛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똑같이 요리를 하는데 그 맛이 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비법이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법이 있는 것이다. 또한 언제 가서 먹어도 맛이 항상 동일하다. 변함이 없다. 매주일 강단에 서야 하는 설교자로서 그런 비법을 배우고 싶다. 항상 똑같은 말씀의 맛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다. 특히 다른 사람들의 비법이 아니라 나만의 비법을 찾고 싶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왕도는 없다. 방법은 하나이다. 그것은 실패를 많이 하는 것다. 또 시도하고 또 시도하는 것이다. 말씀에 온전히 잠길 때까지 계속 도전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채우고 또 채우는 것이다. 그 갈망과 배고픔을 가지고 계속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마치 엘리사가 영감의 갑절을 구하며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 갔던 것처럼 말이다.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강까지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따라감으로 그 간구에 응답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열왕기하 2장 참조).